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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한국불교미술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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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2 년 12 월 [통권 제116호]  /     /  작성일22-12-05 10:48  /   조회1,55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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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24 | 나카기리 이사오中吉功

 

나카기리 이사오中吉功는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해방 후에는 도쿄에서 박물관 등에 오래 근무하며 한국 불교미술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1908년 일본 오카야마현에서 태어났고, 1928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미학미술사연구실에서 일하면서 불교미술의 매혹적인 세계에 첫걸음을 내딛었다.  

 

한국 불교미술과 연을 맺다

 

이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유물, 유적과 문화재에 대한 실전 감각을 높일 수 있었다. 1945년 이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도쿄 예술대학의 예술자료관에 재직했다. 그는 환갑이 넘은 나이부터 한국 미술과 관련된 다수의 저술과 편저를 냈는데, 『신라·고려의 불상』(1971), 『해동의 불교』(1973), 『조선 미술에의 길: 수상』(1979), 『한국 조계선으로의 초대』(1983), 『조선 회고록』(1985), 그리고 77세 희수 기념논집으로 나온 『조선의 고문화 논찬』(1987) 등이 있다. 

 

사진 1. 1933년 경성제대 교정에서 고유섭과 함께. (왼쪽에서 네 번째가 고유섭의 스승 우에노 나오테루 교수, 왼쪽에서 다섯 번째 고유섭, 맨 오른쪽이 나카기리 이사오). 사진 인천일보. 

 

나카기리는 한국 미술사학의 길을 개척한 고유섭(1905~1944)과의 깊은 인연을 바탕으로 그에 대한 회고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고유섭은 경성제대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1930년 4월부터 1933년 3월까지 경성제대 미학미술사연구실의 조수로 있었는데, 이때 두 사람은 연구실의 동료였던 셈이다. 고유섭은 이후 개성박물관장이 되었지만 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긴 나카기리와의 교류는 계속되었다. 사후 20주년이 된 1964년에 고유섭의 제자이자 동국대 교수였던 황수영의 의뢰를 받고 쓴 「고유섭씨의 추억」이라는 글에서 나카기리는 그에 대한 기억과 관련된 일화를 다음과 같이 떠올리고 있다.  

 

사진 2. 『신라·고려의 불상』 표지. 

 

“내가 고유섭 씨를 알게 된 것은 경성제대 법문학부 미학미술사연구실에 처음으로 근무를 시작한 1928년 4월의 일이었다. 그는 당시 미학전공의 2학년 학생이었는데 조용하고 온화한 사람이었고 대인의 풍격이 몸에 배어 있었다. 친분을 가지면서 점점 그의 그윽하고 고상한 사람됨에 매혹되었고 흉금을 터놓는 사이가 되면서 형제와 같은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다. … 그는 (콘라트) 피들러의 미학사상에 관한 학위논문을 썼는데 정말로 달필인 원고에 놀랐고 조리가 통하는 논고에 감동했다.

당시 일본에서도 그랬지만 조선에서 미학전공으로 취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것을 이미 각오하고 전공을 택한 것이라 여겨진다. 

 

졸업 후 다행히도 그가 미학연구실의 조수가 되어서 나 또한 안심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3년간 함께 연구실 생활을 하면서 많은 추억이 남아 있는데, 그의 학문적 관심은 미학에서 구체적 미술사 연구로 옮겨갔다. 미학연구실의 우에노 선생과 다나카 선생은 그를 각별하게 아꼈는데, 평소 매우 성실히 연구에 임하였다. 그는 「조선의 전탑에 대하여」(1935), 「불국사의 사리탑」(1943) 등의 많은 논문을 쓰면서 당시까지 없던 문헌적· 예술사적 접근을 통해 독자적 연구를 이어갔다. 만일 고유섭 씨가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역대 서화가의 사적과 평전을 수록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같은 ‘조선 화인전畵人傳 집성’이라 불릴 수 있는 명저가 몇 권 간행될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유감이다.”  

 

사진 3. 1929년 경성제대 연구실에서 고유섭과 함께(왼쪽부터 고유섭, 다나카 도요조 교수, 나카기리이사오, 우에노 나오테루 교수). 사진 인천일보. 

 

나카기리는 한국에 있던 일본인 학자들과도 교류를 이어갔는데, 한국의 고전문헌을 연구하는 일본인 학자들의 모임인 서물동호회의 회원으로 1937년 창설 당시부터 활동했다. 또 한국불교 연구자였던 에다 도시오(1898~1957)와도 친분을 쌓았다. 에다는 동국대의 전신인 불교전수학교와 중앙불교전문학교, 혜화전문학교의 교수를 역임하고 조선시대 불교 서적의 간행 및 유통 문제 등 한국불교 관련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나카기리는 이후 에다의 유작인 『조선불교사의 연구』(1977)에 후기를 썼다. 이 책의 서문은 중앙불전 제1기 졸업생이자 경성제대를 나온 조명기 전 동국대 총장이 작성했다.

 

『해동의 불교』와 『한국 조계선으로의 초대』

 

나카기리의 역주서이자 편저인 『해동의 불교』는 3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 해동의 불교, 

2부 해동 불교미술 도휘, 3부 해동불교 연계, 그리고 부록으로 되어 있다. 1부 해동의 불교

는 한국불교사학의 권위자 권상로(1879~1965)의 저술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단 것이다. 이는 1편 삼국시대 12장(불교의 수입-신라의 삼보), 2편 고려시대 23장(도선과 고려–불교 쇠퇴의 조짐과 붕괴), 3편 조선시대 20장(이태조와 불교–사찰령 이후)으로 되어 있다. 

 

사진 4. 『해동의 불교』 표지. 

 

2부 해동 불교미술 도휘는 연경 7년명 금동여래입상부터 지리산 화엄사 삼문까지 모두 302항목에 걸쳐 불보살상, 불화, 탑과 등, 종과 비석, 전각, 기와, 장엄구 등 한국 불교미술의 전반을 다루었다. 항목별로 사진과 함께 시기, 크기, 양식, 소장처 등 구체적 설명을 달았고, 뒤에는 송광사 유물 등을 보유편으로 수록했다. 여기에는 나카기리가 40년간 수집한 한국 불교미술 사진이 활용되었는데, 해방 후에 새로 발견된 미술품의 사진은 황수영, 정영호 교수에게 얻었고 그에 대한 해설도 의뢰했다.

 

3부 해동불교 연계는 한국불교사 연표로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고려사』 등의 역사서, 『해동고승전』, 『조당집』, 『불조통기』 등 고승전과 전등사서, 『동국여지승람』, 『조선금석총람』 등의 각종 문헌자료와 다양한 연구 논저를 근거로 작성했다. 372년 고구려의 불교 전래부터 1914년 각황사 개축과 불사리 봉안까지 약 1,540여 년의 불교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각 사건에는 서력, 한국 역대 왕력, 간지, 개요, 중국과 일본 역대 왕력이 적혀 있다. 마지막 부록은 해동 사찰 일람표(1935년 기준), 불조 약계, 조선 역대 약계가 수록되었다. 각각 31 본사와 소속 말사, 인도-중국-한국으로 이어지는 선종 조사 법맥, 삼국과 가야, 고려, 조선의 왕명과 재위 기간이 표에 담겨 있다. 

 

이 책의 서문(1972)은 당시 국립박물관장이던 황수영이 썼는데, 그는 “한국 불교사 연구는 20세기에 들어 시작되어 처음에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가 간행되었지만 전부 한문으로 쓰인 자료집성집이었다. 이후 보다 간결한 저작이 요구되었는데, 권상로의 『조선불교사고』가 나왔지만 대학 강의안으로 적은 부수만 등사되었기에 일반에는 보급되지 못했다. 평생에 걸친 연찬의 결과물인 이 책을 그와 인연이 깊은 나카기리 아사오 씨가 일본어로 역주를 했다니 마음속으로 기쁘다. 나카기리 씨는 한국과 오랜 인연을 맺었고 일본에서 한국 미술사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져 왔는데, 그의 연구에는 불교사에 대한 깊은 조예가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 5. 『한국 조계선으로의 초대』의 표지. 

 

나카기리는 책 뒷부분의 후기에서 “1933년 무렵 경성대학 법문학부 3층 미술연구실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아래층 방에 조선문학연구실이 있었다. 조수인 장지태 씨로부터 등사판 책 일부를 빌린 것을 계기로 권상로 선생의 『이조실록불교초존』 20책을 다 구했는데 부록에 불교전문학교의 강의안인 『조선불교사고』 1책이 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 십몇 년 전에 해독을 하던 중에 한일 예비회담의 전문위원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온 황수영 교수를 만나 오역 등 번역 내용의 정정을 부탁했다. 당시 그를 통해 권상로 선생의 이해를 구했고, 1962년 미술잡지인 『동양의 미』에 8회에 걸쳐 삼국시대 부분을 연재했다. 그리고 작년 3월 도쿄 예술대학을 정년퇴직하고 여유가 생겨서 『조선불교사고』를 ‘해동의 불교’로 개명하여 책의 제1부에 수록했다. 한국 불교학 연구의 필수 지침서로는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다카하시 도루의 『이조불교』, 누카리야 가이텐의 『조선선교사』가 있다. 권상로 선생의 『조선불교사고』는 간결하게 핵심을 담은 저작이지만 일반에 알려지지 않아서 아쉬웠다. 한국 불교학계의 권위자인 선생의 노작을 한 사람이라도 많은 일본의 지식인에게 소개하고 싶어서 역주하여 간행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한편 『한국 조계선으로의 초대』는 보조지눌(1158~1210)의 게송과 저작을 인용하여 조계선의 진수를 드러낸 것으로 불일국제선원의 창설자인 송광사 구산수연(1910~1983)이 한국 선종의 대의를 평이하게 서술한 것이다. 책의 구성은 제1편 피안으로의 길, 제2편 7개의 바라밀다 정도正道, 제3편 정식의 불법으로 되어 있고, 송광사 소장 석가삼존불감상에 대한 나카기리의 논문과 보조국사 비문 등 송광사 관계 문헌자료가 그 뒤에 수록되어 있다.  

 

사진 6. 『한국 조계선으로의 초대』에 수록된 송광사 산문. 

 

나카기리는 책의 권두사(1983)에서 “1976년 2월 서울에 있을 때 전라남도 조계산 송광사에 가서 방장인 구산스님을 뵈었는데 영문으로 된 Nine Mountains라는 책을 받았다. 이는 보조국사의 게송에 의거하여 보조선의 특질을 설명한 것이었다. 보조국사는 송광사 중흥의 조사로서 6조 혜능의 선을 계승하면서도 독특한 사상을 전개하여 한국 선의 가풍을 세운 이었다. 

 

그 근간은 선교일원론이고 그에 기반한 정혜쌍수를 지도이념으로 하면서 돈오점수를 수증의 대강으로 삼았다. 송광사는 보조선의 정통성을 내세운 사찰이고 그 법등을 이은 이가 구산스님이다. 조치上智대학의 강덕희 교수가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해 주어서 이를 출판하게 되었다. 구산스님은 보조의 게송을 인용하면서 많은 비유를 들어 보조선의 진수를 드러냈고 자신의 직관에 의해 한국 선의 근본 뜻을 평이하게 설명했다.”라고 하여 책의 발간 경위와 내용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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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서울대 국사학과 문학박사 학위 취득(2008). 저서로 『韓國佛敎史』(2017, 東京:春秋社), 『토픽 한국사12』(2016, 여문책),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임제 법통과 교학전통』(2010, 신구문화사) 등이 있고,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및 한문불전 번역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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