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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달마대사와 사주대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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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2 년 9 월 [통권 제113호]  /     /  작성일22-09-05 11:47  /   조회72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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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 한 짝 들고 총령을 넘은 달마스님 

 

달마스님을 보기로 들어 보겠습니다. 불교인이라면 거의 알고 있는 달마스님의 이야기 가운데 ‘척리서귀隻履西歸’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짝 하나를 들고 서천西天, 곧 인도로 가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달마스님이 혜가慧可스님에게 법을 전하고 앉은 채로 열반에 드시자 웅이산熊耳山에다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 뒤 몇 해가 지나 송운宋雲이라는 사람이 인도에 가서 많은 경經을 수집하고 귀국하는 길에 총령葱嶺(파미르 고원)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어떤 스님 한 분이 신짝 하나를 메고 고개를 올라왔습니다. 가까이 왔을 때 자세히 보니 그 분은 달마스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제 너희 나라와는 인연이 다하여 본국으로 간다. 그런데 네가 인도로 떠날 때의 임금[효명제孝明帝(516~528)]은 죽었어. 가보면 새 임금이 계실 테니 안부나 전하게.”라고 말씀하시고는 고개를 넘어가셨습니다.

 

사진 1. 달마대사가 짚신 한 짝을 메고 넘어갔다는 파미르 고원의 설산. 

 

송운이 돌아와 보니 과연 먼저 임금은 죽고 새 임금[동위東魏의 효정제孝靜帝]이 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도에서 달마스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달마스님은 돌아가신 지가 여러 해가 지났다고 했습니다. 송운은 너무 놀라 자기 혼자만 본 것이 아니라 수십 명이 함께 달마스님을 보았으니 절대 거짓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여 달마스님의 묘를 파 보기로 했습니다. 무덤을 파 보니 빈 관만 남아 있고 관 속에는 신 한 짝만 놓여 있었습니다.

달마스님의 ‘척리서귀’라는 말은 선종에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후死後에도 이처럼 대자유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에 대한 조주스님의 법문이 있습니다.

 

조주 남쪽 석교 북쪽 趙州南石橋北

관음원 속에 미륵이 있도다. 觀音院裏有彌勒

조사가 신 한 짝 남겨 두었으나 祖師遺下一隻履

지금에까지 찾지 못하도다. 直至如今覓不得

 

사진 2. 일본 임제종의 선승 하쿠인(白隠慧鶴, 1686〜1769)이 그린 척리달마도隻履達磨圖의 부분도. 

 

‘조주스님’ 하면 천하만고에 다 아는 대조사로서, 달마스님과 연대가 그리 떨어지지 않은 때에 사셨습니다. 그런 조주스님이 달마스님이 신 한 짝 버리고 간 것에 대해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이 게송 하나만 보아도, 달마스님이 신 한 짝만 들고 간 것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그런 것이 아니며 반드시 대자유가 따릅니다. 보통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신비한 어떤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기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사주 사람들이 대성을 보듯 한다

 

서기 708년 당나라의 중종中宗 황제가 승가僧伽 대사를 국사國師로 모셨습니다. 대사의 속성은 하何씨인데, 어느 때는 몸을 크게도 나투고 어느 때는 작게도 나투고 또는 십일면 관세음보살十一面觀世音菩薩의 얼굴로도 나투고 하여 그 기이한 행동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스님께서 710년 3월 2일에 돌아가시자 중종이 장안 근처의 절에다 그 육신을 모셔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며 시체 썩는 냄새가 온 도성 안을 덮어서 사람들이 코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중종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신하들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대사가 본래 사주泗洲 보광왕사普光王寺에 많이 계셨는데 죽은 육신도 그리로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 라고 신하들이 황제께 아뢰었습니다.

 

그래서 중종은 향을 피우고 마음으로 축원하기를, “대사의 육신을 보광왕사로 모시겠습니다.” 하자, 잠깐 사이에 온 장안에 향기가 진동하였습니다.

그 해 오월 보광왕사에 탑을 세우고 대사의 육신을 모시니, 그뒤로 탑 위에 자주 나타나서 일반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탑에 와서 소원성취를 빌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탑 위에 모습을 나타내곤 하였는데, 그 얼굴이 웃음을 띄고 자비로우면 소원성취하고 찡그리면 소원성취하지 못하는 등 신기한 일이 많아서 세상에서 부르기를 사주대성泗洲大聖이라 하였습니다.

 

사진 3. 사주대성좌상泗州大聖坐像. 상해박물관 소장. 

 

또 779년 7월에는 궁중에 나타나서 그때에 천자로 있던 대종代宗에게 법문을 하였습니다. 이 일로 대종이 크게 감격하여 그 화상畵像을 그려 궁중에 모셔 놓고 항상 예배하였습니다.

822년에는 큰 화재가 나서 대사의 탑이 다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대사의 육신은 조금도 상함이 없고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869년, 나라 안에 큰 난리가 났을 때에 도적들이 사주泗洲로 쳐들어오다가 대사가 탑 위에 

몸을 나타내자 놀라서 다 물러갔습니다. 당시 의종懿宗 황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증성대사證聖大師라는 호를 올렸습니다.

1119년 당나라의 서울에 대홍수가 났을 때였습니다. 대사가 또 궁중에 나타나므로 천자인 휘종徽宗 황제가 향을 꽂고 예배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사가 육환장을 흔들며 성城 위로 올라가니, 성안의 온 백성들이 다 보고 기꺼워하는 가운데 큰물이 곧 빠져 버렸습니다.

 

이상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을 몇 가지 보기를 든 것일 뿐으로, 그밖에도 기이한 사적事蹟은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듯이 승가 대사가 사후에 보광왕사의 탑 위에 그 모습을 자주 나타낸 사실은 그 근방 사람들이 다 보게 됨으로써 천하가 잘 아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실이 확실하여 의심할 수 없는 것을 가리켜 ‘사주 사람들이 대성을 보듯 한다[泗洲人見大聖]’는 관용구까지 생겨나게 된 것은 세상이 다 잘 아는 바입니다.

 

보화普化스님의 법력

 

보화普化스님은 반산보적盤山寶積 선사의 제자로 항상 미친 사람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교화하였습니다. 그 당시 그런 기행을 하는 스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오직 임제臨濟스님만이 심중을 알고 흉허물 없이 잘 지냈습니다.

 

하루는 진주鎭州의 저자거리에 나와서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나에게 장삼 한 벌을 해달라.” 하며 졸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화스님에게 장삼을 지어 드렸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이것은 내가 입을 옷이 아니다.” 하며 받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더욱 이상히 여기며 미친 중이라고 수군댔습니다. 

 

어느 날 임제스님이 그 소문을 듣고는 장삼 대신에 관棺을 하나 보내니, 보화스님이 웃으며 “임제가 내 마음을 안다.” 하고는 그 관을 짊어지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일 동문 밖에서 떠나겠다.” 고 하였습니다. 

 

다음 날 동문 밖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보화스님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오늘 여기서 죽지 않겠다. 내일 서문 밖에서 죽겠다.” 고 하며 관을 메고 떠나 버리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욕을 하고는 흩어졌습니다. 

 

다음 날 서문 밖에 또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나 보화스님은 “오늘 여기서 죽지 않고 내일 남문 밖에서 죽겠다.” 고 하며 또 관을 메고 떠나 버리니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하였습니다. 다음 날 남문 밖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는데, 보화스님은 “오늘 여기서 죽지 않고 내일 북문 밖에서 죽겠다.” 고 하며 또 관을 메고 떠나 버리니, 비록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미친 중이 거짓말만 하여 사람을 속인다고 삿대질을 하며 분위기가 살벌하였습니다. 

 

다음 날 북문 밖에는 과연 보화스님이 관을 메고 나타났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화스님이 관 위에 묵묵히 앉아 있는데 마침 한 길손이 지나가므로 그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이 관 안에 들어가 눕거든 관 뚜껑을 닫고 못질을 해달라.” 고 하고는, 그 관 속에 들어가 누우며 관 뚜껑을 닫으므로 그 길손이 못질을 하고 떠나갔습니다. 길손이 성중에 들어가 그 이야기를 하니 진주성 사람들이 놀라며 북문 밖으로 보화스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가서 못질한 관 뚜껑을 열고 보니 그 속에 있어야 할 보화스님은 온 데 간 데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때 마침 공중에서 은은히 요령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그 요령 소리가 나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수없이 절을 하며 보화스님의 법력을 알아보지 못한 데에 대해 통탄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보화스님이 보인 전신탈거全身脫去의 이적입니다. 이 사실은 선종 어록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임제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 『영원한 자유』(2014), ‘제5편 영원한 자유인’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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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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