[거연심우소요]
천불천탑의 도량 천불산 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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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2 년 9 월 [통권 제113호] / / 작성일22-09-05 10:31 / 조회3,536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23 | 운주사 ①
호남湖南의 땅이다. 물을 일컫는 호湖가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를 말하는지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道界를 형성하는 금강錦江을 말하는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물을 경계로 하여 남쪽에 있는 땅이다.
호남湖南 땅 천불산 운주사
운주사雲住寺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道岩面 대초리大草里 천불산千佛山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옛날 나주목羅州牧이었던 나주시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다도면茶道面이 나오는데, 이곳을 지나 나주호를 우회하여 동쪽으로 가면 도암면에 도달한다. 광주시에서는 화순읍을 지나 남쪽으로 능주면을 지나 더 아래로 가면 도암면에 이른다.
옛 나주 관아官衙에 남아 있는 금성관錦城館의 웅장한 모습은 보는 이를 압도하고, 다도면에 있는 풍산豊山 홍씨 세거지 도래[道川]마을은 오늘날 아름답게 단장되어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민속마을로 바뀌었다. 안향安珦(1243~1306) 선생의 후예인 나의 장인어른은 이 도래마을의 홍부자집 막내 따님에게로 장가를 가셨다. 나주평야의 넓은 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홍씨 집안은 우리 역사의 흥망성쇠를 그대로 겪기도 했는데, 동백나무와 비자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 덕룡산德龍山 불회사佛會寺(=佛護寺)에 시주를 많이 했던 단월檀越이기도 했다. 지금의 불회사는 옛날 어려웠을 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새로 단장되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산은 더 온순해지고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어 마음은 고요해지고 어지러운 정신은 차분해진다. 초록빛으로 대지가 물들어가는 봄날도 좋고, 흰 눈이 대지를 온통 덮어 백설白雪의 고요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겨울 풍경도 좋다. 아예 한여름 염천炎天 아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더운 바람이 부는 들판을 지나 천불산 골짜기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 보는 것도 또한 좋다.
운주사에는 여러 번 왔다. 처음에는 이상한 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금하여 먼 길을 찾아왔다. 다른 곳에서 보던 사찰과는 너무 달라 이상했다. 흙먼지가 날리는 절은 가난하여 승려들이 보이지 않았고, 들판에는 이상하게 생긴 돌탑들과 역시 이상하게 생긴 석불상石佛像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참 이상했다(사진 1). 그 후에도 궁금증이 더하여 이 부근으로 오는 기회가 있었을 때 다시 와 보았다. 산 위로도 가 보고 바위 위에 서 있는 탑에도 가 보았지만, 모양도 위치도 역시 이상했다. 그 이후에도 교수들과 같이 가 세세히 살펴보기도 했고, 운주사의 계곡과 능선을 걷고 싶어 들린 적도 있다. 어느 때나 이상한 사찰이라는 생각은 가시지 않았다.
예부터 흔히 운주사에는 천불천탑千佛千塔이 있었다. 현재는 21기의 석탑과 101여 기의 석불이 있다. 일본 식민지 시기인 1942년에도 석탑은 30기, 석불은 213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 현재까지 또 많이 사라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다. 절의 좌우 산등성이에는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가 있고, 또 석실에는 2개의 석불이 서로 등을 지고 앉아 있다(雲住寺 在千佛山寺之左右山背石佛塔各一千 又有石室二石佛相背而坐).”라는 기록이 있다. 석탑과 석불이 골짜기를 가득 매울 만큼 많아 이런 표현을 썼는지 아니면 진짜 각각 1000개씩 있어서 그렇게 기록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전체 주위를 살펴보아도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씩 들어설 만한 공간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무거운 돌로 만든 탑과 석불이 그렇게 많이 사라지다니 이것도 이상하다(사진 2).
다양한 운주사의 창건설화
운주사의 전체 모습은 삼국시대 이래의 사찰들과 비교할 때 너무 예외적이어서 그 창건설화도 구구하다. 창건과 관련된 기록이 없으니 세월이 흐르면서 온갖 이야기들이 보태어졌다.
신라 때의 고승 운주雲住화상이 신령한 거북이 옮겨주는 돌로 석탑과 석불을 조성하였다는 이야기, 무속신앙에서 세상을 최초로 만들었다고 하는 마고麻姑할미가 지었다는 이야기, 어떤 사람이 평생 이 골짜기에 석불과 석탑을 만들어 채웠다는 이야기, 석공들이 석불과 석탑을 만드는 연습장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 등등. 이런 것만 있겠는가. 이야기꾼들이 만들어 내기 나름이니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도 있다.
걸핏하면 등장하는 풍수風水 이야기다. 풍수지리라고 하면 늘 등장하는 인물이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다. 그는 한반도는 배의 형상이기에 바다에서 배가 뒤집히지 않으려면 선복船腹이 무거워야 하기 때문에 한반도의 선복인 이곳에 천불천탑을 쌓아 무겁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반도 지형상 영남에는 산이 많고 호남에는 산이 적어 배가 무거운 동쪽 영남으로 기울어 땅의 정기가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술을 부려 하룻밤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얘기는 숙종시대인 1675년에 출간된 『도선국사실기道詵國師實記』에 실린 이래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속설의 확산과 함께 절 이름도 운주사雲住寺라고 하지 않고 운주사運舟寺로 불리기도 했다. 석불과 석탑의 조성이 돌무게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니 불상을 만들고 불탑을 조성하여 공양하는 『법화경法華經』의 조불조탑造佛造塔 신앙과도 연관은 없는 셈이다.
그런데 우선 『도선국사실기』라는 기록이 합리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운주사의 유적들이 12~13세기의 양식인 점을 근거로 9세기의 인물인 도선국사를 운주사와 연결시키는 것은 허황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17세기에 들어와 도선의 비보裨補사찰설, 비보신앙, 풍수도참설이 전국으로 퍼뜨려지기 전 현종(顯宗, 1659~1674)대인 1656년 간행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는 고려의 혜명慧明화상이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불상과 탑을 조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도 사실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불교에서 풍수는 밀교密敎에서 도량道場을 개설할 때 위치 선택을 중요시한 택지법擇地法과 연결이 되어 있고, 도선화상도 밀교계열의 승려일지도 모른다며 걸핏하면 불교에 도선국사니 비보사상이니 풍수지리니 하는 것을 끌어다 붙이지만, 싯다르타에게 한번 물어보라,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인가를! 불교의 진면목은 사라지고 도선국사니 무학대사無學大師(1327~1405)니 하며 풍수, 도참, 예언, 비기 등 온갖 잡설이 붓다의 진리를 밀어낸 연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성찰해 볼 일이다.
풍수 아니면 자주 등장하는 것이 미륵彌勒이다. 운주사의 석불이 투박하고 어설픈 것을 하층 민중들의 이미지로 연결시키고, 기존질서에 반란을 일으킨 노비와 천민들이 미륵이 도래하는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기원하며 신분해방의 소원으로 석불과 석탑을 쌓다 보니 골짜기에 천불천탑이 생겼다는 이야기다. 이런 발상을 장길산 이야기와 엮어간 사람도 있는데, 운주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절이고 장길산의 반란은 조선시대 숙종 때의 일이기에 말이 안 되는 것이라는 비판의 화살을 맞기도 했다. 그런 허황된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잘못이리라.
운주사를 밀교密敎와 연관지어 보려는 이야기도 있다. 운주사에서 출토된 수막새 기와에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진언眞言(mantra)이 산스크리트어로 양각되어 있는 것, 돌집 안에 있는 두 부처를 밀교적인 음양불陰陽佛로 볼 수 있다는 것, 돌부처들이 대부분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는 것, 천불을 조성하여 모시는 천불신앙이 밀교에서 널리 믿어졌다는 것 등을 이유로 제시한다. 이런 것을 약사藥師신앙과 만다라曼茶羅 그리고 도선의 비기, 도참 등과 연결시키면 그럴듯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 한반도에서 밀교의 상황이 먼저 규명되어야 할 일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천불천탑이 몽골 침략기에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13세기 고려 고종 연간은 최씨 무신정권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면서 몽골의 침략에 시달리던 때였다. 당시 고려 왕실은 매일같이 각종 기도도량을 열고, 몽골군이 불태워 버린 대장경을 다시 간행하는 등 불교를 중심으로 혼란스런 민심을 모아 몽골군을 물리쳐 보려고 했다. 고종 25년(1238)에 몽골군은 고려인들의 저항의식을 무너뜨리기 위해 신라 이래 호국의 상징인 황룡사皇龍寺의 구층목탑까지 불질러 버렸는데, 이때 고려 조정에서 황룡사를 대신할 인왕도량仁王道場으로 급히 만든 것이 운주사라는 것이다. 석탑이나 석불도 이런 와중에 급하게 만들다 보니 이상하게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근거도 없는 황당한 발상에 운주사가 졸지에 인왕도량으로 되었다. 이상한 절에 이상한 이야기만 무성하다. 어차피 아무런 근거가 없으니 이야기를 만들자면 여러 갈래로 무궁무진하게 풀어갈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불교는 무엇인가? 불교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운주사의 석불과 석탑의 배치
지난 날 운주사에 왔을 때는 다른 절과 달리 사역寺域으로 들어가는 문이 없었다. 그냥 골짜기에 들어서면 여기저기 탑들과 석불들이 서 있고 석물들이 흩어져 있었다. 근래에 와서 일주문一柱門도 새로 세우고, 보제루普濟樓, 범종각, 대웅전, 지장전, 미륵전 등과 같은 당우들을 새로 지었다(사진 3). 들판에서 골짜기로 들어가면 좌우로 다양한 석불들이 여기저기 있고, 흩어진 석물들을 모아 정돈해 놓은 것도 눈에 띈다.
발굴 조사의 결과에 의하면, 원래 금당金堂이 있었던 곳은 현재의 주차장 위쪽 구역으로 밝혀졌기에 현재의 가람 배치는 근래에 당우들을 신축하면서 조성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주문부터 걸어 들어가며 사역의 불상과 불탑을 가람의 배치와 관련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예전에는 금당 구역을 지나 안쪽으로 난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면 그 골짜기와 양쪽 산등성이에 수많은 불상과 불탑이 서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고, 계속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면 높은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을 보았으리라. 이것이 절에서 골짜기로 깊숙이 들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풍경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운주사가 폐사가 된 기간에도 불탑과 불상의 중창은 있었는데, 이에 비추어보면 불탑의 모양과 불상의 위치가 처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일부에서 변경이 있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흩어져 있는 돌을 모아 새로 쌓은 탑이 있을지도 모른다(사진 4).
사진 5. 원중식 서 영귀산운주사 현액(상). 사진 6. 원중식 서 천불천탑도량 현액(하).
일주문에는 ‘영귀산운주사靈龜山雲住寺’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후 조선시대에 발간된 『동국여지지(1656)』,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 『능주목읍지綾州牧邑誌(1789)』, 『대동지지大東地志(1863)』, 『호남읍지湖南邑誌(1871)』 등에 이르기까지 공적 기록에는 산의 이름이 천불산으로 되어 있는데 왜 영귀산으로 바꾸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거북이 돌을 날라다 주었다는 설화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뜬금없는 일이리라. 서예가야 부탁을 받고 쓴 것이니 현판을 쓴 이를 탓할 수는 없다(사진 5, 사진 6).
일주문을 통과하여 뒤돌아보면 ‘천불천탑도량千佛千塔道場’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두 개의 현판은 모두 서예가 남전南田 원중식元仲植(1941~2013) 선생이 썼다. 위비魏碑의 풍을 머금고 있는 고졸한 글씨다. 운주사가 주는 인상에 어울리는 모양으로 쓴 것으로 읽힌다.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1911~1976)선생에게서 서법書法을 전습한 그는 평생 진지하게 탐구하고 구도하는 자세로 서법가의 길을 길었다. 남전선생이 세상과 이별하기 얼마 전 서울에서 서로 만나 서예에 대하여 진지한 대화를 나눈 것이 선생을 마지막 본 모습이 되고 말았다.
일주문을 지나면 구층석탑九層石塔이 비쩍 마른 모습을 하고 먼저 눈앞에 들어온다.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탑인데, 각 층의 탑신에 새겨진 문양이 꽃잎 모양, 마름모 모양 등 구구각각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에서 볼 수 있는 비천상飛天像이나 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 사천왕상四天王像등과 같은 화려한 불교양식은 이 동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사진 7).
구층석탑에서 석벽 위로 바라보면, 채석장에서 바로 떼어낸 석판들을 그냥 쌓아 올린 것 같은
못 생긴 석탑이 하나 서 있다. 그 석벽에는 석불 여러 기가 기대어 세워져 있고 앉은 불상도 놓여 있다(사진 8). 이를 지나면 여러 기의 칠층석탑七層石塔들이 또 서 있다. 석탑들이 서 있는 공간 사이에는 앉거나 서 있는 여러 모습의 석불들이 있다. 여기에서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면 커다란 석조불감石造佛龕 속에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는 석불을 안치한 거대한 석조물을 만나게 된다. 이런 석조물은 전국에서 유일하다(사진 9). 이를 지나면 갑자기 다층의 원형석탑이 나타난다(사진 10). 모양도 다양한 이런 다층석탑들이 왜 그런 자리에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원형석탑을 지나 보제루를 지나면 대웅전이 보이는 사역으로 들어선다. 보제루에는 역시 남전선생이 ‘운주사雲住寺’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근래에 세운 대웅전 앞에는 모전탑模塼塔 계열의 다층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는 신라의 모전탑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한다. ‘대웅전大雄殿’이라고 쓴 현액의 글씨는 조계종 종정을 지낸 월하月下(1915~2003) 대선사
가 썼다(사진 11). 생전에 통도사通度寺를 찾아가 대선사를 뵌 적이 있는데, 입적하신 후 49재를 올릴 때 하늘에 방광放光한 모습이 지금도 영상으로 남아 있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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