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내세 지향에서 현실 중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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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3 년 3 월 [통권 제119호] / / 작성일23-03-03 10:50 / 조회2,583회 / 댓글0건본문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의 차이 중 하나는 표층 종교가 ‘내세 지향적’이라면 심층 종교는 ‘지금 여기’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층 종교는 이생에서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살면 그 보상으로 내세에 극락이나 천당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종교 생활의 중심에 둡니다. 따라서 표층 종교는 어쩔 수 없이 자기의 행동이 법에 저촉되느냐 되지 않느냐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가는 율법주의적 종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풍요로운 삶이 되지 못합니다.
이제 이런 내세 중심적 표층 종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심지어 티베트 불교의 대표자 달라이 라마도 최근에 나온 그의 책 『종교를 넘어』에서 ‘극락/지옥’의 가르침은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설득력이 없으므로 이제는 ‘넘어서야 할’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마커스 보그는 종래까지의 기독교는 천당 가느냐 지옥에 떨어지느냐에 가장 큰 관심을 쏟았던 ‘천당/지옥 기독교(Heaven/Hell Christianity)’였지만 이제 새롭게 등장하는 기독교에서는 이런 철 지난 교리는 그만두고 현실에서 ‘변혁(transformation)’을 강조하는 기독교여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이미 조선 유학자들도 사람들을 천당/지옥으로 유혹하고 위협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어이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재를 중요시하는 가르침의 대표가 저는 초기 경전에 나타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율법을 잘 지켜 극락에 가도록 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 가장 뚜렷한 예가 부처님이 성불 이후 최초로 가르치셨다고 하는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이제 이 사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이 어떻게 현실 중심적이었던가에 대해 한 번 살펴보기로 합니다.
부처님의 현실 중심의 가르침
사성제四聖諦
아시겠지만 사제四諦 혹은 사성제四聖諦(諦는 일반적으로 ‘체’로 발음하지만 현재 한국 불교계에서는 ‘제’로 발음합니다.)는 네 가지 진리라는 뜻으로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네 가지 교설을 말합니다. 첫째, 고제苦諦란 삶이 괴로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으로 사고팔고四苦八苦라고 하는데, 생로병사의 네 가지 괴로움[四苦]에다가 싫어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대해야 하는 괴로움[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존재 자체의 괴로움[苦蘊盛苦]이 더하여져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이 됩니다.
괴로움은 사실 육체적이나 심리적, 정신적 괴로움도 중요하지만 인간이면 경험하는 인간의 한계, 불안정, 불만, 결핍, 좌절 같은 불완전한 인간의 기본 조건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苦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두카(duḥkha)’는 기름이 쳐져서 부드럽게 돌아가야 할 수레바퀴 축에 모래가 들어가 삐걱거린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서양 학자들 중에는 괴로움을 자기네 식대로 풀이하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스트레스, 불만족, 비극적 얽힘(tragic entanglement), 끊임없는 좌절(perpetual frustration), 인간적 곤혹(human predicament) 등입니다.
둘째 집제集諦(samudaya)는 이런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진리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우리가 가진 ‘목마름[渴愛]’ 때문이라고 합니다. 집착, 정욕, 애욕이나 욕심입니다.
남양 군도나 아프리카에서 원숭이 잡는 방법으로 나무에 줄을 메고 줄 끝에 코코넛 열매를 달아 놓고 거기에 구멍을 뚫은 다음 속살을 파내고 그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땅콩 같은 것을 넣어 둔다고 합니다. 원숭이는 코코넛 구멍에 손을 넣고 땅콩을 움켜쥡니다. 손이 빠지지 않습니다. 원숭이 잡는 사람은 유유히 원숭이에게 다가가 원숭이를 잡습니다. 우리도 어느 면에서는 모두 원숭이처럼 욕심과 집착과 무지로 잡은 손을 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욕심이나 집착을 없앨 수 없는가 하는 것이 바로 멸제滅諦(nirodha)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우리의 욕심의 불길을 혹 불어 꺼 버릴 수 있다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훅 불어 꺼 버린 상태’가 바로 니르바나, 열반입니다. 열반을 범어로 ‘nirvāņa’라고 하는데, 영어로 표현하면 ‘blown-out’ 상태라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올라가 정상에 도착한 다음 그 짐을 내려놓을 때의 시원함입니다. 이처럼 집착을 없애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위대한 인간 승리의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이런 집착을 없애고 나아가 우리를 얽매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 길이 바로 도제道諦(mārga)입니다. 그 길이 구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 ‘여덟 겹의 바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팔정도
팔정도를 간략하게 열거하면 1, 바른 견해, 2. 바른 생각, 3. 바른 말, 4. 바른 행동, 5. 바른 직업, 6. 바른 정진, 7, 바른 마음챙김, 8. 바른 집중 등 여덟 가지입니다.
이 중에서 지면상 몇 가지만 설명하면, 3번 바른 말은 진실한 말, 시의적절한 말, 경우에 합당한 말, 남에게 용기를 주는 말 등이고 바르지 못한 말은 물론 거짓말, 남을 모함하는 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 등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비록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 불화와 반목을 가져오는 말은 바른 말이 못 된다고 합니다.
5번 바른 직업은 생명을 해치지 않는 직업을 말합니다. 전통적으로 무기나 술이나 독약을 파는 것, 인간이나 동물의 생명을 해하는 것과 관련된 직업, 그리고 마술사나 해몽가, 중매쟁이 같은 직업은 바른 직업이 못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무엇이 바른 직업이냐 하는 것은 직업의 종류에 달린 것이라기보다 직업에 대한 태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나의 직업이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는가, 혹은 진정으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로 여기느냐에 따라 바른 직업 여부가 판가름 되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사직이 남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면 바른 직업이지만, 그것으로 치부하려 하거나 환자보다 병원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면 바른 직업일 수 없을 것입니다.
7번 마음챙김은 산스크리트어로 ‘samyak smŗti’라고 하는데, 전통적인 번역은 정념正念입니다. 전통적 해석에 의하면 지금 이 순간 내게 일어나는 몸의 움직임, 감각이나 감정, 마음의 움직임, 개념이나 생각, 이 네 가지를 마음을 다해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를 영어로 ‘mindfulness’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주로 ‘마음챙김’이라 옮기는 것 같습니다. 특히 베트남 출신 틱낫한 스님이 이 수행법을 세계에 널리 전했습니다. 8번 바른 집중은 산스크리트어로 ‘samyak samādhi’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정정正定이라고 하지만 ‘독서삼매’라고 할 때의 ‘삼매三昧’에 해당되는 수행법입니다.
이 여덟 가지 사항을 1, 2를 혜慧, 3,4,5를 계戒, 6,7,8을 정定이라고 하여 이를 ‘계정혜’ 삼학三學이라고 합니다. 특히 7,8은 불교 수행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지관止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주1)
지금 여기
여기서 보듯 부처님은 인간이 겪는 이런 고통을 꿰뚫어보시고 지금 여기에서 당하고 있는 이런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보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렇게 팔정도의 여덟 가지 사항을 잘 준수하면 그 대가로 죽어서 극락이든 어디에 갈 것이라는 요지의 언급이 없습니다. 이런 사항을 지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삶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기 위한 것입니다. 요즘 말로 고치면 철두철미 실존주의적 접근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가톨릭의 브라이언 피어스 신부는 세계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수행법을 경험한 분으로 틱낫한 스님의 ‘마음챙김’의 수행법을 접한 후 그리스도교는 사후 천국 가는 것을 너무 강조하고 있는 데 반해 틱낫한 스님은 지금 여기에서의 자유와 환희를 강조한다는 점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주2)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극락이 불교에서 말하는 최종 종착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궁극 이상은 극락이 아니라 열반, 니르바나입니다. 열반은 죽은 뒤에 옮겨 가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집착에서 벗어나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 상태입니다. 죽어서 극락 가기만을 희구한다면 맹귀우목盲龜遇木처럼 얻어진 천재일우의 이생은 일종의 대기상태, 과도기, 전초기지 정도로 소홀히 여겨지는 셈입니다. 사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열반의 기쁨을 누리는 풍요로운 삶을 살도록 해야겠습니다.
<각주>
(주1) 사제팔정도에 대한 자세한 현대적 해석을 보기 위해서는 오강남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현암사, 2006) 참조.
(주2) 『깨어있음-지금 이 순간에 대한 탐구』(불광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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