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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솔향기 그윽한 천년 고찰 청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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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3 년 3 월 [통권 제119호]  /     /  작성일23-03-03 11:14  /   조회2,754회  /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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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29 |청암사·수도암①

 

지금은 경상도가 행정구역상 북도와 남도로 나뉘어져 있지만 그 이전에는 경상도였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우도와 좌도로 나누어져 있었다. 오늘날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에 속하는 김천, 고령, 성주, 합천, 거창, 산청 등 여러 지역이 가야산伽倻山을 중심으로 주위에 분포되어 있다. 그래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왕래도 자연스러웠고 빈번했다.

 

진리의 궁전으로 가는 길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불영산佛靈山으로 찾아가는 길은 구경삼아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붓다가 제시한 진리를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수행하는 승려들이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곳이기에 마음가짐도 진지하고 발걸음도 겸허하다.

 

사진 1. 무흘구곡武屹九曲 중 제9곡에 해당하는 용추폭포.

 

이 지역은 전라북도의 덕유산德裕山과 경상남북도에 걸쳐 있는 가야산 사이에 있어 산천의 경관이 뛰어나고 산수풍광山水風光이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며 그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영토가 작은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풍광이 아름다운 곳을 곳곳에 두고 사는 우리는 참으로 복된 곳에 살고 있다. 이런 경우를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어서 세상에 없는 신선神仙까지 끌어와 ‘동천洞天’이니 ‘선계仙界’니 하고 부르거나 ‘유토피아utopia’니 ‘이상향理想鄕’이니 ‘샹그릴라Shangri-la’니 하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리라. 여기도 바위에 ‘불영동천佛靈洞天’이라 새기기도 했고, 수도산을 선영산仙靈山이라고도 하고, 그 정상을 신선대神仙臺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을이 깊어가는 산에는 붉은 단풍이 타들어 가고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시사철 변함없이 자기 모습을 하고 있다. ‘고송특립孤松特立에 독야청청獨也靑靑’이라고 했던가. 하늘로 솟은 기암절벽의 바위와 맑은 개울물을 보노라면 ‘청천벽립靑天壁立에 청정자심淸淨自心’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그 산들에 간혹 황금색으로 넓게 카펫을 깔아 놓은 것은 군락을 이룬 전나무들이다. 가을날 청암사靑巖寺와 수도암修道庵으로 가는 길은 이런 단풍들이 화려하게 장식하고있는 진리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성주에서 당대의 거유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선생이 경영했던 무흘구곡武屹九曲이 펼쳐진 대가천大伽川을 따라 제1곡에서 찾아들면 마지막으로 제9곡인 용추龍湫의 폭포에 이른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높은 바위 끝에서 은빛 구슬을 공중에 흩날리며 수직으로 떨어지는데, 아래에는 맑은 소沼를 이루고 있고, 떨어지는 물소리는 장엄하다.

 

조선시대에 문인들은 송나라 주희朱憙(1130~1200)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세계를 흠모하며 우리 산천에도 구곡을 정하여 경영하였는데, 이 무흘구곡은 우리나라의 구곡 가운데 길이가 제일 긴 구곡이기도 하다. 자연과 인간이 일체가 되는 공간 속에서 방대한 장서를 수집하고 지식을 탐구하며 많은 지식인들과 함께 연구와 토론을 한 그 흔적들이 이제는 자연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고, 곳곳에 서 있는 표지판만이 우리에게 그 시절의 편린片鱗을 전달해 주고 있다. 이들은 무엇을 위하여 이런 삶을 살아갔을까? 인간의 문제를 구명하고 해결하기 위한 여정이었으리라. 어떤 이들은 출사出仕하여 나라의 일에 헌신하였고, 어떤 이들은 광대한 지식의 바다에서 평생 탐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도선화상이 창건한 청암사

 

대가천 계곡으로 이어진 성주로를 따라 계속 들어가면 증산면 면사무소가 있는 곳에 이르는데, 이 지역은 옛날 ‘불영산 쌍계사佛靈山 雙溪寺’가 있었던 곳이다. 옥동마을에 있은 쌍계사는 큰 사찰이었는데, 6·25전쟁기간 중인 1951년 여름날 북한 김일성의 공산군이 불을 질러 전소되어 사라지고 없다.

 

여기서 수도암으로 오르는 길로 가지 말고 곧장 증산로를 따라가면 청암사에 이른다. 청암사는 본래 쌍계사에 속한 난야蘭若로 지어졌다고 한다. 영조 3년인 1730년에는 쌍계사를 옹주방翁主房에 속하게 하여 원당願堂으로 세수와 공납을 받게 하는 바람에 원성이 높아 조정에서 논란이 된 적도 있었고, 정조 때에는 박학다식했던 박세당朴世堂(1629~1703) 선생의 문집인 『서계집西溪集』의 목판을 쌍계사에 보관하고 추각追刻하기도 했다. 1891년(고종 28)에 그의 후손인 박제억朴齊億 성주목사는 이 목판들을 청암사로 옮겨 정리하기도 했다.

 

오늘날 수도산修道山이라고도 부르는 불영산에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재위 857~861) 2년인 858년에 도선道詵(827~898) 화상이 쌍계사와 함께 수도사와 청암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도선화상의 이름만 등장하면 풍수風水니 비보裨補니 하는 말만 풍성하기에 붓다의 진리를 찾아 얼마나 진지하게 구도자의 길을 걸어갔는지는 알기가 쉽지 않다. 풍수나 보고 비기秘記니 도술道術이니 하는 등 이상한 행적을 남긴 승려로만 전해지고 있다. 

 

그에 더하여 왕건王建(918~943)이 새 나라의 왕이 된다고 예언하였다고 하여 고려 왕실에서는 후대로 내려오며 죽고 없는 사람에게 왕사王師와 국사國師의 칭호까지 부여하고 받들었으니 불교 승려가 권력자의 등극을 예언하고 맞추는 예언가가 되어야 주목을 받을 판이 되었다. 하기야 21세기 과학의 시대에도 입학시험이나 선거가 있는 때이면 무술인, 점술가, 풍수가들의 말이 횡행하는 한국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신라가 말기로 오면서 권력투쟁으로 망국의 길에 접어들고 사회는 해체되어 가면서 백성들은 자신들의 삶과 미래를 나라에 맡기기보다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살 길을 찾아 나가야 할 형편이었기에 이런 괴이한 언설들이 등장했을 만도 하다.

지방의 선종 사찰의 승려들도 어지러운 권력투쟁에서 각기 어느 한편에 서서 그 사람이 새 왕이 될 것이라며 지지하기도 했으니, 지식이 적고 세상을 잘 알 수 없는 백성들로서는 참언과 술수에 휘둘리며 의존하는 경향이 널리 확산되었으리라. 나라가 백성의 삶을 지켜주지 못하는 형편이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 그렇지만 불교의 수행승이 예언이니 비법이니 비기니 도술이니 하면서 점이나 치고 풍수를 보면서 중생을 현혹시킨다면 붓다의 가르침에서 멀어져도 한참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청암사가 창건되던 그 시절에는 당시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동리산문桐裏山門을 연 혜철惠哲=慧徹(785~861) 국사가 이곳에 머물기도 하였다고 한다. 나중에는 도선국사가 이 혜철국사의 제자라는 말까지 만들어지지만 말이다. 그 시절 신무왕神武王의 이복동생인으로 왕이 된 헌안왕은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하여 통치기반을 굳건히 하려고 했기에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보령 성주사聖住寺에 주석하고 있던 낭혜무염朗慧無染(801~888) 화상을 존숭하여 제자로서의 예를 갖추기도 했다. 설악산 억성사億聖寺 염거廉居(?~844) 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한 후 장흥 보림사寶林寺에 주석하고 있던 체징體澄(804~880) 선사가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하는 일에도 적극 후원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강한 불교적 통치이념이 지배하던 환경에서 쌍계사, 청암사, 수도사 등이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신방화상이 수행했던 수도산

 

조선시대 대학자 장복추張福樞(1815~1900) 선생의 문집 『사미헌집四未軒集』에 의하면, 수도산은 신라 말에 신방神昉(?~?) 화상이 은거하며 수도한 곳이라 하여 산의 이름이 수도산으로 되었다고 한다. 인적이 드문 이곳은 그 옛날부터도 난세에 속세의 혼란을 피하여 은거하기에 좋은 곳으로 알려져 왔던 것 같다.

 

사진 2. 불영산 청암사 일주문.

 

신방화상은 650년(진덕여왕 4)에 현장玄奘(602?~664) 법사가 장안長安의 대자은사大慈恩寺에서 불경을 번역할 때, 필수筆受로 참가하기도 한 당대 유식학唯識學의 대가였다. 불경을 번역하는 역장譯場에서 서자書字가 산스크리트어로 된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 그 뜻에 알맞은 한자로 번안하는 역할을 하는 이가 필수인데, 불경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연도로 보면, 신방화상이 수도산에 머물 때는 청암사 등이 창건되기 한참 전이다.

 

청암사에 들어서면 일주문一柱門을 맞이한다. 여기서부터 속계를 떠나 붓다의 세계로 들어선다. 세속에 물든 사념邪念을 지금이라도 떨쳐 버려야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둥근 기둥을 나란히 세워 팔작지붕을 얹은 문은 1976년에 새로 건립한 것으로 1993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일주문에는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1871~1937) 선생이 예서체로 쓴 「불영산청암사佛靈山靑巖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강화도 전등사傳燈寺 대웅전의 주련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가 구사하던 개성적인 결구結構로 썼다. 옛날의 일주문에 있었던 것을 여기에 걸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 3. 김돈희 서, 전등사 대웅전 주련.

 

김돈희 선생은 역관을 지낸 6대조 때부터 중국에서 구입한 방대한 장서를 통하여 신진 문물과 지식을 익히고 사자관寫字官을 지낸 아버지에게서 한학과 서예를 배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법학교육기관이자 국립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출발점이기도 한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를 졸업한 후에는 관직으로 나가 검사 등을 지냈다.

 

서화에도 탁월하여 오세창吳世昌(1864~1953), 김규진金圭鎭(1868~1933), 안중식安中植(1861~1919), 조석진趙錫晉(1853~1920) 등과 함께 ‘서화협회書畵協會’를 창립하고 후일 그 회장을 맡아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서법연구단체인 ‘상서회尙書會’를 결성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중국의 여러 서체를 섭렵한 다음에 개성을 가진 자신의 서체를 구사하였는데, 특히 그의 해서楷書 글씨에는 송나라 대문호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1945~1105)의 서법이 진하게 깔려 있다.

 

일주문을 지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솔향기를 내뿜는 송림松林 사이로 걸으면 산사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인적이 드문 시간에 홀로 느린 걸음으로 걸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지금은 직지사直指寺에 소속된 말사로 번창하지만, 조선 중기에 와서 의룡율사義龍律師가 중창한 이래 1647년(인조 25)에 화재로 소실된 후 화재와 중건을 반복하다가 1897년(고종 34) 경에는 폐사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사진 4. 청암사 천왕문의 사천왕상 그림.

 

송림 사이로 난 길을 걷다 보면 천왕문天王門을 만난다. 천왕문이 서 있는 곳 옆에는 회당비각晦堂碑閣, 대운당비각大雲堂碑閣, 사적비事蹟碑 그리고 여러 공덕비 등이 서 있는 비림碑林이 있다.

회당비각 안에는 귀부龜趺와 이수를 모두 갖춘 회당[원래의 호는 회암晦庵 즉 정혜定慧(1685~1741)] 대사의 탑비가 있다.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 대사의 법맥을 이은 모운진언慕雲震言(1622~1703) 대사를 이어 당대 화엄종주로 활약한 이가 정혜대사이다. ‘유명조선국불영산쌍계사정혜대사비명병서有明朝鮮國佛靈山雙溪寺定慧大師碑銘幷序’라는 비제碑題로 시작하는 비문은 영조 20년 1744년에 우의정 조현명趙顯命(1690~1752) 선생이 짓고, 영의정을 지낸 서종태徐宗泰(1652~1719) 선생의 아들이자 좌의정과 판중추부사를 지낸 서명균徐命均(1680~1745) 선생이 썼다. 

 

사진 5. 정혜대사비.

 

경상도관찰사(1730.7.~1732. 10.)를 지내기도 했던 조현명 선생은 정혜대사의 진영眞影에 찬讚도 지었는데, 학문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뛰어났다. 정혜대사와의 관계를 보면, 그의 사촌동생인 조구명趙龜命(1693~1737) 선생이 정혜대사와 오랜 친분을 유지하였다. 그는 일가친척들이 권력을 잡고 출사할 때에도 과거시험의 폐단을 비판하며 출사를 거절하고 다방면의 지식 탐구에 힘썼다. 서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조현명 선생이 이 비문을 지었을 때는 조구명 선생은 이미 7년 전에 세상을 하직한 후였다. 서명균 선생은 해서楷書에도 뛰어나 많은 비석의 글씨를 썼다. 쌍계사의 정혜대사의 비는 현재는 청암사의 사역에 서 있다. 쌍계사가 폐사되면서 그 비를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회당비각의 편액은 성당 선생이 썼다. 대운당비각에는 대운당 금운金雲(1868~1936) 화상의 비가 서 있다.

 

독립운동에 참가한 청암사 스님들

 

1919년 3·1독립운동이 요원의 불길로 번져갈 때 청암사의 승려들은 시위에 참가하여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3·1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3만 장을 인쇄한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서 나누어 맡아 전국으로 배포하기로 했는데, 그중 불교 측에서는 1만 장을 배포하기로 하여 범어사梵魚寺, 해인사海印寺, 통도사通度寺, 동화사桐華寺 등으로 전달되었고, 해인사에서는 1만 장을 더 인쇄하여 시위 현장에서 뿌렸다. 다들 목숨을 내놓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한 일이다.  

 

사진 6. 퇴경당 권상로 화상.

 

그런데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는 당시 31본사 주지 대표이던 이종욱李鍾郁(1930~1945) 화상의 주도로 일본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제祭를 봉행하고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당시 김태흡金泰洽(1899~1989) 화상도 권상로權相老(1879~1965) 화상과 함께 시국강연에 참여하여 일본의 군국주의적 침략을 지지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사진 7. 왼쪽부터 대운당비각, 회당비각, 청암사사적비.

 

일본제국주의의 억압적인 통치 아래에서 꺼져 가는 조선의 불교를 지키고자 한 생각 하에서 이런 행보를 했을 수도 있겠지만, 불교에 대한 열정도 많고 공부도 많이 한 두 화상의 뛰어난 능력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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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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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현우님의 댓글

이현우 작성일

청암사 사적비 비문을 찬한 자는 혜근스님 이라고 사적비에 쓰여 있습니다
퇴경당 권상로가 왜 등장하는지 도대체 알수 없네요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댓글의 댓글 작성일

지적 감사합니다. 필자를 통해 해당 내용을 확인하고 지적하신 바의 오류를 확인하였습니다. 필자를 통해 해당 부분을 수정하였습니다. 꼼꼼히 내용을 읽으시고, 오류를 바로 잡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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