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 이야기]
위앙종의 선사상 1
페이지 정보
김진무 / 2022 년 10 월 [통권 제114호] / / 작성일22-10-05 13:23 / 조회6,925회 / 댓글0건본문
돈황본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실린 동토 제일조第一祖 달마達摩의 게송은 “내가 본래 동토에 온 것은 가르침을 전하여 미혹된 중생을 구함이니, 하나의 꽃에 다섯 잎이 피어나고, 열매가 자연히 맺게 된다.”(주1)라고 되어 있다. 실제로 이 구절과 같이 후대에 『단경』으로부터 시작된 조사선祖師禪은 ‘오가五家’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조사선 ‘오가五家’의 출현
예컨대 지반志磐이 찬술한 『불조통기佛祖統紀』에서 “육조 이후 두 파를 이루었는데, 하나는 청원행사이고, 행사는 석두희천에게 전하였으며, 그 문하에 조동曹洞·운문雲門·법안法眼을 이루었다. 다른 하나는 남악회양으로 회양은 마조에게 전하였고, 그 문하에 임제臨濟·위앙潙仰을
이루었다. 이렇게 오가종파五家宗派가 되었으나 도道는 하나일 뿐이다.”(주2)라고 기록하는 바와 같다. 따라서 이른바 ‘일화개오엽一花開五葉’은 혜능의 문하에서 남악계의 임제·위앙종, 청원계의 조동·운문·법안종의 ‘오가’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일화개오엽’의 구절은 『단경』 이외에 모두 송대 이후의 문헌에서 사용되고 있으니, 아마도 선종 ‘오가’가 성립되고 난 후에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하겠다. 흔히 ‘종宗’이 성립하는 조건을 종조宗祖, 독자적인 사상, 그리고 그를 따르는 문도門徒의 세 가지로 논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오가종파’라고 칭한다는 점으로부터 ‘독자적 사상’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지반이 “도道는 하나일 뿐”이라고 말은 했지만, 분명히 ‘따로 종으로 삼을 만한[別爲一宗]’ 종조와 독자적 사상, 그리고 문도들이 존재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오가’는 오대五代 시기에 마지막으로 성립한 법안종의 문익文益이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을 찬술하여 각 종파의 사상적 특징을 논하고 있다. 따라서 오대 시기에 이미 ‘오가’에 대한 명확한 차별적 인식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송대宋代에 이르면 『인천안목人天眼目』, 『오가참상요로문五家參詳要路門』, 『오가종지찬요五家宗旨纂要』 등과 같은 ‘오가’의 종풍宗風과 법계法系, 제접법提接法 등을 집중적으로 비교하는 저술들이 출현하게 된다. 예컨대 『종문십규론』에서는 “조동은 고창敲唱으로 용用을 삼고, 임제는 호환互換으로 기機를 삼고, 소양韶陽(雲門)은 함개절류函蓋截流하고, 위앙은 방원묵계方圓默契한다.”(주3)라고 오가의 종풍을 규정하고 있다.
또 원대元代 천여유칙天如惟則의 『천여유칙선사어록天如惟則禪師語錄』에 실린 “「종승요의宗乘要義」”에서는 “임제는 통쾌하며, 위앙은 근엄하고, 조동은 세밀하고, 법안은 상세하여 분명하고, 운문은 고상하여 옛 풍취가 있다.”(주4)라고 평가하는 것과 같다. 그에 따라 조사선의 오가종파에 대하여 그 법계와 종풍, 그리고 독자적인 사상과 후대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하여 각각 몇 차례에 걸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위앙종의 창립자, 위산영우
오가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한 조사선의 종파는 바로 위앙종潙仰宗이다. 위앙종은 위산영우潙山靈祐가 창립하고 앙산혜적仰山慧寂이 계승하였으므로 ‘위앙’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고, 만당晩唐 시기에 출현하여 종풍을 선양하였지만 송대 이후로는 점차 쇠락하였으니, 대체로 150여 년 동안 성행하였다고 하겠다.
위앙종을 창립한 영우(771∼853)는 백장百丈의 제자이다. 그의 전기는 『조당집祖堂集』,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과 『송고승전宋高僧傳』 등에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영우의 속성은 조趙이고, 복주福州 장계長溪(현 복건성福建省 하포현霞浦縣) 출신이다. 15세에 본향의 건선사建善寺에서 법상율사法常律師에게 출가하였고, 3년 후 항주杭州 용흥사龍興寺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이후 절강浙江 천태산天台山으로 가서 유명한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을 만났는데, 그들이 백장을 참알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영우는 23세에 백장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백장은 한 번 보자마자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영우가 깨달음을 얻은 기연에 대해서 『경덕전등록』에서는 백장이 화로 속에 불씨를 찾으라고 해서 뒤졌지만 찾지 못하여 “없습니다.”라고 하자 백장이 화로를 뒤져 조그마한 불씨를 찾아내어 “이것이 불씨가 아닌가?”라는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주5)
이후 백장의 명으로 호남湖南 대위산大潙山(현 호남성湖南省 영향현寧鄕縣)으로 가게 되었는데, 『경덕전등록』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를 싣고 있다.
사마두타司馬頭陀라는 승려가 호남으로부터 와서 백장에게 대위산이라는 명산이 있는데 1,500명이 주석할 수 있는 커다란 도량을 세울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 백장이 자신이 가면 안
되겠는가를 묻자 두타는 백장의 인연처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에 백장은 문인 가운데 보낼 만한 사람을 선발하라고 하자 두타는 영우를 선택하였다.
그러자 백장은 밤중에 영우를 불러 “나와 교화의 인연은 여기까지이다. 위산은 뛰어난 경계이니, 마땅히 네가 그곳에 머물면서 나의 종지를 계승하여 후학들을 널리 제도하라.”라고 부촉하였다. 그러자 제일좌第一座인 화림華林이 그를 듣고는 “제가 상수上首인데, 어찌 영우가 주지住持를 합니까?”라고 항의했다. 백장은 “만약 대중에게 격을 벗어난[出格] 말 한마디를 내린다면, 마땅히 주지를 시킬 것이다.”라고 하면서 정병淨甁을 가리키면서, “정병이라고 할 수 없으니, 너는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라고 하였다. 화림은 “말뚝이라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라고 답하자 백장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영우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자 영우는 바로 발로 차 정병을 넘어뜨렸다. 백장은 “제일좌가 도리어 산을 뺏겼구나.”라고 하였고, 영우를 위산으로 보냈다.(주6)
여기에 보이는 문답을 분석한다면, 다양한 선사상을 논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화림의 패인은 ‘출격의 말 한마디’를 단지 명칭을 바꾼 것으로 대응하였기 때문이다.
위산에 동경사 창립
백장의 명에 따라 영우는 대위산으로 가서 교화를 하자 사람들이 몰려와 사찰을 건립하였는데, 연수連帥(‘연連’은 10국을 의미하고, ‘연수連帥’는 10개 지방을 통솔하는 대장군을 뜻함)인 이경양李景讓이 황제에게 상주하여 ‘동경사同慶寺’의 명칭을 하사받았으며, 당시 상국相國인 배휴裴休가 영우를 참알하여 담론하였고, 이로부터 영우의 이름이 천하에 떨치게 되어 세상에서는 ‘위산영우潙山靈祐’라고 칭하게 되었다.
후에 회창법난會昌法難이 발생하자 영우는 동경사를 떠나 피했다가 선종宣宗이 법난을 해금하자 당시 호남관찰사로 있던 배휴가 숨어지내는 영우를 찾아가 “진실로 맞기를 청하여 나가니, 가마에 타게 하여 친히 그 문도들과 함께 도열하였다.”(주7)라고 한다. 영우가 다시 동경사로 돌아오자 그의 제자들도 다시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송고승전』에는 당시의 재상인 최신유崔愼由가 동경사로 돌아온 영우를 지극한 예의로써 받들었다고 한다.(주8)
영우는 어느 날 상당上堂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노승이 백 년 후에 산 밑에서 한 마리 물소[水牯牛]가 되어 왼쪽 겨드랑이 밑에다 ‘위산승모갑潙山僧某甲(위산의 승려인 아무개)’라고 다섯 자를 쓸 것이다. 이때 위산의 승려라 부르면, 또 물소이고, 물소라고 부르면, 또 위산의 승려라고 할 것인데, 무엇이라고 불러야 맞겠는가?”(주9)
이 구절은 후대에 다양하게 인용되는 구절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뒤로 미루겠지만, 이후 영우는 대중大中 7년(853년) 정월正月 9일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나서 편안히 앉아 태연히 열반에 드니, 세수가 83세이고 법랍은 64세였으며, ‘대원선사大圓禪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영우는 40여 년 동안을 가르침을 펼쳤는데, 법을 얻은 이들은 수없이 많았으며, 입실入室한 제자가 41인이었다고 한다. 『경덕전등록』에는 사법 제자로 43명을 거명하고 있고, 『조당집』에는 5명, 『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13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제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제자는 바로 앙산혜적仰山慧寂이고, 또한 향엄지한香嚴智閑이다. 그 가운데 지한은 본래 백장의 제자로서 영우와는 동문 사형제이다. 지한은 백장으로부터 총명하다고 인정받았지만, 깨닫지 못하여 백장이 입적하자 영우에게 와서 법을 배웠기 때문에 영우의 제자로 인정되었다.
위앙종의 법계와 선사상, 그리고 종풍 등을 논함에 있어서 위산영우, 앙산혜적, 향엄지한의 세 선사는 상당히 중요하다. 특히 지한과 혜적 사이의 문답 가운데 이른바 ‘조사선’과 ‘여래선’의 구분이 출현하고 있으니, ‘오가’ 가운데 최초로 출현한 위앙종의 사상적 의의는 상당히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에 따라 이를 이어서 앙산혜적과 향엄지한의 행적을 고찰한 후에 위앙종의 사상과 종풍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각주>
1)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44a), “吾本來東土, 傳敎救迷情. 一花開五葉, 結果自然成.”
2) [宋]志磐撰, 『佛祖統紀』 卷29(大正藏49, 292b), “六祖之後爲二派. 一曰靑原思. 思傳石頭遷, 其下爲曹洞 雲門 法眼. 一曰南岳讓. 讓傳馬祖, 其下爲臨濟 潙仰. 是爲五家宗派, 道一而已.”
3) [唐]文益撰, 『宗門十規論』(卍續藏63, 37c), “曹洞則敲唱爲用, 臨濟則互換爲機, 韶陽則函蓋截流, 潙仰則方圓默契.”
4) 善遇編, 『天如惟則禪師語錄』 卷9, ‘宗乘要義’(卍續藏70, 833c) “臨濟痛快, 潙仰謹嚴, 曹洞細密, 法眼詳明, 而雲門高古也.”
5) [宋]道原纂, 『景德傳燈錄』 卷9(大正藏51, 264b), “百丈云: 汝撥鑪中有火否? 師撥云: 無火. 百丈躬起深撥得少火, 擧以示之云: 此不是火? 師發悟禮謝陳其所解.”
6) 앞의 책(大正藏51, 264c), “百丈是夜召師入室, 囑云: 吾化緣在此. 潙山勝境汝當居之嗣續吾宗廣度後學. 時華林聞之曰: 某甲忝居上首, 祐公何得住持? 百丈云: 若能對衆下得一語出格當與住持. 卽指淨甁問云: 不得喚作淨甁, 汝喚作什麽? 華林云: 不可喚作木也. 百丈不肯, 乃問師, 師蹋倒淨甁. 百丈笑云: 第一坐輸却山子也. 遂遣師往潙山.”
7) [元]念常, 『佛祖歷代通載』 卷16(大正藏49, 640c), “固請迎而出之, 乘之以已輿, 親爲其徒列.”
8) [宋]贊寧等撰, 『宋高僧傳』 卷11(大正藏50, 777c), “又遇相國崔公愼由, 崇重加禮.”
9) [宋]道原纂, 『景德傳燈錄』 卷9(大正藏51, 265c), “老僧百年後向山下作一頭水牯牛, 左脅書五字云: 潙山僧某甲. 此時喚作潙山僧, 又是水牯牛, 喚作水牯牛, 又云潙山僧, 喚作什麽卽得?”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옛거울古鏡’, 본래면목 그대로
유난히 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불면석佛面石 옆 단풍나무 잎새도 어느새 불그스레 물이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포행을 마치고 들어오니 책상 위에 2024년 10월호 『고경』(통권 …
원택스님 /
-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 속에 있다네
어렸을 때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시절에 화장실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거든요. 무덤 옆으로 지나갈 때는 대낮이라도 무서웠습니다. 산속에 있는 무덤 옆으로야 좀체 지나…
서종택 /
-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없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
성철스님 /
-
구루 린뽀체를 따라서 삼예사원으로
공땅라모를 넘어 설역고원雪域高原 강짼으로 현재 네팔과 티베트 땅을 가르는 고개 중에 ‘공땅라모(Gongtang Lamo, 孔唐拉姆)’라는 아주 높은 고개가 있다. ‘공땅’은 지명이니 ‘공땅…
김규현 /
-
법등을 활용하여 자등을 밝힌다
1. 『대승기신론』의 네 가지 믿음 [질문]스님, 제가 얼마 전 어느 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글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이렇게 여쭙니다. 그 스님께서 법문하신 내용 중에 일심一心, 이문二…
일행스님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