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탈종교화 현상의 가속화와 심층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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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3 년 1 월 [통권 제117호] / / 작성일23-01-05 10:00 / 조회3,718회 / 댓글0건본문
『고경』으로부터 「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담당자께서 저의 평소 지론을 어느 정도 숙지하시고 부탁하는 것이라 믿고 제가 평소 생각하던 것들을 정리해서 올리려고 합니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탈종교화 현상
우선 말씀드릴 것은 한국을 비롯하여 이른바 선진국에 속한다는 나라들에서는 ‘탈종교화’가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종교에서 떠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종교 사회학자 필 주커먼(Phil Zuckermaan)은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3국을 ‘신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God)’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이들을 위시한 유럽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 중에 그래도 전통 종교가 비교적 강세를 이루고 있다는 미국마저도 종교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조쉬 맥도웰(Josh McDowell)이라는 어느 보수파 기독교 목회자는 2006년에 낸 책 제목을 The Last Christian Generation이라고 붙였습니다. ‘마지막 기독교 세대’라는 뜻을 담고 있어 기독교의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목회자에 의하면 그 당시 미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생 중 지역에 따라 69퍼센트에서 94퍼센트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교회도 졸업한다고 합니다. 미국 성공회 주교였던 존 셸비 스퐁(John Shelby Spong) 신부는 이런 현상을 빗대어 미국에서 가장 큰 졸업동창회는 바로 ‘교회 졸업 동창회(The Church Alumni Association)’라고 했습니다.
물론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2005년에 무종교인 수가 47퍼센트, 2015년에 56퍼센트였다가 2021년에 60퍼센트로 증가했습니다. 이제 이른바 산업화된 나라들에서는 더 이상 종교가 필요 없다는 기류가 팽배해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불교의 경우는 어떨까요? 어느 스님이 쓰신 글에 의하면 불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고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불교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느 큰스님은 불교든 기독교든 “기복종교로서의 종교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 밖에 나가 밭 갈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고 종교를 가져서 복 받은 일이 있냐고 물어보시라.”고 단언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옛날에는 병이 나도, 먹을 것이 없어도, 억울한 일을 당해도, 고민거리가 있어도, 긴장을 해소해야 할 일이 있어도 찾아갈 곳은 교회나 절 같은 종교 기관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프면 병원에 가고, 돈이 없으면 은행에 가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경찰서나 법원에 가고, 고민거리가 있으면 상담사에게 가고, 긴장을 풀 일이 있으면 여러 가지 여가산업이 제공하는 편의시설을 찾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습니다. 자연히 종교와 관계없는 삶을 살게 되는 탈종교화 현상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탈종교화 현상의 가속화
그런데 이런 탈종교화 현상이 이번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더욱 가속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종교, 특히 기독교와 불교는 주로 기복신앙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번 코로나 사태로 아무리 열심히 빌어보아도 병을 물리치는 데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인간을 사랑한다는 신이나 불보살이 어찌 이런 몹쓸 병을 우리에게 준다는 말인가?
다 모여서 기도하자고 모였는데, 이렇게 모여 기도한다고 병이 물러가기는커녕 오히려 더 확산되는 것을 보고 종래까지 가지고 있던 초자연적 힘에 대한 믿음이 더욱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연히 빌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가르치는 종교에 대한 신뢰심이 더욱 희박해지고 결국에는 종교에서 떠나는 결과에 이르기 마련입니다. 어느 사회학자의 말을 빌리면, 비대면 화상으로 종교의식에 참여하던 신도들이 대면 모임을 가져도 적지 않은 수가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종교의 필요성
그러나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종교가 정말로 필요 없다는 것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면 종교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어느 인류학자의 진단에 의하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라고 합니다. 단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성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곤란한 교설이나 예식을 강요하는 종교, 이기적이고 피상적인 종교, 심지어 미신에 가까운 종교는 쇠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와 반비례로 진정한 의미의 종교,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즐거움을 주는 종교를 희구하는 열망은 더욱 커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예가 서양 젊은이들 가운데서 퍼지는 구호가 “나는 종교적이 아니라 영성적이다(I'm not religious, but spiritual).”라거나 혹은 짧게 줄여서 ‘SBNR(Spirituality but no Religion)’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상당수 젊은 이들은 지성지수(IQ)나 감성지수(EQ)에 더하여 영성지수(SQ)를 중요시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가진 궁극 문제가 기성 종교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 셈입니다.
종교의 표층과 심층
이런 현상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표층신앙’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는 반면 ‘심층신앙’은 새롭게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느 종교나 표층적인 차원이 있고 심층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기독교도 표층기독교와 심층기독교가 있고, 불교도 표층불교와 심층불교가 있는 셈입니다. 기독교도 불교도 이런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표층에서 심층으로 심화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봅니다. 기복 일변도의 신앙 생활에서 벗어나 종교가 줄 수 있는 감동과 시원함과 해방감을 주는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종의 환골탈태한다는 각오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선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의 차이점 몇 가지만을 간단히 예거해 보고 자세한 것은 앞으로 논의를 계속하면서 개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표층종교는 탐진치로 찌든 지금의 이기적인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종교입니다. 헌금이나 보시를 하더라도 내가 공덕을 쌓아 현세나 내세에 그 보상을 받겠다는 마음으로 한다든가, 기도를 하더라도 나와 내 식구가 잘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그런 행위는 표층종교적 행위입니다. 반면에 심층적 종교는 지금의 내가 본래적인 내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참나를 찾는 것입니다. 종교적 용어로 자기 부인否認, 무아無我, 멸사滅私의 가르침을 중요시합니다. 류영모 선생님의 용어를 빌리면, 표층종교는 ‘제나’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라면 심층 종교는 ‘얼나’를 목표로 하는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표층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면서 이를 강요합니다. 그러나 심층종교는 이해와 깨달음을 중요시합니다. 표층종교에서는 자기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의문을 품지 말고 그대로 믿으면 거기 따른 보상이 있을 것이라 가르칩니다. 그러나 심층종교는 지금 나를 얽매고 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차원의 실재에 눈을 뜨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될 때 진정한 의미의 해방과 자유를 맛볼 수 있다고 합니다.
셋째, 표층종교에서는 신이 저 위에 있다고 믿고 신을 자연히 밖에서 찾지만 심층종교에서는 주로 신이 내 속에 있고, 이렇게 내 속에 있는 신이 결국 나의 참나라고 가르칩니다. 동학의 용어를 빌리면 내가 신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요, 이 신이 바로 나라고 하는 인내천人乃天입니다.
넷째, 표층종교는 경전을 문자 그대로 믿는 문자주의라면 심층종교는 문자 너머에 있는 더 큰 뜻, 속내를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표층종교는 손가락에 집중하는 반면 심층종교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고 합니다.
다섯째, 표층종교는 문자의 표피적인 표현과 어긋나는 생각을 배격하고 자기들이 받아들인 것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배타주의적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 심층종교는 문자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거기에 매이지 않고 다른 생각들과 해석들에 대해 수용적 태도를 지닙니다.
표층불교와 심층불교
몇 가지 더 있지만 일단 여기서는 이 정도로 그치고 불교에서도 ‘표층/심층’이란 말은 쓰지 않아도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한국 조계종의 중천조 지눌知訥 사상에 크게 영향을 준 당나라 승려 종밀宗密(780~841)은 그의 저술 『원인론原人論』에서 불교의 교의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그 중 ‘인천교人天敎’를 제일 하급으로 취급했습니다. 인천교란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나느냐 천상에 태어나느냐, 육도 중 어느 한 가지로 태어나느냐를 궁극 관심으로 삼는 태도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표층불교인 셈입니다.
종밀에 의하면 이런 인과응보적인 태도는 ‘내 속에 불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최고 제5단계 ‘일승현성교一乘顯性敎’의 가르침과 너무 먼 율법주의적 초보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제5단계의 가르침은 말하자면 심층불교인 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불교 평신도들도 심층으로 거듭날 때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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