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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죽음 속에서 되살아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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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2 년 12 월 [통권 제116호]  /     /  작성일22-12-05 14:32  /   조회2,10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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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에서 성철스님이 향곡스님에게 묻는다. “죽은 사람을 완전히 죽여야 산 사람을 볼 것이요, 죽은 사람을 완전히 살려야 비로소 죽은 사람을 볼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이 질문에 향곡스님은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리하여 잠자고 밥 먹는 일까지 잊고 21일간 삼매 가운데 정진하다가 문득 자기의 두 손을 보고 밝게 깨닫게 된다. 한국 불교사에 빛나는 오도의 한 장면이다. 

 

무심경계의 제일 큰 병

 

성철스님이 말하는 ‘죽은 사람’은 무심에 이른 수행자를 가리킨다. 수행자가 6식의 분별을 쉬고 8식의 차원에 들어가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상황이 된다. 비록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죽음과 같은 상태이므로 이것을 죽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이 무심경계는 번뇌로 인한 장애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깨달음으로 오인될 수 있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 무심이 되었는데 다시 공부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자부심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사진 1. 봉암사 결사의 주역이었던 성철스님, 청담스님, 향곡스님.

 

그러나 성철스님이 보기에 이것은 큰 병이다. 무심만 가지고는 견성이라 할 수 없다. 심지어 가장 고차원에 해당하는 오매일여의 무심경계라 해도 아직 진여와 하나가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불온한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8식 차원의 미세한 번뇌가 바로 그것이다. 무심경계에 자족하여 공부를 멈추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무심경계의 “제일 큰 병이 화두를 참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당시 향곡스님은 봉암사 결사에 동참하기 전에 이미 깊은 삼매를 통해 조사들의 마음이 분명하게 확인되는 그런 경계를 체험한 뒤였다. 내원사 운봉스님 회상에서의 일이었다. 2014년, 부산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해운정사 전법게 중 운봉→향곡의 전법게도 그때 전해진 것이다. 성철스님은 그런 향곡스님에게 죽은 뒤에 다시 죽어 되살아나는 차원을 아는지를 추궁하였다. 향곡스님의 성취가 그저 무심에 머무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투과한 끝에 되살아난 경계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이 질문을 받은 향곡스님은 마음이 담벼락에 부딪힌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침식을 잊고 치열하게 정진한 끝에 크게 깨닫게 된다.

 

이후 성철스님과 향곡스님 간에는 법을 둘러싼 숨 막히는 육박전과 봄바람 같은 웃음 파티가 번갈아 가며 열린다. 서로 다르므로 육박전이고 서로 같으므로 웃음 파티였다. 물론 육박전과 파티는 둘이 아니다. 나중에 어떤 설법에서 향곡스님은 특히 이렇게 죽은 뒤에 되살아나는 일을 차별삼매라는 말을 가지고 설명한다.

 

차별삼매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시방세계 그대로가 큰 반야며, 청정한 세계며, 크게 적멸한 세계며, 크게 해탈한 세계라고 하는 등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령 가석허可惜許라든지, 관關이라든지, 창천蒼天이라든지 하는 이런 것이 다 차별삼매에 속하는 것이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후의 풍경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만사만물은 같음과 다름의 통일체이다. 그것이 법계의 실상이다. 그것은 다양한 황금 장신구가 황금이라는 같음과 장신구라는 다름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둘 아닌 이치에 바르게 눈뜨는 것이 완전한 깨달음이다. 그런데 불교의 공부는 만사만물에 대한 분별과 집착을 내려놓는 일을 우선적으로 실천한다. 우리의 모든 번뇌와 속박이 분별과 집착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분별을 내려놓는 경계가 먼저 나타난다. 이것이 보통 말하는 무심이다. 눈앞의 시비선악에 호오취사의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사진 2. 성철스님과 향곡스님.

 

문제는 이 무심이 완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데 있다. 만약 분별없음만을 내용으로 한다면 그것은 같음에 대한 집착이 되기 쉽다. 분별에 상대되는 분별없음에 머무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명확한 인식이 사라진 어두움 그 자체일 가능성이 높다. 이 어두움이 망상의 일종임은 말할 것도 없다. 교리적으로 이것을 공에 치우친 관찰[空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같음과 다름의 통일체를 대하면서 같음의 측면에 치중하여 관찰하는 일이므로 편견에 이를 수밖에 없다. 위의 예문에 보이는바, “시방세계 그대로가 큰 반야이며 청정한 세계라는 말로는 진리를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한 향곡스님의 설법이 가리키는 바이기도 하다. 

 

그래서 스스로 도달한 무심의 경계에 자족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공부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 성철스님의 ‘거듭 죽는 죽음’에 대한 질문이 일어난 지점이고, 향곡스님의 새로운 화두참구가 일어난 시점이다. 예문에서 향곡스님이 말하는 차별삼매는 죽음에서 되살아난 이후의 풍경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향곡스님이 차별삼매의 예로 든 ‘애석하다(可惜許), 관문(關), 하늘이시여(蒼天)’와 같이 새롭게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원래 이것은 탄식의 어투를 담은 감탄사로서 진여와의 계합을 위해 무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촉구하는 말이다. 스스로 성취한 차원을 내려놓고 새로 공부에 나아갈 때 차별상에 대한 통찰[假觀]이 일어난다. 이렇게 함으로써 공성이라는 같음과 차별상이라는 다름에 대한 집중과 통찰이 통일적으로 일어나는 중도의 관조[中道觀]에 이르게 된다. 삼제원융三諦圓融, 일심삼관一心三觀의 도리이다.

 

이것은 또한 죽음에서 다시 죽어 진정으로 되살아나는 사중득활의 풍경이기도 하다. 사중득활은 설법자에 따라 크게 죽어 크게 살기[大死大活], 영원히 죽어 영원히 살기[常死常活], 완전히 죽어 완전히 살기[全死全活]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 핵심은 일념불생의 무심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서 다시 나아가는 진실한 공의 실천에 있다. 그리하여 같음과 다름을 통일적으로 보는 중도의 관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여기에서 깨달음의 현장에 통용되는 공식을 제시하고자 한다. 바른 수행자는 분별을 쉼으로써 무심에 이르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이 죽음인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무심의 고요함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이 병통인 줄 알아 새로운 공부에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죽은 자리에서 다시 죽는 일과 같다. 그렇게 오로지 화두를 들어 숙면일여의 삼매를 투과할 때 비로소 완전히 되살아나는 견성이 구현된다. 다만 수행의 과정을 말로 표현하자니 이것이 순차적으로 보이지만 그 완성형은 동시적 실천이다. 그래서 죽음 가운데[死中]에서 살아난다[得活]고 표현한 것이다.

 

성철선의 이 공식은 자기만족 없는 나아감을 원칙으로 삼는다. 사실 ‘죽은 사람을 다시 죽인다’는 이 살벌한 공식은 반야에서 말하는 공공[空空]의 도리에 대한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 도리에 의하면 자아와 대상을 포함한 모든 것이 공하다. 나아가 그 공하다는 표현과 공하다는 견해 역시 공하다. 수행을 통해 모든 것의 공성을 확인하는 뛰어난 체험을 했다고 하자. 그렇다 해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다시 아낌없이 내려놓는 공의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공공의 도리다. 

 

5가 7종에 공통되는 수행의 공식

 

이러한 공식에 딱 어울리는 선가의 모델이 설암스님이고, 고봉스님이고, 대혜스님이다. 『선관책진』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러한 선지식들의 수행이력을 집중적으로 모아 그것이 하나의 공식임을 보여주고 있다. 설암스님은 일체의 분별을 떠난 차원에 도달하였지만 ‘매번 잠이 들면 상대되는 두 기둥이 세워지는’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다행인 것은 설암스님 스스로 이것이 병통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안고 참구하기를 10년, 행선을 하는 중에 측백나무가 눈에 들어오면서 성찰이 일어난다. 그야말로 완전히 죽어 완전히 되살아나는 체험을 한 것이다.

 

고봉스님도 그랬다. 고봉스님은 낮 동안은 물론 꿈속에서도 망상분별에 빠지지 않는 차원에 도달해 있었다. 이에 그 스승이었던 설암스님이 묻는다. “깊은 잠이 들어 꿈이 없을 때 주재하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고봉스님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도 없었고 펼쳐 보일 이치도 없었다. 다시 철저한 공부에 들어가는 일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렇게 5년이 지난 어느 날, 잠을 자다가 도반의 목침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모든 의심덩어리가 깨어져 나감을 체험한다. 죽음과 같은 고요함에 머물지 않음으로써 완전한 되살아남을 성취하였던 것이다. 성철스님은 이들이 몽중일여의 수승한 경계에서 그것이 병통인 줄 알고 다시 간절한 참구에 들어갔다는 점을 높이 찬양한다. 그리하여 이것이 5가 7종에서 모두 발견되는 공식이라고 단언한다. 

 

사진 3. 관문을 뚫고 거듭 나아가는 공식을 제시한 『선관책진』.

 

선가에 5가 7종의 분분함이 있었지만 오매일여의 대무심지를 거쳐 대각을 성취함에 있어서는 어느 집안을 막론하고 동일하였다. 또한 이런 대무심지에도 머물러선 안 된다고 하셨다. 만일 승묘한 경계인 대무심지를 구경이라 여겨 주저앉아 버린다면 그를 죽은 사람이라 한다. 반드시 그곳에서 다시 살아나야만 진여를 체득한 대자유인, 참 사람, 산 사람이라 할 수 있으니 이를 사중득활死中得活이라 한다. 

 

이러한 공식이 있었기 때문에 성철스님은 선문답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로지 깨어 있을 때 화두가 항일한지를 물었고, 다시 꿈속에서 그러한지를 물었고, 나아가 숙면 중에 여일한지를 물었다. 또 숙면 중에 여일함이 비록 수승한 경계이지만 이것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일관하였다. 그러기에 역대의 공안에 척척박사처럼 딱 맞는 대답을 내놓는다 해도 “미친 소견이 충천한 일”이라고 판정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화두 참구는 수수께끼 풀이가 아니다. 최근 『선문정로』의 강의를 하는 중에 성철스님의 선어에 담긴 뜻을 묻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그러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때엔 어떠한가? 초初는 31이요, 중中은 9요, 하下는 7이다. 억!!!” 하고 제시한 사중득활 설법의 결론이 무슨 뜻이냐는 것이었다. 이것을 나름의 깜냥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 사실 역대의 공안들 역시 그 맥락만 정확히 안다면, 그리고 성철스님이 즐겨 말하는 쌍차쌍조의 논리만 제대로 적용한다면 해석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성철스님이 즐겨 말하는 쌍차쌍조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반야의 진공묘유, 천태의 일심삼관, 임제의 삼현삼요三玄三要 역시 분별사유 차원의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죽은 끝에 완전히 되살아나는 체험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혹 어느 순간 역대 조사의 공안이 술술 풀린다 해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것이 철저한 죽음에서 다시 죽은 끝에 나타난 되살아남인가? 일체의 번뇌와 속박이 사라진 대자유의 경계인가? 법계의 모든 현장에서 항상 부처님을 만나고 있는가? 스스로 부처로 살고 있는가? 자신이 그렇지 못한데 큰스님이 인정한다고 해서 견성이 되고 해탈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매번 그대의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성철스님의 가르침에 섭섭해 할 일이 없다. 

 

생각해 보면 성철스님은 한 부류의 수행자만을 칭찬했다. 숙면일여를 투과해야 견성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아, 견성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습니까?” 하는 사람, 그리하여 기왕의 성취를 내려놓고 새로운 수행에 들어가는 사람이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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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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