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서예로 포교활동을 펼친 독자적 서도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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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3 년 2 월 [통권 제118호] / / 작성일23-02-03 10:18 / 조회2,556회 / 댓글0건본문
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25 |기타가타 신센
지난 몇 개월에 걸쳐 일본불교가 제국주의 입장에서 국가불교의 역할론을 주장한 불교학자들을 소개했다.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발판, 원 시초가 된 메이지 불교학자들을 이번 호부터 몇 회에 걸쳐 다루고자 한다.
메이지 불교는 대체로 해외에 눈을 돌려 불교를 탐문하고 포교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불교학자들(시마지 모쿠라이, 샤쿠 소우인, 난죠 분유)을 『고경』에 일부 소개했으나, 이번 계기를 빌어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 기타가타 신센 北方心泉(1850~1905)을 이번 호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 문인들과의 교류
기타가타 신센은 진종 오타니파真宗大谷派의 승려로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石川県金沢市 소재의 조후쿠지常福寺 주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8년에 조후쿠지 14세 주지가 되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메이지明治를 대표하는 서도가書道家로 알려져 있다. 신센이 서도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동본원사東本願寺의 포교사로 중국 상해에 건너가면서부터였다. 그는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북파北派(北碑派) 서체를 배워 일본에 처음 소개했고, 전예서篆隷書를 행서나 초서처럼 자유롭게 구사했다.
신센이 자신만의 서풍을 확립하기까지는 중국 해상파海上派 문인들과 항주 문인들과의 교류가 컸다. 1877년, 신센은 마츠모토 핫카松本白華와 함께 포교사로 상해에 발을 들인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귀국하기 전까지 약 6년간 상해에서 생활했다. 당시 함께 근무한 오카자키
쇼돈岡崎正鈍의 일기 『지나재근잡지支那在勤襍志』에는 호철매胡鐵梅, 진홍고陳鴻誥 등 신센과 교류한 해상파 문인들이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특히 신센은 호철매와 친분이 두터웠으나 그에게서 서도를 배웠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더해서 이 시기에 신센에게 북파 서풍과 금석학을 가르쳐준 스승 역시 전하지 않는다. 같은 시기에 신센과 함께 상해에 체류했던 화가 우츠미 기치도內海吉堂는 “신센에게 그림을 가르쳐 준 스승은 특별히 없었다. 다만, 그는 많은 작가를 만나면서 그들의 작품을 모방했다.”라고 회상했다. 신센이 북파의 서체와 금석학을 독학한 점은 당시 중국으로 건너가 유명한 스승 밑에서 정식으로 서도를 배웠던 마루야마 타이우圓山大迂나 나카바야시 고치쿠中林梧竹와는 대별되는 지점이다.
신센의 항주 문인들과의 교류는 1881년, 처음 항주를 방문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항주의 문인들과의 교류를 『항유기행초략抗遊紀行抄略』과 한시를 통해 남겼다.
“나는 (1881년) 5월 6일, 상해에서 출발해 12일에 항주에 도착했다. 18일간 항주에 머물면서 수백 명의 항주 사람들과 만났다. 그중에는 법상사의 성기醒機, 성인사의 설주雪舟, 주사보朱嗣甫, 왕계손王啓孫, 조철사趙哲士 등이 있었다. 어떤 날은 자기 집에서 향응을 펼치
고, 어떨 때는 호수에 배를 띄워 연회를 열고,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두터웠다. 중국에 도항해서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다. 인정이 두텁고 풍속이 아름다운 곳이다.”
- 「항주사람의 풍속」, 『항유기행초략』 중에서
신센은 항주에서의 생활에 만족한 듯 보이며, 항주 문인들 역시 신센을 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항주에 체재하면서 항주 언어를 배우고 있던 진종의 승려 마츠가에 켄테츠松ヶ江賢哲는, “신센은 호방해서 술도 잘 마시고 담대했다. 글이 뛰어나 그가 항주에 왔을 때, 중국인들이 글을 의뢰해 수백 장을 쓴 적도 있다. 중국인들은 신센의 글을 표구해 걸어 두었다.”라고 회고했다. 중국 청대 말기의 대표적 학자인 유월兪樾(1821~1907)이 일본인의 한시를 선별해 편찬한 『동영시선東瀛詩選』(1883)에는 신센의 시 11수가 수록되는 등 문인으로서의 성과 역시 얻었다. 흥미로운 점은 신센이 『동영시선』의 편찬에 관여했으며, 그 결과 신센과 인연이 있는 칸기엔咸宜園 관계자들의 한시가 다수 수록되었다는 점이다.
귀국 후의 활동과 평가
1883년, 정양을 위해 귀국한 신센은 한학자 미야케 신켄三宅真軒의 조언에 따라 일본식 서학과는 다른 중국식 서학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붓을 다루는 기술뿐만 아니라 한자에 대한 기본 지식부터 습득해야 했다. 당시 일본은 한문 서적의 수입과 판매가 단절된 시기여서, 그는 상해와 항주에 체재 중이던 마루야마 타이우나 기시다 긴코 등을 통해 소학과 금석류 서적을 손에 넣었다.
신센이 일본 내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내국박람회에서 입상을 통해서이다. 신센이 상을 타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의 최신 서풍이 일본에 소개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아키야마 헤키죠秋山碧城와 마루야마 타이우가 귀국했다. 이들이 서삼경徐三庚의 서풍을 일본에 소개하면서 중국의 서풍이 일본 내에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신센의 문인활동은 전업작가로서가 아닌, 어디까지나 진종 포교의 방편적 역할이 컸다. 1898년, 신센은 타니 료젠谷了然과 함께 일본인 유학생을 인솔해 다시 중국 난징으로 건너가 금릉동문학당金陵東文学堂을 설립했다. 난징에서의 활동을 살펴보면, 우선 지역 유력자와 상해 영사, 동아동문회東亜同文会 회장 등과 지속적으로 면담을 했다. 이 면담을 통해 티베트 탐험 지원, 중국인 유학생을 일본에 보내거나 청나라 군대로부터 교육을 위해 일본 군인의 파견을 의뢰받았다. 나아가 중등과정의 금릉동문학당을 대학으로 승격시키고, 교육을 통해 포교를 확대할 목표를 세웠다. 신센이 상하이 별원에서 포교할 때 주요 상대가 문인들이었다면, 난징에서는 정관계 인사나 군인들로 업무 내용이 크게 변했다.
1899년, 의화단의 난으로 인해 귀국한 신센은 동료 서도가인 구사카베 메이가쿠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포교사로서의 그의 포부가 드러나 있는데, 우선 난징에 이어 광동성에도 동본원사 학당을 창립할 계획에 참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다시 건강을 잃어 본산의 요구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동본원사 개혁운동에 가담한 것이 빌미가 되어 승적 박탈과 함께 본산에서 추방당했다(1902). 1904년에 본산으로부터 승적을 복구한다는 통지를 받았지만, 병이 악화해 다시 중국으로 도항하지는 못했다.
신센에 대한 당대 및 후대의 평가는 포교사가 아닌 서도가로서의 평가가 많다. 가장 먼저 평가한 이는 동시대에 함께 활동한 구사카베 메이가쿠日下部鳴鶴(1838~1922)이다. 그는 신센에 대해 “상당히 많은 서적을 읽었다. 메이지 서도사書道史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는 평을 했다. 구사카베의 평은 신센 사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신센이 활동 당시에는 다소 비판적이었다. 이외에도 “중국의 양수경楊守敬과 비견할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다.”, “전초합체篆草合体가 자유분방하다.” 등의 평가를 받았다.
후대의 많은 이들은 신센과 구사카베 메이가쿠를 비교했다. 두 사람 모두 북파 서풍을 도입해 일본 서예의 근대화를 꾀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대별점은 구사카베는 일본 서도의 근대화를 위해 전면적으로 중국 서도를 따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 서도계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문파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반면, 신센은 문파를 형성하지도 서파書派에 얽매이지 않고 서도에 대해 자유로운 입장이었다. 매사에 구애받지 않는 그의 성격과 맞물려 자신만의 독자적인 서풍을 확립했다. 신센의 자유로운 성정이 사명감으로 충만한 쿠사카나베에게 비판으로 돌와왔지만, 어디까지나 신센은 포교사라는 본업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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