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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망념의 멸진과 무생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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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2 년 9 월 [통권 제113호]  /     /  작성일22-09-05 11:43  /   조회2,44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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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이 운암雲菴 선사에게 물었다. “무명은 어떤 것이고 여래의 움직임 없는 지혜는 어떤 것입니까?” 선사가 마당을 쓸고 있던 동자를 불렀다. “동자야!” 동자가 무슨 일인가 해서 고개를 들어 선사를 바라보았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이것이 바로 여래의 움직임 없는 지혜이다.” 그리고는 동자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너의 불성이냐?” 동자가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선사가 말했다. “이것이 바로 무명이다.”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과 이후

 

동자는 선사가 부르자 자동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이지만 명확하게 듣고 명확하게 반응한 것이다. 거울처럼 오는 것을 그대로 비추는 이 자리가 바로 여래의 땅이고 조사의 뜰이다. 그런데 선사가 “어떤 것이 너의 불성이냐?”고 묻자 동자는 머리를 굴린다. ‘모른다고 대답할까?’ ‘선사님이 실망하지 않을까?’ ‘그러면 공이라고 대답할까?’ 

‘불성이라고 해볼까?’ ‘어떤 스님처럼 고함을 쳐볼까?’ ‘경전 구절을 외워 바칠까?’ ‘어떻게 하면 선사님이 나를 흡족해 하실까?’ 다양한 갈래의 생각과 갈등들이 일어나 동자의 머리에서 죽처럼 끓어오른다. 무명이 창궐하는 현장이다.

 

사진 1. 『운암선사어록』. 

 

한 찰나에 청정한 여래의 자리에서 무명의 땅으로 떨어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매 순간 동자와 같은 일을 겪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찬물을 마시면 찬 줄 알고, 따뜻한 물을 마시면 따뜻한 줄 안다. 여래의 움직임 없는 지혜의 자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딱히 어느 지점이라고 특정할 수 없는 한순간에 분별이 일어난다. ‘더운 여름엔 역시 시원한 물이 딱이야!’, 혹은 ‘이 더운 날에 뜨거운 물은 영 아닌데?’ 그리고는 번뇌가 일어난다. ‘시원한 물을 내어준 이 사람이 좋다.’ 혹은 ‘더운 날 뜨거운 물을 내어주는 이 인간은 도대체 뭔가?’ 이처럼 분, 초를 나눌 틈조차 없이 탐진치와 그에 부수된 번뇌의 작용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일까? 나와 대상에 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나의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작은 도전에도 불처럼 화를 내고 헛된 칭찬에도 미친 듯 기뻐한다. 그렇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나와 모든 대상에는 실체가 없다. 일체의 내외적 현상들은 인연의 조합일 뿐이다. 5온, 12처, 18계가 모두 그렇다.

 

우리 존재는 분명히 정신적, 물질적 요소인 5온의 임시적 결합이다. 그런데 이 5온의 각각에, 혹은 그 결합체에 나라고 부를 실체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한편 우리 존재는 눈과 귀와 코와 같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지각 활동으로 그 존재성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 여섯 가지 주관적인 감각기관에 우리 존재를 지배하는 주재자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모양과 소리와 향기 등의 여섯 가지 객관적인 대상에 별도의 주재자가 머무는 것일까? 모두 그렇지 않다. 이 5온과 12처(6근+6경)에는 주재자가 없다. 그렇다면 내부의 주관적 감각기관과 외부의 객관적 대상이 만나 인식활동이 일어나는 자리가 신령한 주재자가 존재하는 곳일까? 역시 그렇지 않다. 이것들은 18계가 모두 공하여 실체가 없으며 연기적 생멸이 일어나는 현장일 뿐이다.

 

피노키오의 배 먹기와 불교공부

 

그렇다면 연기적 생멸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냥 허공과 같은 빈자리에서 근거 없는 우연으로 일어나는 것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불교의 역사에는 연기적 생멸이 일어나는 원리, 혹은 그 본질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의 흔적이 뚜렷하다. 그중에서도 아뢰야연기론, 진여연기론, 법계연기론 등으로 전개되는 연기의 본성[性起]에 대한 대승불교의 논의는 선 수행자들에게 절대적인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당장 육조스님의 자성연기론이 그렇다.

 

6가지 감각기관이란 무엇인가? 눈, 귀, 코, 혀, 몸과 의식이 그것이다. 자성에서 6가지 인식이 일어난다. 눈의 인식, 귀의 인식, 코의 인식, 혀의 인식, 몸의 인식, 의식의 인식이 그것이다. 또한 자성에서 6가지 감각기관과 6가지 인지대상이 일어난다. … 자성에 삿되면 18계가 삿되게 일어나고, 자성에 바르면 18계가 바르게 일어난다. 이것을 잘못 쓰면 중생이고, 잘 쓰면 부처이다. 작용은 어떠한 것들로부터 일어나는가? 자성으로부터 일어난다.

 

일체의 연기적 작용이 자성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연기 자체가 자성의 작용이다. 천변만화로 나타나는 현상이 그대로 본질이라는 말이다. 현상이 그대로 본질이므로 버려야 할 껍데기와 취해야 할 알맹이가 따로 없다. 이것을 피노키오의 아침 식사에 비유할 수 있다.

 

“배가 고파요!” 제페토 할아버지는 배고픈 피노키오에게 자신의 아침 식사로 가지고 있던 배를 세 개 내어주었다. 피노키오가 배 껍질을 벗겨 달라고 말했다. 제페토 할아버지는 새로 생긴 아들의 짧은 입을 걱정하면서도 배 껍질을 벗겨주었다. 피노키오는 배를 먹고는 그 속을 던져버렸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하나하나 주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피노키오는 배를 세 개 먹고도 여전히 배가 고팠다. 제페토 할아버지에게는 더 먹을 것이 없었다. 피노키오는 하는 수 없이 탁자 위의 배 껍질을 먹었고, 제페토 할아버지가 주워서 올려놓은 배의 속까지 먹어버렸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피노키오는 비로소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사진 2. 배(껍질과 과육과 심) 

 

배는 껍질과 과육과 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껍질과 과육과 심을 전부 합한 것이 배다. 처음에 피노키오는 껍질과 심을 버리고 구미에 맞는 과육만을 먹는다. 제대로 과일을 먹은 것이 아니므로 배가 부를 수 없다. 결국 피노키오는 벗겨두었던 껍질과 던져두었던 심까지 다 먹고 나서야 비로소 배 먹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불교공부는 피노키오의 배 먹기와 같다. 처음에는 껍질과 심을 내놓은 과육과 같은 순수한 진리를 따로 찾는다. 자연히 일상사를 하찮게 여기면서 별도의 숭고한 진리를 찾아 저 멀고 깊은 곳을 찾는 여행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맛도 없고 진도도 나가지 않는 지루한 여정을 만나게 된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고개를 돌려 보는 계기가 찾아온다. 그때 하찮게 여겨졌던 일상과 맛없고 지루하기만 한 공부가 부처의 마음이 나타난 현장임을 확인하는 눈뜸이 일어나게 된다. 

 

인욕바라밀의 세 가지 차원

 

그래서 이 공부는 자기 좋은 것만 골라 먹는 편식 취향을 거듭 내려놓는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은 눈앞의 인연을 온전히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므로 참음[忍]을 주된 실천덕목으로 삼는다. 대승보살의 길로 제시된 6바라밀에 인욕바라밀이 주된 실천항목으로 들어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인욕바라밀에도 표층과 중층과 심층의 층차가 있다. 먼저 자아 중심의 편식 취향이 아직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누르거나 순화시키는 차원의 참음이 있다. 그리하여 자신을 해치는 일에 화내지 않고 자신을 떠받드는 일에 기뻐하지 않는 실천을 한다. 이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여전히 해침과 떠받듦을 분별하는 자아가 남아 있다. 이것을 중생 차원의 참음이라는 뜻에서 중생인衆生忍이라고 부른다.

 

다음으로 일체의 생멸 현상이 불생불멸의 본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이치를 완전히 믿고 그것을 수용하는 데서 일어나는 참음이 있다. 법에 대한 완전한 믿음과 수용에서 나오는 참음이므로 이것을 법인法忍이라고 부른다. 중생 차원의 참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성취이다. 『불장경佛藏經』의 비유에 의하면 법인을 성취하는 일은 ‘수미산 아래의 사대부주와 중간의 사

왕천과 정상의 도리천을 모두 짊어지고 모기만 한 작은 발로 끝없는 계단을 올라가 보다 상층의 색계범천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이 희유한 일이다.’ 

 

사진 3. 인순법사 

 

그럼에도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무생무멸의 진리가 완전히 체화되어 스스로 그 자체가 되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생무멸의 법과 하나가 되는 이 일을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고 부른다.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자아와 대상에 대한 집착이 없으므로 그 참음은 더 이상 참음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중국의 인순印順 법사 같은 이는 무생법인의 인忍을 지혜로 해석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니까 대승보살의 실천 항목인 인욕바라밀에는 ‘중생의 극기로서의 참음’, ‘불생불멸의 진리에 대한 믿음과 수용으로서의 참음’, ‘불생불멸의 진리와 하나가 되는 지혜로서의 참음’이라는 여러 층의 참음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상호 간에 동질성과 차별성을 갖지만 결국 앞의 두 참음은 진짜 참음인 무생법인無生法忍으로 완성되어야 할 과정 중의 한 지점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참음은 어떻게 실천하고 어떻게 성취하는가? 그저 억누르고 참다 보면 저절로 참아지고, 또 그것이 저절로 체화되는가? 그렇지 않다. 억누르는 방식의 참음은 그 반발력을 강화하여 오히려 더 큰 희노애락의 발산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참음이 생멸 없는 진여불성과 만나는 일을 지향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진여불성이 무생무멸이므로 그것과 만나는 일 또한 무생무멸의 실천, 그러니까 무심의 실천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무생법인의 바른 의미

 

그래서 성철스님은 “망념이 멸진하면 이것이 무생이다.”는 말로 무생법인의 전체 설법을 끌고 나간다. 여기에도 구경무심을 강조하는 성철선의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성철스님은 무심에 여러 층차가 있지만 진짜 무심은 구경무심일 뿐이라고 강조하는 입장이다. 무생법인 역시 마찬가지다. 원래 교가의 설에 의하면 무생법인은 초지初地 보살이나 7지, 혹은 8지, 혹은 9지 보살이 증득하는 경계이다. 경전에 따라 그 기준이 각기 다른 것이다.

 

사진 4. 머리칼로 진흙을 덮어 연등불을 봉양한 석가모니 전생의 인욕행. 

 

무생법인의 의의는 진리와 만난 자리에서 다시 뒤로 물러나는 일이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무생법인을 증득한 보살을 아비발치, 즉 불퇴전 보살이라 한다. 선문에는 무생법인을 증득하여 불퇴전을 성취한 8지보살을 특히 중시하는 관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성철스님의 8지보살에 대한 부정은 단호하다. “경전에서 여러 가지로 무생법인을 설하고 있지만 묘각만이 진무생眞無生”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백일법문』의 설법을 보자.

 

“누구든지 일체 유ㆍ무의 제법에 탐착하지만 않으면 이것을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합니다. 무생이란 무생법인을 증득한 팔지보살의 무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멸진정滅盡定도 벗어나고, 자재보살위自在菩薩位도 벗어나며, 십지十地와 등각等覺마저 벗어난 불지佛地의 무생無生을 말합니다.”

 

망념이 영원히 생겨나지 않는 불지佛地의 무생이라야 진정한 무생법인이라는 말이다. 이같은 의미 규정에는 구경무심을 강조하는 성철스님의 수증론이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원래 무생법인의 해석에는 지혜[智]의 완성을 강조하는 입장과 번뇌의 끊음[斷]을 강조하는 입장이 있다. 지혜의 완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일체법에 생멸이 없음을 몸소 깨닫는 일을 무생법인이라고 설명한다. 이 경우, 아무래도 무생무멸의 법을 바로 가리켜 보이는 가르침이 주를 이루게 된다. 현장에서의 눈뜸을 촉발하기 위해서다.

 

이에 비해 끊음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일체의 망상과 번뇌가 끊어지는 것을 무생법인이라고 규정한다. 성철스님이 이러한 입장에 속하며 이 경우, 끝없는 내려놓음을 강조하는 법문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에 의하면 모든 심의식의 구름을 걷어낸 구경무심이 곧 무생법인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무심이 아니라면 그것조차 내려놓고 다시 화두를 들어 무심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지혜와 끊음은 무생법인의 일체 양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빛이 나타나면 어두움이 사라진다’는 말과 ‘어두움이 사라지면 빛이 나타난다’는 말이 완전히 같은 뜻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강조하는 입장에 따라 가르침의 기풍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성철스님은 직접 가리켜 보이는 법문보다 유심의 장애를 떨어내도록 하는 법문에 더 힘을 실었던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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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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