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살구꽃 만발한 봄날의 봉은사를 노래한 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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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3 년 1 월 [통권 제117호] / / 작성일23-01-05 10:29 / 조회3,189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27 |봉은사 ③
판전 안에는 지면에서 일정 높이 띄워 만든 목가木架들이 삼면 벽에 설치되어 있고, 여기에 경판들을 가로로 눕혀 쌓아 놓고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에는 경판을 모두 새로로 쌓아 놓고 있지만, 우리나라 목판은 양쪽에 마구리를 달아 놓기 때문에 사용하기에도 편리하고 마구리가 만들어 내는 경판들 간의 사이 공간으로 인하여 통풍과 온도, 습도 조절이 잘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낱장을 꺼내는 경우에는 다소 불편하지만 힘이 균일하게 가해지는 방법으로 보관하기에는 가로로 쌓는 것도 장점이 있는 것 같다(사진 1).
흥선대원군의 공덕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신중도를 그려 봉안하고 경판을 판전에 보관하게 된 사실은 초의草衣(1786~1866) 선사가 증명법사로 참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남호율사, 초의선사, 추사선생의 인연이 생의 끝자락에서도 이렇게 이어져 큰 족적을 남겨 놓았음을 보고 ‘한번 살다 가는 인생에 이 또한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곱씹어 보았다.
대웅전 뒤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1942년에 중건한 북극보전北極寶殿이 있다. 많은 이들이 여기에서 절을 하고 소원이 빌며 기도도 한다. 고종의 친인척으로 알려진 심상훈沈相薰(1854~?) 선생이 전서로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선생의 글씨는 전국 사찰에서 간혹 볼 수 있다. 북극보전은 칠성각 또는 삼성각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사찰에서 볼 수 있는데, 칠성신앙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와 민간신앙의 융합이라는 이름하에 도교의 흔적이 사찰 안에 남아 있다(사진 2).
봉은사의 재산 문제는 복잡했다. 절에 희사한 사람들의 공덕을 기리는 공덕비가 서 있다. 고종 시기에도 땅의 소유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는데 흥선대원군이 나서서 이런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봉은사의 땅을 되찾아 주었다. 그래서 봉은사 경내에는 흥선대원군을 기리는 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고종 시기에 고종과 민비, 흥선대원군은 그 누구보다 불사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 시간에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나라를 더 생각했으면 조선이 멸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리라(사진 3).
봉은사는 동호독서당에서 공부하던 엘리트들이 자주 원족을 하던 곳이기도 했지만, 왕실 원당이 있기도 하여 왕실의 보호를 받는 곳이기도 했으니 서울과 지방을 오가던 선비들이 여기에서 서로 만나거나 송별을 하던 장소이기도 했고, 암행어사가 복명復命을 앞두고 최종 보고서를 손질하던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퇴계선생은 문과에 급제한 후 1539년 홍문관 수찬으로 있다가 중종으로부터 독서당에서 사가독서의 은택을 받았는데, 이미 이 당시 어지러운 심사를 비치는 그의 시 한 수가 눈에 띈다.
春晩東湖病客心 춘만동호병객심
一庭風雨夜愔愔 일정풍우야음음
明朝莫上高樓望 명조막상고루망
紅紫吹殘綠喑林 홍자취잔녹암림
봄날은 지나가고 동호의 나그네 병든 마음
비바람 한 번 치고 나니 밤 뜰은 고요하기만 하다.
내일 아침에는 높은 누대에 올라가지 마시게
떨어진 붉은 꽃잎들이 짙푸른 숲에 흩날려 있을 것이니.
그는 중종 연간에는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 개혁파 사림들이 모함에 걸려 죽는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참사도 보았고, 중종 사후 후계문제로 다투는 과정에서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1481~1537)의 세력들이 인종을 앞세워 문정왕후 폐위를 시도하다가 인종이 갑자기 죽자 상황이 급변하여 사약을 받고 황천길로 가는 장면도 보았다. 1550년에는 문과급제하고 대사헌, 관찰사를 지내며 활약하던 형 온계溫溪 이해李瀣(1496~1550) 선생 역시 모함을 받고 귀양을 가는 도중에 죽는 참극을 겪었다. 그래서 퇴계선생은 일생 동안 수없이 많은 임금의 부름에도 사양하고 지방관리나 잠시 맡다가 학문의 길에 정진했을지도 모른다.
살구꽃 만발한 봉은사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심수경沈守慶(1516~1599)도 명종 1년인 1546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동호의 독서당에서 사가독서를 하던 어느 봄날에 살구꽃이 만발한 봉은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중종의 정릉을 이장할 때 경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대여大輿가 한강을 건너는 선창船艙을 설치하지 않다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했지만(사진 4).
東湖勝槪衆人知 동호승개중인지
楮島前頭更絶奇 저도전두갱절기
蕭寺踏穿松葉徑 소사답천송엽경
漁村看盡杏花籬 어촌간진행화리
沙暄草軟雙鳶睡 사훤초연쌍연수
浪細風微一棹移 낭세풍미일도이
春興春愁吟未了 춘흥춘수음미료
狎鷗亭畔夕陽時 압구정반석양시
동호의 절경은 이미 모두 알건만
저자도 앞 풍광은 더욱 빼어나구나.
바람 부는 절 찾아 솔숲길 걸어 지나노니
강촌마을 울타리에는 살구꽃이 흐드러졌다.
반짝이는 모래밭 여린 풀숲에는 솔개 한 쌍 졸고
잔물결 살랑이는 바람 속으로 배 하나 노저어간다.
봄날의 흥취와 수심은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압구정 있는 언덕엔 해가 벌써 저문다.
도연명의 정신세계를 연상케 하는 박지화 선생이 지은 시는 일품이다. 마음이 편할 때 읊조릴 수 있는 글이다.
孤雲晩出峀 고운만출수
幽鳥早歸山 유조조귀산
余亦同舟去 여역동주거
忘形會此間 망형회차간
저녁 구름 외로이 산마루에 흘러가고
숨어 있던 새는 일찍 산으로 돌아가네.
나도 배와 함께 흘러가노니
그 사이에 나의 몸도 잊어버렸다.
낙향하는 퇴계선생이 하직인사를 나누던 절
퇴계선생은 벼슬길에서 수없이 사양을 하며 진퇴를 반복하다가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자 바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바치고는 두 달 반 뒤, 1569년 3월 3일 밤, 만류하는 선조와 밤을 새는 독대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귀향길에 올랐다. 많은 관리들과 성안의 선비들과 백성들이 아쉬워하며 마지막 송별에 몰려나왔다(사진 5).
평생 선생을 존경해 온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 선생도 4일 밤 선생의 객관으로 갔다가 새벽에 선생이 묵고 있는 몽뢰정夢賚亭으로 가서 선생을 모시고 함께 배를 타고 봉은사에 이르러 이별의 정을 나누게 된다. 몽뢰정은 정유길鄭惟吉(1515~1588) 선생이 한강변 동호에 지은 정자다. 독서당에서 독서할 때 어지러운 나라 모습에 가슴 아파하며 바라다보던 곳, 문정왕후가 죽자 모두들 벌떼같이 일어나 공격을 할 때 그럴 것까지 없다고 했던 퇴계선생이 도성을 나와 동료들과 마지막 하직인사를 하게 된 곳도 이곳 봉은사다. 그날 고봉선생은 이별의 안타까움을 시로 남겼다.
江漢滔滔日夜流 강한도도일야류
先生此去若爲留 선생차거약위유
沙邊拽纜遲徊處 사변예람지회처
不盡離腸萬斛愁 부진이장만곡수
한강물은 밤낮으로 도도히 흘러가는데
선생의 이번 걸음 멈추게 하고파라.
모래밭에 매인 닻줄 풀기 싫어 서성이는데
애간장 녹는 이별과 무거운 슬픔 가눌 길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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