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禪, 禪과 시]
산에 올라서는 웃기만 했고 물가에 가서는 울기만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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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3 년 1 월 [통권 제117호] / / 작성일23-01-05 10:50 / 조회3,729회 / 댓글0건본문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화원유원지로 갑니다. 60년대, 70년대에는 동촌유원지, 수성못과 함께 대구시민의 3대 유원지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요즘은 생태탐방로, 대명유수지, 달성습지를 엮은 테마공원으로 거듭났습니다.
사문진 나루터에서부터 1km 길이의 낙동강 생태탐방로의 수상 데크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볼 수 없었던 화원동산의 북서쪽 벼랑을 강물 위에서 바라봅니다. 새로운 시점을 하나 얻는 것은 새로운 풍경을 하나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수상 데크가 설치됨으로써 화원유원지는 옛날보다 훨씬 풍성해졌습니다.
물억새 밭과 맹꽁이
강 건너 고령군 다산면의 나지막한 산들과 강변 풍경이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대명천을 건너가면 1992년부터 성서공단의 침수를 막기 위해 조성된 대명유수지가 있습니다. 유수지란 원래 집중호우나 장마로 인해 불어나는 하천의 물을 저장하는 곳입니다. 대명유수지는 금호강과 대명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지역 78,000평입니다. 20년 동안 생태계 복원 사업을 벌인 결과 새로운 생태계가 태어났습니다.
대명유수지에 있는 광대한 물억새 밭이 장관입니다. 보는 순간, 가슴이 탁 트일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물억새는 갈대에 비해 키가 작고 억새처럼 억세지 않고 감촉이 부드럽습니다. 대명유수지가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이 물억새 밭과 맹꽁이 때문입니다.
2011년, 국내 최대 맹꽁이 서식지로 알려지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곳곳에 맹꽁이 관련 게시판이 있지만 맹꽁이는 야행성이라 낮에는 보기 힘듭니다. 생태탐방로가 조성되고 관광명소가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입니다.
맹꽁이 서식지로 유명세를 치렀지만 2017년 이후로 맹꽁이를 볼 수 없다고 합니다. 환경보호가 사람의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나는 늘 의심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이처럼 허점투성이니까 너무 아는 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생태탐방에는 24명의 친구들이 참가했습니다. 달성습지의 다목적 광장 무대에 앉아 기념촬영도 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우리들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나타나는군요. 65세 이상 노인이 50%를 넘으면 한계 마을이 되듯이 우리 모임도 한계 모임입니다. 앞으로도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친구들과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건강이 여간 좋지 않아도 걸을 수만 있다면 “아아, 괜찮은 인생이야!”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그것은 우리들이 원하는 만년의 모습입니다. 광장 뒤편의 군더더기 없는 느티나무 군락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산책은 작은 여행
달성습지는 전체 면적이 60만 평에 이릅니다. 달성습지 안에 2.5km의 산책로가 있는데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느티나무들이 낙엽을 떨구고 잔가지를 낱낱이 보여줍니다. 갈색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발밑에서 들려옵니다. 발자국 소리, 새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하고 아름다운 길입니다. 산책은 여행이라고 옛날에 누군가 말했습니다. 정말이지 이런 산책은 작은 여행처럼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이렇게 걷고 있으면 살아 있다는 감각이 전신의 세포를 살아나게 합니다.
달성습지 안을 흐르는 강은 낙동강으로 합류하기 직전의 금호강입니다. 팔공산 기슭에서 흐르는 동화천의 물도 금호강으로 흘러들어 이곳으로 옵니다. 우리들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그 유래가 머나먼 곳에서 오는 것입니다.
대명유수지의 물억새 밭과 달성습지의 산책길을 걸은 후 유람선을 타러 갑니다. 1시 정각, 유람선을 타고 낙동강 선상 유람을 시작합니다. 강변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운데 강물 위에는 복사본 경치가 아른거립니다. 멀리 화원동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이 보입니다. 저 높이 어디쯤인가, 고등학교 모자를 쓴 내 모습도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저 정도 높이에서 내려다보면 인생길 아득한 곳까지 내어다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나이까지 사는 것은 절대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10대가 제일 좋은 나이죠. 모자를 약간 삐딱하게 쓰고 교복 상의 단추 한 개는 풀어놓곤 했던 10대.
꿈같고 환영 같은 육십칠 년이여
옛사람들은 산과 강을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가장 먼저 천동정각(1091∼1157)의 임종게臨終偈가 떠오릅니다. 그의 임종게는 높고 아득하고 정감이 넘치는 풍경 하나를 보여줍니다.
꿈같고 환영 같은 육십칠 년이여
백조 날아가고 물안개 걷히니
가을 물이 하늘에 닿았네.(주1)
천동정각은 묵조선黙照禪의 제창자이자 조동종에서 널리 읽힌 『송고백칙頌古百則』의 저자입니다. 그의 문하엔 늘 1천 명이 넘는 승려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천동정각도 자신의 평생을 ‘몽환공화夢幻空花’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한평생을 말하는데 ‘몽환공화’, 이 네 글자보다 더 솔직하고 의미가 깊은 문장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 네 글자 사이에 천동정각의 전 생애, 나아가 우리들의 전 생애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몽환공화’로 표현함으로써 천동정각의 영혼은 가을 강물과 함께 하늘에 가서 닿았던 것입니다. 이 게송을 읽는 우리들도 한 폭의 그림 같은 세계로 들어갑니다. 죽음은 강물에 숭고한 색채를 더해주고 하늘과 맞닿을 듯한 순수한 관조를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가을 강물이 하늘에 닿듯이 자신보다 더 광대한 어떤 것과 합일하게 됨을 경험하고, 그 합일 안에서 우리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단지 열여섯 글자로 우리들의 출렁이던 마음이 고요해질 때도 있습니다. 천동정각이 묘사한 이 풍경은 우리들 내면을 관통하여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드니 정말이지 천하의 절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잇시분슈(一絲文守, 1608~1646)도 자신의 생애를 부운유수浮雲流水와 같다고 고백합니다.
뜬구름 흐르는 물과 같은 나의 생애여
인연 따라 쉬고 머물며 지팡이 걸어두네.
납자(주2)는 원래 정한 곳이 없으니
가고 머무는 것은 마음에 맡겼다네.(주3)
사람은 누구나 한갓 구름처럼 떠돌며 물처럼 흘러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강물처럼 흘러가다가 쉬고 싶을 때 쉬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가는 삶이란 참으로 담담한 삶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몽환공화’로 보든 ‘부운유수’로 보든 이렇게 삶의 덧없음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인생은 덧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희망하고 기대하는 모든 것이 실은 죽음의 팔 안에서 춤을 추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생의 덧없음을 깨달은 다음부터는 그저 매 순간을 음미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 삶은 무심한 자연 속에서 무심하게 살아가는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산에 올라서는 웃기만 했고
물가에 가서는 울기만 했네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의 시를 읽으면 무엇보다도 엄청난 감정의 크기에 놀라게 됩니다. 산수山水를 오로지 웃음과 눈물로만 읽은 사람은 그가 유일합니다.
산에 올라서는 웃기만 했고
물가에 가서는 울기만 했네.(주4)
김시습이 금강산을 구경하고 난 다음에 쓴 시입니다. 이 시는 꾸밈이 없고 아주 단순하지만 그 정감의 덩어리는 산보다 높고 강물보다 깊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어법은 이처럼 꾸밈이 없고 단순한 것입니다. ‘등산이소登山而笑 임수이곡臨水而哭’, 여덟 글자를 통해 그의 절절한 정감이 우리들 가슴으로 스며들어 우리들 또한 그와 함께 웃고 울 수밖에 없게 합니다. 실컷 울고 나면 우리는 한 편의 비극을 본 것처럼 삶의 우울감, 불안감, 긴장감이 해소되어 마음이 정화됩니다.(주5)
마냥 떠들썩한 놀이판도 돌아보면 항상 덧없음을 느끼게 합니다. 인생 마지막 날까지 슬금슬금 걸을 수 있으려면 삶의 요령을 익혀야 합니다. 늙어갈수록 몸이 여기저기 불편해진다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 더 많아집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그냥 그대로 살아가야 하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아픈 몸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사람은 늙을수록 더욱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각주>
(주1) 天童正覺, 『宏智禪師廣錄』, “夢幻空花 六十七年 白鳥煙沒 秋水天連.”
(주2) 승려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
(주3) 一絲文守, 『定慧明光仏頂国師語録』, “浮雲流水是生涯 歇泊随縁掛錫杖 衲子由来無定跡 従教去住負心期.”
(주4) 金時習, 『梅月堂集』, “樂山樂水 人之常情 而我卽 登山而笑 臨水而哭.”
(주5)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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