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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禪, 禪과 시]
모래알 하나에서 세계를 보고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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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2 년 9 월 [통권 제113호]  /     /  작성일22-09-05 10:41  /   조회2,95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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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예보되어 있지만 동창회의 산행은 예정대로 진행됩니다. 박종한 교수의 30ℓ짜리 록클라 

이밍 전용 배낭이 단연 눈길을 끌었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큰 배낭을 메고 산에 오는 사람을 보면 야코가 죽었습니다. 큰 배낭은 젊었을 때는 돈이 없어서 못 샀고, 지금은 자신이 없어서 못 삽니다. 그는 홀로 버스를 타고 방짜유기박물관 입구에서 내려 걸어 들어왔습니다. 우리 나이에는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산뜻한 품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진 1. 끝없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소나무 숲. 

 

오늘은 가벼운 산행입니다. 산행이란 본질적으로 놀러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는 걸을 때, 몸을 놀리고 있을 때, 살아 있는 것입니다. 북지장사 입구에 있는 1.3km 소나무 숲길은 솔향이 가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땅을 다시 밟는 느낌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 끝없는 이야기

 

소나무 숲 가운데 앉아 첫 번째 휴식을 갖습니다. 우리 나이에는 30~40분 걷고 15분 정도 쉬는 것이 적당합니다. 산행을 하다가 숲 그늘에 앉아서 쉴 때, 우리는 그 순간에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모습을 가만히 마주하고 바라봅니다. 그 순간에 깊은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나 순간은 존재의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존의 깊이입니다.

 

소나무 숲에는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소나무좀 벌레가 있습니다. 성충의 길이가 겨우 4mm 정도입니다. 소나무좀 벌레에는 또 거기에 편승하는 진드기가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 작은 진드기 등에 올라타는 훨씬 더 작은 생명체들이 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청태 진균류의 포자입니다.(주1) 이들을 단순히 해충으로만 본다면 제거해야 될 벌레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들을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면 경이로운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연은 이처럼 뚜껑을 열면 계속 우리가 모르는 것이 끝없이 나옵니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그곳이 대자연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하나의 현상 밑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이처럼 중중무진한 세계를 『화엄경』은 이미 2,000년 전에 펼쳐 보여주었습니다. 예로부터 『화엄경』 80권, 약 70만 자를 요약하면 ‘중중무진’ 4자라고 했습니다.(주2) 그때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종교적 환상이나 추상적 비유로만 여겨졌습니다. 고려시대 지눌(1158~1210)은 『화엄경』을 정독하고 1207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진 2. 『화엄경』을 읽고 눈물을 흘렸던 보조국사 지눌. 

 

“『화엄경』 가운데 (여래) 출현품의 ‘한 티끌을 들어 대천세계를 포함한다’는 비유와 그 뒤에 총괄적으로 말한 ‘여래의 지혜도 이와 같아서 중생들 몸에 갖추어져 있지만 다만 어리석은 범부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구절을 열람하게 되었다. 나는 책에 이마를 대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주3)

 

무릇 경전을 읽고 눈물을 흘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눌은 『화엄경』의 여래출현품을 읽었을 때 왜 책에 이마를 대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을까요? 바로 이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뒤돌아보면 불교의 역사에서 한 종파를 건립한 종조宗祖의 위대함은 경전을 읽는 방식의 깊이에서 나옵니다. 지눌 또한 자신을 구원했던 구절에 의지해서 객관적 기초를 세우고, 그 구절을 토대로 자신의 사상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사진 3. 산길을 걸으면 들려오는 소리, “너는 누구니?” 

 

지눌은 이 구절에 의지해서 자신의 한계로부터 해방되었고, 지금껏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환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 이를 읽는 후학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전해 줍니다.

 

『화엄경』은 세계를 비로자나불의 현현으로 파악하고 한 티끌 속에 온 세상이 깃들어 있으며, 순간 속에 영원이 깃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신라시대 의상(625~702)은 『화엄경』 약 70만 자를 210자로 요약하였습니다. 어느 누가 방대한 『화엄경』을 이처럼 간략하게 요약하리라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의상 덕분에 방대한 『화엄경』의 세계를 아름다운 게송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일체 속에 하나가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네.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 있고

낱낱의 티끌마다 또한 다 그러하네.

무량한 오랜 세월 한 생각 찰나와 같고

한 생각 찰나 속에 무량 세월 들어 있네.(주4)

 

『화엄경』에 따르면 하나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화엄경』의 세계는 티끌 하나도 의미로 가득하고 중중무진의 서사적 긴장이 있습니다. 이 미묘한 세계는 의미와 향기로 가득한 세계이고 찬탄의 세계입니다. 의상 또한 세계 어디를 보든 거기서 비로자나불의 얼굴을 보았던 것입니다.

 

산길의 아름다움

 

새벽에 내린 비로 산길은 촉촉하고 온갖 흙냄새, 나무냄새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산길을 걸어간다면 산길은 우리의 영혼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너는 누구니?”

우리는 산길을 걸을 때 진짜배기 자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쩌면 자아를 찾으려고 산으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오랜 옛날부터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환하게 초록색으로 빛나는 나뭇잎마다 잎새 뒤에는 어둠이 있습니다. 

 

사진 4. 눈부신 백일홍(배롱나무) 꽃그늘. 

 

북지장사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바람고개 쪽으로 올라갑니다. 북지장사 건너편 숲에서 두 번째 휴식을 취합니다. 새소리, 바람 소리, 시냇물 소리, 발자국 소리, 들어보면 호흡 소리도 들려옵니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왜 이런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걸까요. 우리가 수많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무언가 열심히 떠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떠들지 않는다고 해도 혼자 마음속에서 수다를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떠들기를 멈추고 들려오는 소리를 듣기 시작할 때 산은 우리에게 또 다른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사진 5. 활짝 뒤집어진 나리꽃의 신비. 

 

오늘 비가 예보되어 있지만 모두 25명이 참가했습니다. 진분홍 눈부신 백일홍(배롱나무) 꽃그늘 아래 모두 모였습니다. 저 나무는 필경 누군가 한여름 붉은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심었을 것입니다. 우리들 가슴속에도 무언가 아름다운 것들이 영글었으면 좋겠군요. 여름 한때, 백일홍 꽃은 붉게 피어 절 마당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저 붉은빛은 사람의 혼을 빼앗아갈 정도로 아름다우니 풍격이 최고입니다.

 

모래알 하나에서 세계를 보고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본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은 언제나 모든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북지장사 일대에는 참나리 꽃이 한창입니다. 모든 것을 다 보여줄 듯 활짝 뒤집어진 참나리 꽃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늘의 선물처럼 나타난 이 아름다움은 우리들의 내면 가장 깊은 곳으로 파고듭니다. 자연은 숨김없이 다 보여주지만 아둔한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만,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시 한 구절은 내부 풍경을 번갯불처럼 일순 환하게 보여줍니다.

 

모래알 하나에서 세계를 보고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본다

당신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의 시간 속에 영원을 보라.(주5)

 

시구詩句 사이에 중중무진한 『화엄경』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신화적 상상력으로 쓴 시에 의해 『화엄경』은 서양인의 시각을 한 겹 더하고 보편성을 하나 더 보태었습니다. 이것은 세월을 뛰어넘고 동서양을 뛰어넘은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이와 같은 언설言說이 축적된다면 『화엄경』의 세계는 빛을 더하고 동서양이 함께 공유 가능한 세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상상인지 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진 6. 신비주의적인 그림과 시를 쓴 윌리엄 블레이크. 

 

인간의 경험에서 가장 강력한 성취감은 미적인 경험에서 옵니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 즉 이 세계는 베일에 불과한 것으로 표면만 보여줍니다. 이 세계의 완전한 의미는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 즉 저 세상에 있습니다. 블레이크는 그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찰칵, 소리가 나게 보여줍니다. 

『화엄경』과 지눌과 블레이크 사이로 수천 년의 바람이 지나가고 매미 소리가 들려옵니다.

 

 

<각주>

1) 조안 말루프, 『나무를 안아보았나요』, 아르고스, 2005

2) 曹郁美, 由於 《華嚴經》(八十卷本近七十萬字), “過於龐大, 經文中出現的世界觀雖然令人驚嘆, 但又難以捉摸. 若要具體地說, 可化約爲 「重重無盡」四字.”

3) 知訥, 『華嚴論節要』 序文, 1207 : 至閱華嚴經出現品, “擧一塵含大千經卷之喩, 後合云,“ 如來智慧, 亦復如是, 具足在於衆生身中, 但諸凡愚, 不知不覺.” 予頂戴經卷, 不覺殞涕.”

4) 義湘, 『華嚴一乘法系圖』, 668,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5) William Blake, 「Auguries of Innocence」, 1803 :

To see the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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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1976년 시). 전 대구시인협회 회장. 대구대학교 사범대 겸임교수, 전 영신중학교 교장.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저서로 『보물찾기』(시와시학사, 2000), 『납작바위』(시와반시사, 2012), 『글쓰기 노트』(집현전, 2018) 등이 있다.
jtsu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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