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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불교]
우리는 어떤 세계에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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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  2022 년 12 월 [통권 제116호]  /     /  작성일22-12-05 11:11  /   조회1,84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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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학에서 증명이란 없다 

 

물리학을 포함한 자연과학은 자연현상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경험과학이다. 관측이나 측정을 통해 얻는 대상에 대한 경험증거(empirical evidence)는 경험과학의 활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경험증거는 경험과학의 이론체계가 현상을 설명함에 적절한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확인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주1)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이를 확증(確證, confirmation)이라고 했다. 왜 증명(proof)이 아니라 확증이라고 해야 하는가? 

 

사진 1. 칼 포퍼(Karl Raimund Popper, 1902〜1994). 

 

우리는 증명을 통해 어떤 언명(言明, statement)이 참(true)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경험과학이 아닌 수학이나 논리학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경험과학에서는 증명이라는 과정이 있을 수 없다. 수만 마리의 까마귀가 검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더라도 흰 까마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증거가 모두 어떤 과학이론을 지지했다 하더라도 그 이론을 반박하는 경험증거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험과학의 영역에서 어떤 이론을 참이라고 증명할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이론 체계의 한계

 

과학이론은 관측 사실이나 경험적 사실 등의 경험증거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체계다. 과학이론의 가치는 경험증거를 얼마나 제대로 설명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과정에서 과학이론의 예측이 경험증거와 일치한다면 이는 검증을 통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 이론이 참이라는 것은 아니다. 경험증거가 과학이론을 반박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이게 포퍼가 말하는 확증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참에 가까운 과학이론은 있겠지만 완벽하게 참인 과학이론은 없다. 검증을 통과한 과학이론, 아직 반박되지 않은 과학이론이 있을 뿐이다. 뉴턴역학이 좋은 예다. 뉴턴역학은 수많은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했지만 수성의 궤도운동을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이론체계 안에도 한 마리의 하얀 까마귀는 숨어 있었다. 과학이론이 지닌 어쩔 수 없는 한계일 것이다.

 

확증이 아니라 반박에서 도약한다

 

뉴턴역학이 등장했을 때의 상황을 확증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자. 뉴턴역학은 낙하운동과 조수간만에서부터 행성과 혜성의 천체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을 설명했다. 사람들은 이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실로 다양한 현상을 하나의 이론체계가 설명하는 것을 목격했다. 특히, 전혀 다른 세계라고 여겼던 천상과 지상의 운동을 하나의 이론체계로 설명하는 경이로운 체험을 했다. 다양한 경험증거를 설명하는 하나하나의 확증 과정은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사진 2. 뉴턴역학을담고있는아이작 뉴턴의『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초판. 1687년 라틴어로 출간된 이 책은 서양의 과학혁명을 집대성한 책으로 줄여서 ‘프린키피아(Principia)’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확증 사례가 축적되면서 확증이 주는 놀라움은 점차 감소한다. 확증이 거듭되면서 이론은 점차 일상적인 것이 되고 마침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그 시대 사람들이 공유하는 배경지식으로 자리 잡는다. 이론의 정당성을 당연시하면서 확증이 주는 과학적 의미는 사실상 거의 사라진다.

여기서부터는 이론체계가 설명하는 확증 사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론체계가 설명하지 못하거나 이론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가 중요하게 된다. 이는 수성의 궤도처럼 처음에는 무시했던 것일 수도 있고, 이전에 포착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증거가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변화는 과학이론이 완벽하게 참일 수 없다는 과학이론의 한계 때문에 발생한다. 과학이론이 완벽하게 참이라면 새로운 발전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완벽하게 참이 아니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전보다 참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새로운 과학이론이 필요할 것이다. 과학이론의 한계가 이론체계가 발전하게 되는 요인이다.

 

성공적인 과학이론이라면 보통 큰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수성의 원일점遠日點(aphelion)과 근일점近日點(perihelion)이 이동하는 문제는 어찌 보면 뉴턴역학의 전체 체계 안에서 사소하다거나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예외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등장했다.

 

예외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 예는 아주 많다. 몇몇 행성에서만 관측되는 외행성의 역행逆行을 설명하면서 태양중심설이 나왔고, 눈에 쉽게 띄지 않는 생명종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진화생물학이 제시됐으며, 이전에는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흑체복사나 광전효과를 설명하면서 양자역학이 나왔다. 어찌 보면 예외적일 수도 있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과학은 비약적 발전을 했다. 과학은 기존 이론에 대한 확증이 아니라 기존 이론에 대한 반박에서 도약한다.

 

북쪽을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북극에서 북쪽은 사라진다

 

과학이론의 세계를 잠시 접어두고, 휴대폰 없이 방향을 가늠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밤이라면 북극성을 찾아 북쪽이 어느 방향인지를 알 수 있다. 북극성을 향해 섰을 때, 우리 눈이 바라보는 지표면 방향이 진북(true north)이다. 우리 위치에서 북극성과 가장 가까운 지평선 위의 방향이다.

지구가 자전하므로 지상에서 보는 모든 천체는 하루에 한 바퀴씩 회전한다.  

 

사진 3. 북극. 사진 앤드류 C. 레킨. 

 

북반구에서 단 하나의 예외가 북극성이다. 북극성은 지구 자전축 위에 있으므로 지구가 자전해도 그 위치가 변하지 않는다.(주2) 북극성을 볼 수만 있다면 언제나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지구 자전축이 지표면과 만나는 북반구의 지점을 지리적 북극(geographic north pole) 혹은 진 북극(true north pole)이라고 한다. 진북은 지리적 북극으로 향하는 방향이며, 지구본에서는 경도선의 방향이기도 하다. 

 

이제 북극을 향해 간다고 하자. 우리가 적도 부근에서 출발한다면, 처음에는 북극성이 지평선 부근의 하늘에 있을 것이다. 북극으로 다가감에 따라 북극성의 고도는 점점 높아지게 된다. 마침내 북극에 도달하게 되면 북극성은 바로 머리 위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디가 북쪽인가? 북극성을 향해 선다는 게 불가능해진다. 북극성을 향한 지평선의 방향도 함께 사라진다. 북쪽이라는 방향이 사라진다. 북쪽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북쪽이 사라지면서 동서남북이 동시에 다 사라진다. 방향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방향 자체가 없어진 것이다.

 

예외적인 지점에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북극에서 북쪽이 사라지는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 있다. 우주적 관점에서는 지구가 아주 작은 천체지만 우리가 보기엔 지구도 꽤 크다. 넓은 지구 위에서 남극과 북극이라는 단 두 곳에서만 방향이 사라진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예외적일 뿐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보물은 아주 예외적인 지점에서 발견된다.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지점에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인상적인 예를 몇 가지 살펴보자.

 

갈라파고스 제도에 사는 핀치새가 지역에 따라 다르게 진화했음을 확인한 것은 진화생물학이 출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어느 곳의 어느 생물이라도 매 순간 진화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이뤄지는 이 변화를 감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한 지역에서 일어난 종의 분화를 관측하면서, 생명의 진화가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차리게 됐다. 이는 생물학은 물론 우리의 세계관까지 변화시킨 ‘진화’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사진 4. 갈라파고스 제도의 핀치새. 사진 연합뉴스.

 

우리는 모두 매 순간 변해 가는 무상無常한 존재지만 일상에서 이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병이나 죽음 등의 예외적인 상황에서나 무상을 감지한다. 그러나 무상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발생하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다. 우리 우주에서는 모든 존재가 연기緣起에 의해 나타나고 연기에 의해 사라지기 때문에, 무상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는 모두의 존재 양식이다. 오동잎이 떨어져야 가을이 왔음을 알고 매화가 펴야 봄이 왔음을 알지만 계절은 항상 변한다.

 

행성과 위성의 운동을 제외하면 지동설과 천동설의 설명력은 같다. 상대성이론에서 말하듯이 모든 운동이 상대적이므로 천구가 정지하고 지구가 회전하는 것은 지구가 정지하고 천구가 회전하는 것과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천동설과 지동설이 설명력의 차이를 보이는 결정적인 경우는 외행성外行星의 운동이다. 외행성은 그 많은 천체 중에서 단지 몇 개에 불과하다. 이 예외적인 상황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우주(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태양중심설(지동설)에 이르게 했다. 

 

무無 동서남북

 

우리 곁에 항상 같이 있는 북쪽이 북극에서는 왜 갑자기 사라지는가? 북쪽이 본래 있는 것이라면 북극에 갔다고 북쪽이 신기루처럼 갑자기 사라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북쪽이라는 것은 없어야 하는가?

 

지구본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런던과 서울에서의 진북은 그 방향이 상당히 다르다. 지구가 구형이므로 우리가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진북의 방향은 달라진다. 북쪽이라는 방향이 본래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북극과 런던, 북극과 서울 사이의 상호 연관만 있을 뿐, 북쪽이란 본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울은 동쪽도 아니고 서쪽도 아니지만, 인천에서 보면 동쪽이고 속초에서 보면 서쪽이다. 상호 관계만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에 서학이 들어오면서 지구라는 개념이 알려졌다. 당시 사람들은 이 무거운 지구가 어떻게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지 의아해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위-아래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아래란 지구 중력이 끌어당기는 방향이고, 위란 그 반대 방향이다. 브라질에서 아래 방향은 서울에서 위 방향이다. 지구 중력이 없는 우주 공간에서는 위-아래라는 방향 자체가 있을 수 없다. 지구가 아래로 추락하지 않는 게 아니라 지구가 추락할 아래라는 방향이 아예 없다. 아래가 없는데 어떻게 아래로 떨어지는가?

 

모든 생명이 진화하더라도 갈라파고스에 가지 않으면 이를 확인하기 어렵듯이, 어디에도 북쪽은 없지만 북극에 가지 않으면 북쪽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갈라파고스에서만 생명이 진화하는 게 아니듯이, 북극에서만 북쪽이 없는 게 아니다. 상호 연관의 연기로 인하여 동서남북과 상하가 항상 나타나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도 동서남북과 상하는 본래 없다. 

 

우리는 명색名色으로 이루어진 세간世間에서 산다

 

우리의 식識은 연기緣起로 나타나는 세계에 대해 이름과 형색을 부여한다. 이게 12연기緣起의 명색名色이다. 우리의 식은 동서남북과 상하가 본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서남북과 상하라는 명색을 만들어 낸다. 더럽거나 깨끗함이 본래 없어 불구부정不垢不淨인데도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명색을 만들어낸다. 동서남북과 상하, 아름다움과 추함, 깨끗함과 더러움 같은 모든 명색은 분별이다. 모두 우리의 분별하는 마음인 식이 만들어 낸 것이다.

 

12연기에 의하면, 무명無明에 의지하여 행行이 나타난다. 행行은 무언가를 조작하여 만들어 내려 한다. 이 행에 의지하여 식이 나타난다. 식이 행에 의지하므로, 식은 본래 없는 것을 조작하여 만들어 낸다. 이게 동서남북과 상하, 아름다움과 추함, 깨끗함과 더러움 같은 명색이다. 이렇게 행에 의지해 조작한 산물을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한다.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一切有爲法 일체의 유위법은 

如夢幻泡影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如露亦如電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應作如是觀 응당 이렇게 보아야 한다.

 

그럼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사는가? 이 유위법의 세계에 파묻혀 산다.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유위법을 참이라고 착각하면서 산다. 이 모든 게 행에 의지해 식이 조작해 냈다는 것을 모르고 산다. 이 식이 조작해 낸 세계를 세간世間이라고 한다. 우리는 지구 위에서 사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그려낸 세간에서 산다. 다시 『화엄경』의 게송으로 글을 맺는다.

 

若人知心行 마음이 움직여

普造諸世間 모든 세간을 두루 만들어냈음을 안다면

是人卽見佛 이 사람은 곧 부처님을 본 것이요, 

了佛眞實性 부처의 진실한 성품을 깨달아 안 것이다.

 

지난 2년간 여러 글을 썼습니다만, 그 모두는 연기와 무아와 공입니다. 연기와 무아와 공일 뿐 달리 뭐가 없는데, 뭐 그리 쓸데없이 할 말이 많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고경』을 통해 22년 전에 장경각에서 펴냈던 『산하대지가 참 빛이다』에서는 다루지 못했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었음을 큰 보람으로 느낍니다. 

이 지면을 허락해 주신 원택스님과 언제나 늦은 원고로 심려를 끼쳐드렸던 조병활 박사님과 서재영 박사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보잘것없는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에게 무량한 지혜와 복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며, 글을 마칩니다.

 

각주>

1) 어떤 이론체계가 다른 이론체계와 정합적(整合, coherent)이라는 것은 그 이론체계가 정당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구분하기 위해 ‘직접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2) 별과의 거리보다 지구 반경이 아주 작으므로, 우리가 북극성을 바라보는 방향은 지구 자전축과 거의 완벽하게 평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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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고려대학교 과학기술대학 물리학과 교수. 연구 분야는 양자정보이론. (사)한국불교발전연구원장. <산하대지가 참 빛이다 (과학으로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양형진의 과학으로 세상보기>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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