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쓴 선문정로]
알고 이해하는 일과 직접 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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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3 년 2 월 [통권 제118호] / / 작성일23-02-03 15:04 / 조회2,818회 / 댓글0건본문
최근 몇몇 교수님들과 자유로운 담론 모임을 갖고 있다. 모임의 첫 화제로 『선문정로』의 깨달음에 대한 법문을 소개했는데, 그분들의 반응이 “좀 많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어떤 분은 이해하느라 머리가 빠질 뻔했다는 댓글을 달기까지 했다. 글 읽기로 치자면 산전수전 다 겪은 양반들이다. 그런데 왜 성철스님의 깨달음 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선에 대해 말한다는 것
물론 주된 원인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나의 ‘솜씨 부족’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어렵다는 반응에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참선에 관한 글을 쓸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성철스님의 마음과 딱 계합하는 그런 체험을 한다면 글과 말이 시원하게 열릴까?
그래서 참선 얘기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참선이라는 것 자체가 이해와 앎을 내려놓는 일에 해당한다. 이해와 앎의 틀을 깨는 일을 본질로 하는 것이 참선의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이해와 앎의 틀 속에 가져다 놓으려는 일! 그것이 참선을 이해시키려 하는 노력의 정체가 아닐까?
이러한 상황을 늘 겪었기에 하신 말씀이겠지만 성철스님은 “사량분별을 떠나는 것이 불법의 도리인데 도리어 사량분별 속에서 불법을 헤아린다면 서울로 가려면서 부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셈”이 된다고 했다. ‘불법은 깨닫는 것이지 사량분별로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참으로 그렇다. 선사는 그래서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그렇지만 학문적 접근을 병행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선에 대한 이야기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해 보지 않은 운동을 설명만 듣고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먹어 보지 않은 낯선 음식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가 보지 않은 낯선 곳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실제적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다 직접 해 봐야 알 수 있는 일들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유독 참선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은 좀 불공평해 보인다. 참선이야말로 해 봐야 안다. 성철스님의 표현처럼 “속는 셈 치고라도 한번 해 보면” 그것이 바로 앎과 이해를 내려놓은 일이라는 걸 이해하게 된다. 진실한 이해는 이해를 넘은 그 어딘가에 있는 법이다.
그런데도 이해를 넘은 저쪽 차원을 말할라치면 신비주의적 포장이라는 비판까지 돌아오는 마당이다. 왜 그럴까? 참선은 정신활동이다. 그리고 정신활동인 한 그것은 오로지 이해의 범주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들을 한다. 설혹 그것이 이해 저쪽의 일이라 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칙적으로 선의 실천은 시비선악을 나누는 분별적 정신작용을 내려놓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하여 감지하기 어려운 깊은 무의식의 미세한 분별의식인 삼세육추三細六麤까지 소멸하는 차원에 이르는 것이다. 성철스님의 선에 대한 법문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듯하다. 삼세육추라니! 아뢰야식이라니? 용어도 낯설고 그것을 소멸한 차원이 어떤 것인지 도대체 감조차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읽고 쓰기의 전문가들인 교수님들조차 ‘머리가 빠질 뻔 했다’고 하는 것이다.
앎과 이해를 넘은 자리, 수능엄주
아무리 정밀한 이해라 해도 한 번의 무심無心 실천보다 못하다는 것이 선문의 입장이고 보면 선에 대한 지식인들의 불편함이 당연한 일일 듯도 싶다. 당장 아난존자가 그랬다. 불교의 역사에서 부처님의 설법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일인자를 꼽자면 당연히 아난존자가 먼저다. 그는 걸어다니는 경전이었다. 그럼에도 아난존자는 마등가 여인의 유혹에 빠진다. 여기에서 아난존자는 자신이 자랑하던 불법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체험한다.
이때 아난존자를 구한 것이 수능엄주다. 수능엄주는 분별과 이해를 내려놓고 무심으로 들어
가도록 이끄는 다라니다. 그러니까 지식과 이해의 선수였던 아난존자가 자신의 주특기인 바로 그 지식과 이해를 내려놓았을 때, 그리하여 수능엄주가 이끄는 무심의 차원에 온몸을 던졌을 때, 비로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식과 이해는 무심과 상극이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말한다. “다문지해多聞知解를 사갈蛇蝎같이 멀리하고 실증實證에만 노력해야 한다.”라고. 알고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깨달음의 씨앗을 죽이는 비상과 같고 짐독鴆毒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일까? 알고 이해하는 길을 걸어 불법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경전을 읽다 보면 불법을 꿰뚫어 보는 안목이 열리는 일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열린 눈을 가지고 참선에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의 완성형이 바로 돈오점수론이다. 이해적 차원의 깨달음[解悟]에 바탕하여 점차적으로 수행해가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이해적 차원의 깨달음이 바로 돈오로서 이 돈오를 체험한 후 점차적인 닦음을 통해 깨달음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약도다.
경전을 태운 덕산스님
그렇다면 여기에 하나의 얘기가 있다. 덕산스님은 『금강경』의 권위자로서 걸어다니는 경전 그 자체였다. 스스로 최고의 주석서라고 자부하는 『청룡소초』를 완성하였고, 이로 인해 ‘주금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덕산스님은 이것을 짊어지고 천하의 선지식과 한판 안목의 고하를 가리는 도장깨기에 나선다. 그런데 시작도 하기 전에 떡 파는 노파에게 일패도지하고 만다. 이후 용담스님을 찾아갔지만 역시 연전연패였다.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어떤 탁월한 견해도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특히 용담스님이 촛불을 내어 비춰주고 덕산스님이 그 빛에 의지하려는 순간, 훅! 하고 촛불을 꺼버린 가르침이 결정적이었다. “경전은 남이 내어준 촛불이었구나! 그것에 의지하는 밝음은 결국 어두움을 감춘 밝음이었구나!” 이에 덕산스님은 자부심의 근원이었던 『청룡소초』를 불태워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
덕산스님이 깨달은 뒤에 몽둥이를 휘두르는 방편을 구사했던 것도 불교적 지식에 기댈 여지를 씻어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덕산선사의 몽둥이 설법[德山棒]’은 가장 선사다운 가르침의 전형으로 수용된다. 앎의 흔적을 씻어내는 일이 참선의 길이라는 점에 대한 절대적인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책을 불태우는 일은 선가에 흔한 풍경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성철스님의 ‘책 보지 말라’는 얘기가 나온다. 가능하면 책을 보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불경이거나 신문이거나 다른 무엇이거나 간에 글자라고 생긴 것은 눈에 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 순간 눈에 티끌이 생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문자와 관련된 한 성철스님은 철저하고도 비타협적이다. 생각해 보면 당시 불교계에서 성철스님만큼 문자를 많이 본 경우도 드물 것이다. 오죽하면 팔만대장경을 다 외는 분이라는 얘기까지 나왔을까? 이렇게 경전 읽기에 최고였던 성철스님은 문자를 배척했고, 걸어다니는 『금강경』이었던 덕산스님은 자신의 『청룡소초』를 불태웠다. 그것은 직접 체험한 끝에 내놓은 확실한 결론이라고 보아야 합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경전공부를 배격하는 성철스님의 법문에 제기되는 한 가지 비판이 있다. 『선문정로』는 최소한 깨달음의 문턱에 선 고급 수행자를 위한 법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완전한 깨달음만을 강조하는 이 법문이 발심수행자에게 무슨 의미를 갖느냐는 것이다. 경전공부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것이 키 큰 나무, 키 작은 풀에 고루 적용되는 가르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 메시지는 동일하다.
“그대가 뿌듯해하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독약이다. 빨리 내려놓아라.”
경전공부가 뿌듯함으로 연결되지만 않는다면 그래도 괜찮을 듯하다. 탐진치는 그 장애성과 비도덕성을 스스로 안다.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숙제가 분명하다. 그런데 경전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내려놓기는 쉽지 않다. 장애성은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숨어서 작용하는 지속성이 강한 것은 더 큰 문제다.
생각해 보면 범부나 발심 수행자에게는 물론이고, 높은 수준에 도달한 법신보살에게도 의지하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각자에게 전부인 바로 그것을 지금 당장 내려놓으라는 것이 선의 요구다. 내려놓는 순간, 그만큼의 깨달음이 일어난다. 마등가는 음녀였다. 그런데 깨달았다. 그녀가 지향하는 것은 아난존자의 빛나는 모습이었다. 그녀 역시 그만큼의 아름다운 용모를 갖춘 존재였다. 아름다움이 그 존재의 근원이었고 최고의 가치였다. 그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은 자신의 전부를 내려놓았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깨달았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가장 훌륭한 제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했다. 불법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내려놓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니, 도대체 왜 내려놓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부처님의 성스러운 말씀을 받아 지니는 이 고귀한 행위를 왜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부처님을 따른다는 것은 직접 부처가 되는 길을 걷는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 가르침의 말씀을 받아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말씀만을 기억하고 이해하면서 그것이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임을 잊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난존자가 그랬다. 그와 관련된 『수능엄경』 등의 신화적 기록에 의하면 부처님이 열반하기 전까지 아난존자는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부처님의 꾸지람을 받게 된다. “여래의 심오하고 위대한 가르침을 억만 겁 동안 기억한다 해도 그것이 단 하루 무념을 수행하는 일보다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난존자는 지식과 이해를 내려놓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는 사형인 가섭존자에게 ‘피부병 앓는 여우’라는 비판까지 받게 된다. 여우는 의심이 많아서 이곳저곳 힐끗거리기를 반복한다. 여기에 피부병까지 앓게 되면 그 힐끗거리기가 배가 될 것은 정한 이치다. 지식의 힐끗거림을 반복하고 있던 아난존자는 바로 그 일로 인해서 부처님 열반 이후 가장 성대한 법회였던 칠엽굴 경전결집의 모임에서 축출되고 만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로는 최고였지만 부처님의 마음과 하나로 만나는 자리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난존자의 내려놓음과 깨달음
흥미로운 것은 이 축출이 아난존자에게 깨달음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주역이 되어야 할 경전결집에 참석하지 못한 아난존자의 처참한 심경은 상상을 불허한다. 이때 아난존자는 최고의 분발심을 내어 직접 수행에 들어간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지식과 앎을 내려놓고 무심으로 들어가는 수행이었다. 그리고 아난존자는 그날 밤 깨닫는다. 후반야가 지날 무렵 극도로 피곤해서 잠깐 눕고자 했는데 베개에 머리가 닿기 전에 깨달음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자기를 송두리째 부정당한 아난존자가 바로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 깨달음이 일어난 것이다.
성철스님은 선에 드는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기억했던 아난존자의 경우를 자주 예로 든다. 알고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의 증득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고질병, 병통, 중환이라는 것이다. 정말 아난존자에게 그런 일이 있었을까? 소설적 허구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아난의 축출사건이 『사분율』 등 율장이나 남전 및 북전의 여러 경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 다문多聞의 고질은 세존께서도 속수무책이었으니 얼마나 가공할 병통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천만 노력하여 다문의 중환에서 벗어나야 심안心眼을 통개洞開하여 불법을 바로 본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아는 만큼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이것은 점잖은 표현이다. 성철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는 만큼, 아는 것에 의지하는 그만큼, 장애의 구름장이 두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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