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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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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2 년 10 월 [통권 제114호]  /     /  작성일22-10-05 13:53  /   조회2,27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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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至道無難]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唯嫌揀擇]

지극한 도道란 곧 무상대도無上大

 

道를 말합니다. 이 무상대도는 전혀 어려운 것이 없으므로 오직 간택揀擇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간택이란 취하고 버리는 것을 말함이니,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으면 지극한 도는 양변兩邊, 즉 변견邊見에 떨어져 마침내 중도의 바른 견해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간법世間法은 버리고 불법佛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니며, 마구니[魔軍]를 버리고 불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취하거나 버릴 것 같으면 실제로 무상대도에 계합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으로 불법을 바로 알고, 무상대도를 바로 깨치려면 간택하는 마음부터 먼저 버리라 한 것입니다.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但莫憎愛]

통연히 명백하니라[洞然明白]

 

미워하고 사랑하는 이 두 가지 마음만 없으면 무상대도는 툭 트여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는 좋아하고 마구니는 미워하며, 불법을 좋아하고 세간법은 미워하는 증애심憎愛心만 버리면 지극한 도는 분명하고 또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간택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즉 증애심입니다. 이 증애심만 완전히 버린다면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사진1. 중국 삼조사 삼조동三祖洞에 모셔진 삼조승찬 선사. 

 

이상의 네 구절이 바로 『신심명』의 근본 골자입니다.

임제 정맥으로서 낭야각瑯耶覺 선사라는 큰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에게 어느 재상이 편지로 “『신심명』은 불교의 근본 골자로서 지극한 보배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 자세한 주해註解를 내려 주십시오” 하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낭야각 선사가 답하기를 ‘至道無難이요 唯嫌揀擇이니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이라’ 하는 첫 구절만 큼지막하게 쓰고, 그 나머지 뒷 구절들은 모두 조그맣게 써서 주해로 붙여 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뜻이 무엇일까요? 『신심명』의 근본 골수는 크게 쓴 구절 속에 다 있으므로 이 구절의 뜻만 바로 알면 나머지 구절들은 모두 이 구절의 주해일 뿐, 같은 뜻이라는 말입니다. 낭야각 선사가 앞 네 구절만 크게 쓰고 뒷 구절은 주해로 써서 답장한 이것은 『신심명』에 대한 천고의 명 주해로서, 참으로 걸작이라는 평을 듣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신심명』을 바로 알려면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증애심만 떠나면 중도정각中道正覺입니다. 대주스님은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文』에서 “증애심이 없으면 두 성품이 공하여 자연히 해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첫 네 구절이 『신심명』의 핵심이고 뒷 구절들은 더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낭야각 선사의 말씀처럼 뒷 구절들은 주해의 뜻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毫釐有差]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天地懸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취하고 버리는 마음과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버리라.”고 하니, “아 그렇구나, 천하에 쉽구나!”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이 뜻을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처럼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아주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진2. 성철스님의 『신심명 증도가 강설』 표지. 

 

쉽다는 것은 간택심揀擇心과 증애심憎愛心만 버린다면 중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성불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며,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지만, “이 간택심을 버린다, 증애심을 버린다.”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뜻에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벌어진다고 하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欲得現前]

따름과 거스름을 두지 말라[莫存順逆]

 

“무상대도를 깨치려면 따름[順]과 거스름[逆]을 버리라.” 한 것입니다. ‘따름’과 ‘거스름’은 상대법으로서, 따른다 함은 좋아한다는 것이고, 거스른다 함은 싫어한다는 것이니, 이는 표현은 다르나 ‘싫어하고 좋아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는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데, 지극한 도를 얻으려면 따름과 거스름의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긋남과 따름이 서로 다툼은[違順相爭]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是爲心病]

 

어긋난다, 맞는다 하며 서로 싸운다면, 이것이 갈등이 되고 모순이 되어 마음의 병이 된다는 말입니다.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不識玄旨]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徒勞念靜]

 

“참으로 양변을 여읜 중도의 지극한 도를 모르고 애써 마음만 고요히 하고자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대도를 성취하려면 누구든지 가만히 앉아서 고요히 생각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대도大道라는 것은 간택심揀擇心·증애심憎愛心·순역심順逆心을 버리면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마음을 억지로 고요하게 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분주하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안 된다고 하니 그러면 분주하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혹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움직임과 고요함 이 두 가지가 다 병으로서 움직임이 병이라면 고요함도 병이고, 어긋남이 병이라면 맞음도 병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상대적인 변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대를 버려야 대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圓同太虛]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無欠無餘]

 

“지극한 도는 참으로 원융하고 장애가 없어서,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즉 융통자재하여 아무런 걸림이 없음을 큰 허공에 비유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조금도 모자라거나 남음도 없습니다. 지극한 도란 누가 조금이라도 더 보탤 수 없고 덜어낼 수도 없어 모두가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바로 깨칠 뿐 증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극한 도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良由取捨]

그 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所以不如]

 

“지극한 도는 취하려 하고, 변견은 버리려 하는 마음이 큰 병이다.”는 것입니다. 대중들이 변견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나도 할 수 없어서 중도를 많이 얘기하지만, 그 말을 듣고 중도를 취하려 하고 변견을 버리려 하면 이것이 큰 병이라는 뜻입니다. 혹 변견은 취하고 중도를 버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병은 마찬가지로서 무엇이든지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큰 병입니다. 

 

사진3. 즉석카메라를 만져 보고 계신 성철스님. 

 

대도에는 모든 것이 원만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라고 남는 것이 없지만, 우리가 근본진리를 깨치지 못한 것은 취하고 버리는 마음, 즉 취사심取捨心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중생을 버리고 부처가 되려는 것도 취사심이며, 불법을 버리고 세속법을 취하려는 것도 취사심으로서 모든 취하고 버리는 것은 다 병입니다. 때문에 “취사심으로 말미암아 여여한 자성을 깨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여여한 자성’이란 무상대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취사심을 버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莫逐有緣]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勿住空忍]

 

‘있음의 인연[有緣]’이란 세간법과 같은 말로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세상일이라는 뜻입니다. 공의 지혜[空忍]란 곧 출세간법이라는 뜻입니다. 인연이 있는 세상일도 좇아가지 말고 출세간법에도 머물지 말라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 병이기 때문입니다. 있음[有]에 머물면 이것도 병이고, 반대로 공함에 머물면 이것도 역시 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있음을 버리고 공함을 취하거나, 공함을 버리고 있음을 취한다면 이것이 취사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우리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세간의 인연도 버리고 출세간법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一種平懷]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泯然自盡]

 

‘일종一種’이란 중도를 억지로 가리킨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고 양변을 떠나면 바로 중도中道가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일종一種이란 중도를 가리키므로 일체 만법이 여기에서 다해 버렸으며, 동시에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절로 다한다’고 했다 해서, 무엇이 영영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다한다’는 것은 일체 변견이, 일체 허망[妄]이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항하사恒河沙 같은 진여묘용이 현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 인연을 좇지도 않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않으면 중도가 현전하여 일체 변견이 다하고 항사묘용恒沙妙用이 원만구족하게 됩니다. - 성철스님의 『신심명 증도가 강설』(2001)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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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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