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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19세기 일본의 배야론의 논리와 개종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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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3 년 3 월 [통권 제119호]  /     /  작성일23-03-03 10:14  /   조회1,12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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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26 |마츠모토 핫카 ①

 

마츠모토 핫카松本白華(1839~1926)는 한시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누구보다도 일찍 인도와 유럽을 시찰했고, 중국에서 포교활동을 한 국제적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다. 하지만 동시대의 다른 불교학자들과 비교해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역시 사실이다. 이번 호에서는 마츠모토 핫카의 유럽 견문여행을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유럽 종교상황 시찰

 

마츠모토 핫카는 가가 이시카와군 마쓰토加賀石川郡松任(현 하쿠야마시白山市) 소재의 진종 오타니파 혼세이지本誓寺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도쿄로 나와 수학한 것을 시작으로 오사카의 히로세 교쿠소広瀬旭荘 밑에서 한문학을 배웠다. 교토 다카쿠라高倉 학교에서 수학할 무렵, 형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형을 대신해 18세 때 혼세이지本誓寺 제26대 주지직을 계승했다. 19세에 교토 코잔인 류온香山院龍温 밑에서 각 종파의 교의를 배우면서 오구루스 코쵸小栗栖香頂(1830~1905)등과 친교를 맺었다. 코쵸는 일본불교를 중국에 처음 진출시킨 인물로, 향후 핫카의 중국포교에 도움을 주었다.

 

사진 1. 마츠모토 핫카. 혼세이지 소장.

 

핫카는 1872년부터 교부성敎部省에서 일했는데, 당시 불교계는 불교 배척 운동이 격렬해지면서 근대화를 강요받던 시기이기도 했다. 교부성에서 재직할 당시 핫카는 서구의 문물을 체험할 귀중한 기회를 얻는데, 바로 정토진종 니시혼간지파西本願寺派의 서구 종교시찰단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38세). 1872년 9월, 마츠모토 핫카·오타니 코에이大谷光瑩·나루시마 류호쿠成島柳北·세키 신조関信三·이시카와 슌다이石川舜台 등 5인과 사법성司法省 관리 8인이 2차 종교시찰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원래 에토 신페이江藤新平가 책임자로 참여하기로 했으나 사정상 불참하게 되자 교부성 직원이었던 핫카가 시찰단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들은 다음해 7월까지 약 1년간 파리와 런던을 중심으로 유럽의 종교 상황을 시찰한 후 귀국했다. 

 

사진 2. 파리 유학시절. 앞줄 오른쪽부터 마츠모토 핫카, 오타니 코에이, 이시카와 슌다이, 뒷줄 나루시마 류호쿠.

핫카는 이 1년간의 여정을 기록한 『마츠모토 핫카 항해록松本白華航海錄』을 남겼다. 『항해록』에 따르면 종교상황 시찰 계획은 오타니 코에이의 외할아버지인 후시미궁伏見宮과 산죠 사네토미三条実美의 권유, 에토 신페이江藤新平의 추진력과 핫카의 중개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상황을 좀 더 풀어 보자면 오타니파 내부는 이시카와 슌다이를 비롯한 개혁파들이 홋카이도 개척에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자 이에 대한 비판이 일면서 종무에서 배제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개혁파를 지원하는 정부 관계자가 종교시찰을 강력하게 권유하면서 오타니파로서는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더해서 오타니 코에이가 출발할 때 문도들에게 “진종 내부에서 자신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들이 상당하다.”는 서신을 보내는 등 시찰단에 대한 진종 내부의 평가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사진 3. 『진종사료집성』(1983) 11권에 『마츠모토 핫카 항해록』이 수록되어 있다.

 

 시찰단의 목표는 1차 파견 유학생(시마지 모쿠라이 등)과 동일하다. 유럽의 종교정책을 시찰하고 이를 새로 신설된 대교원大敎院의 정책에 반영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2차 시찰단은 핫카와 오타니 코에이의 마찰 등 내부적 문제로 원활히 운영되지 못했다. 그 결과 시마지 모쿠라이가 정교政敎분리와 신불분리를 설파해 구석에 몰린 불교를 살리기 위한 성과를 낸 것에 비해 2차 시찰단은 이에 필적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사진 4. 이와쿠라 사절단이 본 파리 콩코드 광장. 출처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

 

핫카는 귀국 후 진종 본산의 집사보執事補에 임명받았지만 이를 사임하고 다시 교부성에서 일하면서 환속했다. 1877년 다시 승적을 복구한 후 본산의 명에 따라 상해별원에 부임했다. 상해별원에서의 포교활동은 다음 호에서 소개하겠다. 

 

배야론과 기리시탄 종교개종

 

『항해록』에는 프랑스로 가는 여정 중 상륙한 도시들(요코하마-홍콩-사이공-싱가폴-스리랑카)의 풍속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일부 내용을 보면, 핫카는 그리스도교의 포교 현황에 대한 일관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1872년 9월 21일, 홍콩 영화서원을 방문해 ‘약서約書’(성서)를 구매했다. 이후 영국의 예배당을 방문해 목사를 만나고자 했으나 부재중으로 다음 날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동년 9월 22일, 아침에 목사 페팔 씨를 만나서 포교 실적 등을 경청했다. 이후 영화서원에서 마태·마가복음, 고린도전서, 로마서 주해를 구매했다. 

9월 26일, 사이공(호치민)에서 천주교 신부가 승선했다.”

 

『항해록』에서 느껴지는 핫카의 서양 종교에 대한 시선은 목적이 있는 호기심에 가깝게 보인다. 여기에는 막부 말기에 팽배한 배야론排耶論과 핫카가 코잔인 류온이나 다카쿠라 학교에서 배운 야소교耶蘇教 비판 등이 오히려 흥미를 일깨운 건 아닐까 한다. 배야론은 에도 말기부터 메이지기에 걸쳐 서양의 야소교, 즉 그리스도교를 배격하는 논리를 말한다. 

 

시찰단으로 떠나기 전, 핫카가 일본에서 접한 그리스도교는 조금 극단적이다. 에도 막부 말, 중국의 아편전쟁을 비롯해 세계정세가 일본 내부에 전해지면서 정토진종의 종학宗學 교육도 내용에 변화를 가져왔다. 「호법호국」을 위해 야소교를 비판하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 비판에 앞장선 이들 중 한 명이 코잔인 류온(1800~1885)이다. 

 

사진 5. 홍콩 영화서원 발행 「한문 성서」초판본(1855). 교토 엔코지 소장. 코잔인 류온이 그리스도교를 연구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코잔인 류온의 야소교 강의는 간단히 정리하면, 먼저 신구약성서의 개요와 함께 천도天道와 천교天敎가 교의라고 설명했다. 특히 유교와 비교해 설명했는데 유교의 수신도 좋으나 군신·부자 윤리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군신관계를 뛰어넘는 신과 인간의 관계와 주종관계가 필요하다고 봤다. 유교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지극한 가르침」이 바로 야소교라고 설명했다. 야소교는 출가를 위한 법이 아니라 재가 상태로 미래의 해탈을 위한 종교이다. 다만 현재의 야소교는 16세기의 천주교와는 다르며 불교와 신도도 비슷한 인륜과 도덕을 이야기하지만 모욕적인 내용은 입에 담지 않는다고 했다.

 

코잔인의 야소교에 대한 시각은 당시로서는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정토 진종 승려인 코잔인이 야소교를 불교보다 유교와 비교해 상이성을 설명했다는 점이다. 코잔인의 시각은 핫카가 이어받은 듯하다. 핫카는 에드킨스가 저술한 불교비판서 『석교정류釋敎正謬』(1857)를 반박하기 위해 『판유록辦謬錄』을 저술했다. 『판유록』의 내용 중 “불교를 배척하고 거짓으로 대해 참혹하게 하는 것은 물론 우상숭배에 빠져 질투의 신으로 불리는 근거가 된다.”라고 야소교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특히 우상숭배 옹호는 코잔인의 해석과 연결점을 가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 6. 1867년 나가사키의 기리시탄 탄압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 출처 『기리시탄의 부활』.

 

핫카가 야소교와 직접적으로 접촉한 사건은 1867년과 1869년에 일어난다. 1867년 일명 기리시탄切支丹으로 불리는 기독교 신자 3천여 명이 나가사키長崎에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2년 후 카나자와金沢에서도 5백여 명이 체포되었다. 핫카는 번주의 명을 받아 이들의 개종을 담당하게 되었다. 핫카가 이 임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찾기가 어렵지만, 그와 함께 기리시탄 개종을 담당한 이시카와 슌다이의 기록에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시카와의 행적을 엮은 『걸승 이시카와 슌다이 언행록傑僧石川舜台言行錄』(1951)에는 “완강하게 절개를 굽히지 않는 신자들을 보면 다른 한편으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고백이 있다. 당시 핫카 일행의 기리시탄 개종 임무는 진종의 의도대로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한 것 같다.

 

유럽 시찰 중 핫카는 오구루스 코쵸가 의뢰한 영국 교회의 규칙을 번역해 긴급으로 일본에 보내기도 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핫카의 시각은 그가 귀국 후 오구루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난다. 편지에는 신구(카톨릭과 칼뱅파 신종교) 양교에 대한 경시감과 함께, 신교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핫카가 종교개혁을 언급한 것은 정토 진종의 개혁 역시 필요하다는 의미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핫카는 신불을 합병해 국민을 교화한다는 교부성의 방침에 동조했고, 이 점이 신불분리와 정교분리를 주장한 시마지 모쿠라이와의 상이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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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현재 아시아 종교문화 교류에 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ikemire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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