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법난의 수습과 성철스님 종정 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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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3 년 3 월 [통권 제119호] / / 작성일23-03-03 12:07 / 조회150회 / 댓글0건본문
고우스님은 만 44세 되는 1981년 새해를 뜻밖에 서울 조계사에서 맞이했다. 20년 전 삶에 큰 회의를 품고 죽을 생각으로 깊은 산속 암자로 들어갔다. 하지만 불교의 지혜를 만나서 마음을 바꾸고 깨달음을 향해 참선 수행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치욕적인 법난法難을 당하여 수습을 위해 서울로 가서 총무원 살이를 석 달째 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조계종 종헌 개정을 이루다
법난의 수습과 조계종 개혁에서 최대 과제는 종단 운영의 새 틀을 짜는 ‘종헌宗憲’ 개정 문제였다. 조계종의 ‘종헌’이란 국가로 비유하자면 ‘헌법憲法’과 같은 것이다. 조계종단 운영의 근본 질서를 규정하는 것이 ‘조계종 종헌’이다. 그런데 당시 국가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조계종의 힘이 한곳으로 모이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권한을 분산시키는 교구본사 중심제로 종헌 개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수좌들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고우스님은 본사 중심제로 종단이 운영될 경우 본사에 부정비리가 생겨나 부패할 경우 통제할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스님은 중앙집권제로 종정과 총무원장 중심제로 종헌 개정을 추진하였다.

그러자 군부에서는 고우스님을 비롯한 수좌들을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협박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수좌들은 중앙집중제 종헌 개정을 추진하였다. 수좌들이 워낙 강하게 나오자 군부는 이간 회유책을 썼다. 자기들과 말이 잘 통하는 총무원 일부 국장스님들을 구슬러 본사 중심제 서명을 비밀리에 받게 하였다. 나중에 보니 종단 원로의원 스님들도 봉암사 조실 서암스님을 빼고는 거의 서명을 받았고 불교중흥회의 의원들도 서명을 받아 내놓았다.
그러나 탄성스님을 중심으로 고우스님, 적명스님, 활성스님 등 개혁파 수좌 스님들은 정교분리 시대에 왜 군인들이 불교 종단 일에 간섭하느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계속해서 군부가 불교 종단 일에 개입하면 수습을 그만두고 산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또한 봉암사 조실 서암스님이 나서서 스님들이 부처님 법을 위하고 종단을 위해야지 어떻게 군인들 말을 듣고 그렇게 할 수 있느냐며 원로스님들을 설득했다. 수좌 스님들의 이런 노력으로 결국 군인들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고우스님은 그때 충격과 배신감이 매우 컸다. 당시 군인들의 꾀임에 넘어가 서명을 주도하던 한 국장스님은 총무부장인 고우스님께 “자기가 원하는 절 주지를 주면 서울에 있는 자기 절을 스님께 드리겠다.”고 거래를 제안하기도 했다. 종단 소임을 공심公心으로 보지 않고 자기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이가 군인들과 내통하는 모습을 보고는 참 한심한 생각이 들었고 크게 실망했다. 그 스님은 결국 훗날 종단 개혁 스님들에 의해 멸빈滅擯(승적을 박탈하여 쫓아냄)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봉암사에서 법난 수습을 위해 서울에 온 수좌들은 똘똘 뭉쳐 총칼을 앞세운 군인들의 간섭과 압력도 막아내며 두 달 만에 종헌 개정을 성취하였다.
신망받는 분들을 본사 주지로 모시다
고우스님이 맡은 총무부장은 본말사 인사권을 가진 곳이었다. 스님은 당시 법난으로 실추된 종단 명예와 분위기 쇄신을 위해 물의를 빚은 본사 주지 스님들에게 사표를 받고는 종단에서 신망 받는 대덕 스님들을 주지로 모셨다. 월정사에 탄허스님, 직지사에 관응스님, 동화사에 범룡스님, 고운사에 근일스님 등 덕망 있는 스님들이 교구본사 주지를 맡게 하였다. 고우스님은 총무원장 탄성스님과 상의하여 이렇듯 수행과 교화에 사표가 될 분들을 교구본사 주지로 모시어 종단 분위기를 쇄신했다.

또한 현대 조계종단 역사에서는 처음으로 출가하는 스님들의 수계 절차를 규정한 단일계단법을 제정해서 초대 전계대화상으로 자운스님을 추대하고 1981년 2월 27일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단일계단 수계식을 최초로 거행하였다. 이전에는 스님들이 출가하여도 각 본사와 말사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출가 수계를 관장하던 것을 조계종단 차원으로 통합하여 수계식과승적 관리를 시작한 것이다.
이것도 종단 역사에서 처음 있는 획기적인 불사였다. 이렇게 하여 조계종단은 법난으로 실추된 위상도 회복하고 새롭게 제도를 정비하여 수행자의 수계 체계도 단일화하는 체계를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총무원 살림도 알뜰하게 살았다. 총무원 스님들에게 다방 출입을 금하고 공양도 절에서 하게 하니 자연스럽게 조계사와 총무원 스님들의 청정성도 회복되고 여법한 위의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불필요한 경비를 줄여 재가 종무원과 불교신문 기자들 월급도 올려 주고 불교신문도 발행하게 된 것이다.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우스님을 비롯한 수좌 스님들은 밤낮없이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루었다. 마지막 남은 것은 후임 종정과 총무원장을 잘 선출하는 일이었다.
현대 불교사에서 10·27 법난의 의미
1700년 한국불교 역사에는 많은 법난이 있었다. 특히 조선조에 들어 500년간 지속된 숭유억불시대에 불교는 참으로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개화기에 겨우 숨통이 트였고, 경허, 용성 선사와 같은 걸출한 선승들이 출현하여 선풍禪風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나아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침탈에 맞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며 봉암사 결사와 승단 정화운동을 통하여 한국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1980년 10·27법난은 다시 한번 불교에 큰 시련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강철은 용광로에서 제련이 되고, 땅은 비 온 뒤에 단단해지는 법이다. 한국불교는 이런 법난과 시련을 통해서 다시 일어나야 했다.

고우스님은 봉암사 수좌 도반들과 함께 조계사로 와서 법난의 수습과 종단 바로 세우기 불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총무원 총무부장 소임을 맡아 수좌 도반들과 함께 공심公心으로 각고의 정진을 다하였다. 비록 2개월의 짧은 기간이었고, 군사정권의 집요한 간섭과 이간책에도 불구하고 총무원 중심의 중앙집중제 종헌을 개정하여 수습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981년 새해에는 새 종헌에 의거하여 새 종정宗正과 총무원장을 선출할 때가 되었다. 다만 한국불교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종정에는 불자들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존경하는 사표師表가 될 분을 모시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1981년 새 종정에 성철스님을 추대하다
조계종 종정은 원로회의에서 선출했으니 새 종정을 모시는 것은 원로 스님들의 뜻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원로 스님들 중에 석주스님과 서암스님, 그리고 자운스님은 당시 종단이 큰 위기 상황이니만큼 종정은 불자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신망을 받는 분을 모셔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리하여 적임자로 해인총림의 방장 성철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자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다. 물론 자천타천으로 몇몇 훌륭한 스님들이 거론되었지만, 성철스님을 추대하자는 데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성철스님은 종정 자리를 거절하셨다. 당신이 출가해서 참선하면서 일체의 자리에 나서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주스님, 자운스님, 서암스님, 광덕스님 등 여러 원로스님들이 찾아가서 강하게 설득했다. 특히 자운慈雲(1911~1993) 스님은 성철스님에게 사숙師叔이 되는 어른이나 봉암사 결사를 시작한 4인의 결사 도반이었고, 또 1966년 성철스님이 문경 운달산 김용사에서 해인사 백련암으로 들어오게 하였으며, 총림이 만들어지자 초대 방장으로 추대한 주역이었다. 이런 인연의 자운스님은 거절하는 성철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종단이 어려운 때이니 스님은 이름만 걸어 두라.” 그러자 성철스님은 하는 수 없이 “일체 자리에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는 수락했다.

이렇게 하여 1981년 1월 10일 조계종 원로회의는 종정에 해인총림 방장 성철性徹(1912~1993) 스님을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그리고 새 총무원장에는 마곡사 주지 성수性壽(1923~2012) 스님을 선출했다. 당시 봉암사 조실 서암스님은 후일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981년 정초, 한국 불교는 드디어 성철이라는 거대한 정신적 스승을 탄생시키며 깨어났다.”
- 『서암큰스님 회고록 _ 그대 보지 못했는가』, 정토출판,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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