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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 저편 티베트 불교]
히말라야 산속의 기인화가 니콜라스 로에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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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현  /  2023 년 3 월 [통권 제119호]  /     /  작성일23-03-03 12:22  /   조회1,82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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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려 62시간을 달려서 인도 히마찰고원의 휴양도시 마날리(Manali)로 간 이유는 오직 한 가지이다. 내 그림인생의 유일한 멘토인 한 인물에 헌화 분향하기 위해서였다. 

 

숙명적인 인연담

 

그는 바로 러시아 출신의 불세출의 기인화가, ‘니콜라스 로에리치(Nicholas Roerich, 1874~1947)’ 때문이다. 러시아 원어로는 ‘니꼴라스 뢰리히’ 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그가 열반한 해에 내가 태어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젊어서부터 그에 대한 어렴풋한 환상에 시달렸다.

 

사진 1. 로에리치미술관 앞에 있는 로에리치 부부 동상.

 

그는 여기 히말라야 서남부 기슭 나가르(Naggar) 마을에 정착하여 20년을 살면서 인상적인 작품들을 남겨 놓고 여기에 잠들어 있다.

 

마날리와 나가르 마을 사이로 흐르는 베아스(Beas) 강 다리를 건너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사과가 탐스럽게 주렁주렁 달린 과수원 사이로 난 언덕길을 한참이나 오르니 정상에 아담한 기념관이 보였다.

 

사진 2(상). 로에리치 부부의 저택이자 미술관 전경. 사진 3(하). 로에리치미술관 지도

 

정말 오랫동안 벼르던 곳이 정작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의 감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나는 티베트 불교적인 관점에서 전통적인 ‘윤회론’을 믿기 때문이다. 그와 내가 어떤 인연의 고리를 갖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아주 오래 전 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기에 나는 지금도 붓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사진 4. 로에리치미술관 내부. 

 

물론 나는 그림에 전념하지 않고 타고난 역마살이 시키는 대로 일생의 대부분을 나그네로서 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슴속에서 그림을 아주 놓지는 않고 살아 왔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티베트적이고 히말라야적인 삶과 철학 그리고 예술에 이르기까지 그와 나 사이에 이어진 인연의 실타래는 도대체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인가?

 

사진 5. 로에리치가 그린 본인 자화상.

 

그래서 이 평생의 화두를 풀기 위해서 그의 체취가 진하게 배어 있는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먼저 그의 무덤가로 내려갔다. 키 큰 히말라야 소나무 아래 분홍색 목백일홍 사이로 아랫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그와 그의 사랑하는 부인 헬레나(Helena)도 같이 잠들어 있다.

 

로에리치미술관

 

나는 먼저 그의 무덤과 부부의 동상에 참배를 하고 다시 기념관으로 올라왔다. 잘 가꾸어진 정원의 벤치에 앉아 아스라히 솟아 있는 히마찰 히말라야의 하얀 능선을 바라다보았다. 문득 로에리치가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어디선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만큼 70여 년이란 ‘깔라짜크라(Kalachakra)’, 즉 ‘시간의 수레바퀴’라는 시간적 공간은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는 듯하였다.

 

사진 6. 로에리치가 즐겨 그린 까규파의 완성자 밀라레빠의 설산수도상.

 

마침 불어오는 시원한 솔바람에 정신을 차리고 현실세계로 돌아와 잘 가꾸어진 정원 속에 자리 잡은 소박한 목조 2층 전시실로 들어섰다. 몇 개로 나누어진 전시실에는 초기에서 만년의 작품들까지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몇몇 작품들은 이미 도록으로 보아 왔던 것들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그림들도 많았다.

 

사진 7. 『십만송』의 저자이며 뛰어난 밀교승인 밀라레빠의 설산수도상.

 

그런 세기적인 명작들을 코앞에서 바로 보는 느낌은, 가슴 터지는 감격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관람객이라고는 달랑 나 혼자뿐이었기에 작품에 대한 집중도는 더욱 강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공개되지 않은 타인의 비밀스런 방을 훔쳐보는 것 같은 내밀한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림들을 흝어 나갔다.

 

불교적 명상화의 개척자

 

로에리치의 평가는 실로 다양하다. 근·현대적 노마디즘(Nomadism)의 선구자인 탐험가, 고고학자, 히말라야의 신비를 그린 화가, 그리고 티베트 문화, 종교, 철학적 사유를 작품에 잘 반영한 수행자, 깨달은 도인 등등이다. 그리고 한때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 국제적인 인물이지만 무엇보다 수많은 걸작을 남긴 기인적인 풍모의 화가의 인상이 두드러진 인물이다.

 

사진 8. 로에리치가 즐겨 그린 소재인 티베트 고승. 가장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는 대표작 중의 하나로 눈 푸른 납자의 선기가 엿보인다.

 

그는 히말라야권의 자연과 문화에 심취하여 만년에는 20여 년 동안 이곳 뚤루 계곡의 나가르 마을에서 살았다. 가끔 티베트권 마을과 사원 등을 여행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또한 라다크 해미스(Hemis) 사원에서 ‘토마스 복음서’라고 전해지는 고대 필사본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즉 예수님이 동방에서 불교수행을 했다는 사실을 발표하여 세기적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티베트불교 까규파의 성자 밀라레빠, 붓다, 예수를 비롯한 위대한 성자들의 수행 모습을 즐겨 그렸다. 

 

사진 9. 라다크의 스피톡(Spitok) 사원 스케치.

 

그러나 내가 그를 주목하고 내 그림의 멘토로 삼고 있는 대목은 무려 한 세기 전에 티베트적인 속살을 누구보다도 일찍 발견하고 그것을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화폭 위에 남겼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티베트 풍이 강한 만년의 작품들 앞에서는 한참이나 눈길을 거둘 수 없었다. 이들 작품들은 히말라야 설산의 전통적인 소재들이 다양한 하늘 색깔 아래서 저마다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때로는 황량한 대지 속에 살고 있는 뭇 중생들을 보살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그만의 독특한 언어로 풀어내는 따듯한 작품들을 보면서 그야말로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그동안 내가 그렇게도 그리고 싶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10. 어느 티베트의 사원.

 

아무튼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받는 첫 번째 느낌은 ‘선기禪氣’라기보다는 ‘영기靈氣’에 가까운 기운이 가득하다는 점이다. 이 대목은 불세출의 여타 거장들이 ‘편년체 미술사’를 쓰기 위한 수단으로 단지 시대적 선두 주자라는 이유로 거장 대접을 해 주는 것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띠는 대목이다. 깊은 영혼은 없고 단지 시대적으로 앞선 1등만이 거장 대접을 받는 지금의 상업적인 미술사조와는 담쌓고 자기의 영혼을 그림으로 남긴 로에리치, 그야말로 진정한 그리고 위대한 화가가 아닐까?(주1)

그것은 로에리치가 만년에 티베트와 라다크를 여행하면서 경험한 티베트불교 신앙체계를 자신의 수행으로 승화시켜 자신이 이미 고승의 영적차원을 터득했을 것이기에 가능했던 대목이 아날까 생각된다.

 

사진 11. 로에리치가 멀리 카일라스산까지 순례를 했다는 사실은 그가 영적인 구도자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로에리치에 매료된 사람들이 한두 명이었겠느냐마는 미국의 판타지 소설가인 하워드 러브크라프트(H.P Lovecraft)만큼 광적 마니아도 드물 것이다. 그는 로에리치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광기의 산맥 속에』라는 베스트셀러를 집필하였다. 몇 줄 인용해 보면 아래와 같다. 

 

사진 12. 로에리치가 즐겨 사용한 물감인 ‘템페라(temperare)’를 어렵게 구하여 필자도 사용해 보고 있다.

 

“황량한 산맥 정상에는 간혹 혹독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요란한 바람소리는 때론 거칠면서도 음역이 대단히 넓은 신비의 피리소리를 연상시켰는데, 인간의 잠재의식을 일깨우는 듯한 섬뜩한 화음을 들으며 나는 왠지 마음이 불안해져 막연한 공포에 떨기도 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언젠가 본 니콜라스 로에리치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은자로서 살아간 만년생활

 

미술관의 2층은 로에리치 부부의 생활공간이었는데 방문객의 출입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창문을 통해 거실은 들여다볼 수는 있게 배려는 해 놓았다. 마치 부부가 모닝커피를 막 마시고 정원으로 산책을 나간 것 같은 그런 거실 분위기를 연출해 놓았다. 2층 테라스에서는 아래 정원에서 보던 것보다 전망이 훨씬 스펙터클하게 드넓고 시원하였다. 

 

사진 13(좌). 로에리치 부부가 살았던 거실. 사진 14(우). 미술관 2층 베란다에서 선물로 받은 도록을 품에 안고 있는 필자.

 

그들 부부는 세계대전 전후의 암울한 고국 러시아를 떠나 세상을 떠돌다가 도착한 곳이 바로 여기 히말라야 산기슭이었다. 아마도 그들 부부는 이곳이 티베트불교의 이상향인 삼발라(Shambhala)라고 생각하여 이 산골짜기에 정착했다고 보인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은 노을 지는 이 테라스에 앉아 설산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차 한 잔 마시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그들의 행복을 찾은 것이 아니었을까?

 

사진 15. 로에리치미술관에서 바라보는 꿀루 계곡과 히말라야 능선.

 

<각주>

(주1) 그의 그림들은 로에리치 미술관(www.roerich.org)에서 검색할 수 있으니 관심 있는 마니아들은 들어가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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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현
현재 8년째 ‘인생 4주기’ 중의 ‘유행기遊行期’를 보내려고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로 들어와 네팔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틈틈이 히말라야 권역의 불교유적을 순례하고 있다.
suri116@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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