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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부분적 깨트림과 부분적 깨달음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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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3 년 1 월 [통권 제117호]  /     /  작성일23-01-05 14:39  /   조회17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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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의 담장 속에 숨은 비밀의 창고라고 해야 할까? 밀림 속의 옛 왕궁이라 해야 할까? 우리 삶의 출발지이자 목적지인 부처는 그렇게 ‘어딘가에 숨어’ 그 존재성을 알리는 전파를 송출하고 있다. 아니! ‘어딘가’라고 말했지만 ‘모든 곳’이라 하는 것이 더 좋겠고, ‘숨어 있다’고 말했지만 ‘드러나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좋겠다. 

 

숨어 있거나 드러나 있거나 간에 직접 부처를 만나 생로병사의 일체 고통을 해소해보자는 것이 불교다. 가장 좋기로야 모든 곳에 남김없이 드러나 있는 부처를 지금 당장 만나는 일이다. 아야교진여 등 다섯 비구가 석가모니의 최초 가르침을 받아 그 자리에서 완전히 깨달았던 것처럼! 나무꾼 혜능이 ‘머물지 않고 그 마음을 낸다’는 구절에 확실히 눈뜬 것처럼!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이치로 보면 부처는 분명히 모든 곳에 드러나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좀체 그 정체를 밝게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본적은 부처, 현주소는 중생

 

그래서 우리는 이중의 주소를 갖는다. 본적은 부처이지만 현주소는 중생이다. 이치적으로는 부처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중생이다. 왜인가? 이유는 각자에게 있다. 우리 각자는 완전한 부처를 품고 있음에도 엉뚱한 딴 살림을 차리고 있다. 분별과 집착을 내용으로 하는 생각이 그 살림의 주체다. 분별의식과 잠재의식과 심층 무의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이 생각은 허상의 세계를 만드는 데 선수다. 동서남북도 이것이 만든 것이고, 시비선악, 행복과 불행도 이것이 만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와 ‘세상’을 분별하여 다양한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생각이다. 거기에는 바탕을 이루는 작용이나 착한 작용들도 있고, 크고 작은 번뇌와 착하지 않은 작용들도 있다. 이것들이 층층의 장벽을 만들어 부처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잃고[迷] 헤매고 있다[惑]. 이 미혹에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전도된 견해와 잘못된 집착의 미혹[見思惑], 공의 이치에 집착하며 다양한 현상의 차별성에 어두운 미혹[塵沙惑], 인지하기 어려운 미세한 무명의 미혹[無明惑]이 그것이다. 이것들이 겹겹의 담장이 되고, 그 담장들이 미로를 만들어 부처를 향한 접근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를 보려면 이 층층의 담장을 깨야 한다. 요컨대 부처를 보는 공부는 담장을 깨트리는 공부다. 자아의 담장을 깨고, 관념의 담장을 깨고, 모든 패러다임의 담장을 깬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최초 가르침인 중도와 사성제의 실천이 내려놓음과 깨트림을 본질로 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공정이지만 부지런히 두드리다 보면 이 장벽들이 조금씩 부서지거나 단번에 무너지는 일이 일어난다. 그렇게 담장이 다 무너진 자리에 부처가 온전히 드러난다. 어떻게 보면 중생 살림이 무너진 폐허에서 부처의 살림이 일어난다.

 

사진 1. 녹야원 5비구탑.

 

천태나 화엄 등의 교학에서는 그 깨트림의 길고 긴 여정을 제시한다. 불교의 진리를 깊이 믿는 단계(10신), 진리에 안주하는 단계(10주), 진리의 실천에 매진하는 단계(10행), 실천의 성과를 중생과 삼보에 되돌리는 단계(10회향), 스스로 진리의 대지가 되는 단계(10지)가 있고, 여기에 후보 부처(등각)가 되고, 다시 완전한 부처(묘각)가 되는 지위가 더해진다. 이 전체를 합하면 52개의 지위가 된다. 대승의 마음을 낸 보살이 거치는 지위라는 뜻에서 이것을 보살 52위라고 부른다.

 

이 중 최초의 지위인 10신은 본격적 깨달음의 여정을 위한 준비 단계에 해당한다. 준비 단계라 하지만 내용이 만만치 않다. 특히 천태에서는 10신의 단계에서 견사혹과 진사혹을 단멸한다고 본다. 이것은 우리에게 인지되는 장애의 전체이다. 이것을 10신의 단계에서 남김없이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이것은 성문의 궁극적 성취인 아라한과에 해당한다. 그만큼 천태의 구상은 거대하다. 미혹이 사라진 지점이 여정의 마지막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고 준비 단계라니!

 

초주견성과 분파분증론 

 

이렇게 준비가 끝나면 본격 여정이 시작된다. 그 상대는 인지하기 어려운 미세한 무명의 담장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일과 같다. 이후의 전체 42지위가 이 보이지 않는 담장을 깨는 과정이 된다. 그래서 10신 이후 진입하는 10주의 최초 지위는 특히 중요하다. 이 초주의 지위에서 견성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견성한 뒤 42단계를 거치면서 조금씩 장애를 타파하고 그만큼의 불성을 깨달아 나가는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분파분증分破分證이 그것이다. 장애를 조금씩 부분부분 깨트린다는 의미에서 분파分破이고, 그만큼의 불성을 깨닫는다는 점에서 분증分證이다. 그러니까 천태의 시스템에서 볼 때 초주의 견성은 본격적 여행의 출발점이다.

 

화엄에서도 초주에 견성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다만 화엄의 견성은 그 수준에 있어서 천태의 견성과 판이한 차이가 있다. 천태의 견성은 표층적 장애를 완전히 타파한 끝에 일어나는 최초의 실질적 깨달음, 즉 증오證悟이다. 이에 비해 화엄의 견성은 믿음과 이해를 강화한 끝에 일어나는 이해적 깨달음, 즉 해오解悟이다. 그러니까 10신을 거쳐 초주에 진입하면서 해오로서의 견성을 성취하고 이에 바탕하여 실질적인 깨달음을 점차 강화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처럼 견성에 대한 천태와 화엄의 규정에는 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두 교파의 초주견성론을 일괄 비판하면서도 천태의 견성론을 화엄의 그것보다 높이 평가한다. 

 

“태교의 초주견성初住見性이 불조정전은 아니나 태교의 삼혹三惑인 견사見思, 진사塵沙, 무명無明 중에서 견사와 진사의 양혹兩惑을 단제斷除하고 일품무명一品無明을 분파分破한 분증무생分證無生을 내용으로 하였으니, 견사도 미탈未脫한 초신初信의 해오解悟로써 견성이라고 주장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진 2. 작은 석가로 추앙받는 천태대사.

 

여기에서 태교는 천태이고 ‘견사도 미탈한 초신의 해오를 견성이라고 주장’하는 쪽은 화엄이다. 어쨌든 천태와 화엄이나 모두 초주에 견성한 뒤 본격적인 깨달음의 길을 걷는다는 약도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해오이거나 증오이거나 간에 그것이 견성이라면 그 본질적 내용은 궁극의 깨달음과 동일한 것이라야 한다. 그래서 “초발심의 시기에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규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성철스님의 전파원증론

 

선문의 견성이 부처님이 성취한 대원각과 동일하다고 보는 성철스님의 입장에서 이것은 수용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그래서 천태스님이나 이통현 장자의 초주견성론을 “절대로 추종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동화사 금당선원(사실은 운부암에서였던 것 같지만)에서 오도송을 읊은 뒤 그 경계가 변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한 번 깨달은 뒤 한결같았다면 그것은 궁극의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성철스님의 초주견성론 비판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자신의 견성 체험이다.

 

물론 그것은 분명한 경전적 근거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성철스님이 제시한 바와 같이 『기신론』에서는 견성을 구경각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고, 『대열반경』에서는 대열반과 동의어로 다루었으며, 『종경록』에서는 여래지의 다른 표현으로 보았다. 또 『유가론』에서는 “10지 보살이 불성을 보는 것은 얇은 비단을 사이에 둔 것과 같다.”고 했다. 10지 보살조차 완전한 견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공평하게 보자면 초주에 견성하여 깨달음을 완성해 나간다고 보는 경론도 있고, 10지는 물론 등각조차 아직 견성하지 못했다고 보는 경론도 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수용의 문제로 보인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선문에서는 완전한 깨침이라야 견성이라고 인정하는 쪽이다. 이에 비해 교학에서는 자발적 수행의 동력이 일어나는 지점[眞因]을 견성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강해 보인다.

 

성철스님은 간화선을 수행한 끝에 모든 장벽이 무너져 부처가 남김없이 드러나는 체험을 한다. 성철스님은 이것을 전파원증全破圓證이라고 표현한다. 분파분증의 상대어인 셈이다. 그러면서 그 경계를 ‘칠통이 깨지는 일’로 묘사한다. 칠통은 새까만 옻을 담은 통이다. 그처럼 까맣게 모르던 무심의 끝에서 단번에 수천 수백의 태양이 빛나는 광명의 세계로 뛰쳐나가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이것은 간화선, 혹은 남종선의 상징과도 같다.

 

사진 3. 동화사 금당선원.

 

육조스님은 “수시로 부지런히 닦아, 먼지가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신수스님의 경계를 부정했다. “본래 한 물건이라 할 것도 없는데, 어디에서 먼지가 일어나냐.”는 것이었다. 이처럼 남종선에는 월반의 미학과 판을 깨는 통쾌함이 있다. 해방감마저 충만하다. 그런데 육조스님의 이 선언을 이해하는 일과 직접 그렇게 되는 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사실 육조스님의 선언은 여래의 이치를 밝힌 것인 동시에 스스로 도달한 경계를 밝힌 것이기도 하다. 당시 육조스님은 번뇌의 먼지가 일어나지 않는 차원에서 스스로 부처가 되어 소요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이 깨달음의 말씀을 듣고 당장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수행은 필요 없다. 그런데 이 말을 이해한다고 해서 나의 중생 살림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수시로 부지런히 닦자는 신수스님의 제안이 ‘조심스럽게’ 재소환될 필요가 있다. 원래 육조스님이 부지런히 닦는다는 신수스님의 실천을 비판한 것은 그것이 닦는 주체와 닦음의 대상을 설정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었다. 부지런히 닦는다는 주체의식은 아상의 온상이 되기 쉽다. 닦음의 대상을 설정하면 그로 인해 법을 실체화하는 법상의 함정에 빠지게 되어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아예 닦지 말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참 생각할수록 불교의 수행은 이율배반적이다. 수행의 주체를 강화하지도 않고 법을 실체화하지도 않으면서 부지런히 공부에 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이 부지런한 화두공부를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두참구는 간절히 알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밀고 나가는 공부다. 그 과정에서 부분적 눈뜸이라 할 체험도 있고, 모든 경전의 가르침이 얼음에 박 밀 듯 시원하게 이해되는 안목의 열림도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간택한 화두참구의 최초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면 해결된 것이 없다. 

 

왜 조주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라고 한 것일까? 경전의 어떤 구절, 조사의 어떤 말씀을 가져와도 이 공안 앞에서는 모두 주변을 맴도는 말이 될 뿐이다. 과녁의 중심을 직접 때리는 정답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일체의 앎과 이해를 내려놓고 단 하나이자 만 가지인 정답을 찾아 온몸을 던지는 참구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는 열심히 하는 공부가 

있음에도 주체와 대상이 강화되는 일이 없다. 

 

해파리가 새우의 눈을 빌리듯

 

이러한 참선 수행에서 조심해야 할 가장 큰 장애가 있다. 바로 경전적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자신의 깨달음으로 삼는 일이다. 전통적 비유에 의하면 그것은 해파리가 새우의 눈을 빌리는 일과 같다. 해파리는 눈이 없다. 그런데도 어딘가를 향해 움직여 간다. 옛사람들은 이것을 궁금히 여겼다. 그러다가 그 아래에 새우가 사는 것을 보고는 해파리가 새우의 눈을 빌려 주변 환경을 감지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남의 관점에 휘둘리는 일을 해파리가 새우의 눈을 빌렸다고 표현한다. 

 

경전적 지식과 이해가 바로 그렇다. 경전은 불교적 여정을 알려주는 훌륭한 가이드 북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여행이 깊어져 미지의 세계에 들어가는 입장이 되면 참고할 가이드 북을 다시 찾는 대신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

 

그래서 경전을 버리고 참선에 뛰어드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적 과제다. 경전적 지해를 버려야 진정한 참선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해의 틀을 부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해가 남아 있는 한 무심은 완전해질 수 없다. 그러니까 참선자에게 책을 보지 말라고 강조한 성철스님의 가르침은 괴팍한 노장의 고집이 아니다. 그것은 원칙의 문제이다. 성철스님이 배격한 것은 책이 아니라 우리의 수행 현장에 지해가 개입하는 일이었다. 성철스님의 분파분증에 대한 비판 역시 지해의 안내를 받는 참선이 과연 진정한 참선일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 회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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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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