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메이지 초기의 중국 포교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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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3 년 4 월 [통권 제120호] / / 작성일23-04-05 09:07 / 조회2,156회 / 댓글0건본문
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27 |마츠모토 핫카 ②
지난 호에서는 마츠모토 핫카松本白華(1839~1926)의 유럽 시찰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1873년 8월에 귀국한 핫카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배려로 교부성에서 다시 근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1877년 1월 교부성이 폐관되면서 실직하게 된다. 교부성이 폐관된 데에는 1875년 2월에 진종의 4대 교파가 대교원大敎院을 이탈하면서 대교원이 해산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신도와 불교의 합병은 금지되고 그리스도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간 신불합병의 입장이던 교부성은 존재 이유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폐관의 수순을 밟았다.
핫카는 부서를 옮겨서라도 메이지 정부에서 일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연이 있었던 에토 신페이江藤新平가 정한론征韓論에 패배해 하야했고, 산죠 사네토미三条実美 역시 정한론으로 인해 곤경에 처해 있었다. 핫카는 자신을 발탁했던 오쿠보 도시미치에 대해서 ‘모공, 나를 발탁하고 교부성 관리에 임명한....’으로 기록했을 뿐 더 이상의 언급을 삼갔다. 그의 글로 미루어 오쿠보 역시 핫카를 끌어줄 의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실직 후 핫카는 정토진종 상하이 별원으로 건너가 포교활동을 하며 약 1년 6개월간(1879년 귀국) 머물렀다. 이 사이 메이지유신의 주역이었던 오쿠보가 암살당하고, 근세 최고의 한문학 학교로 불리던 함의원咸宜園이 폐쇄되었다. 이로써 핫카는 자신의 함의원 인맥을 모두 잃게 되었고, 이는 핫카의 정부관료 진출이 막히는 것을 의미했다.
메이지 초기 동본원사의 포교활동
메이지 10년(1877)은 핫카에게 있어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1월에 교부성에서 실직했고, 바로 진종 본산에 사죄의 편지를 보내어 승적을 복귀시켰다. 6월에는 서남전쟁西南戰爭(구마모토, 카고시마 등에서 일어난 토족들의 반란)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출장을 갔다. 그리고 그해 9월 상해로 건너갔다.
핫카가 건너간 메이지 초기의 중국 포교는 어떠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정토진종 동본원사의 개혁의 방향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본원사의 개혁은 본산 개혁, 해외 종교상황 시찰, 번역국 개설, 영국에 유학생 파견, 금교지禁敎地 및 해외포교, 교육제도 개혁 이상 6가지로 압축된다. 이중 핫카는 해외시찰과 해외포교에 참여했다. 번역국과 유학생 파견은 산스크리트 연구를 위한 것이었고, 금교지 및 해외포교 대상은 일본 국내의 홋가이도· 카고시마·오키나와·시마네와 해외의 중국과 조선이 포함되었다.
가장 먼저 중국 포교를 위해 건너간 이는 오구루스 코쵸小栗栖香頂(1830∼1905)이다. 그는 메이지 6년(1873)에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에 체류하면서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각 지역을 시찰했다. 이후 일본과 중국, 인도의 불교가 3국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티베트 불교와 연계하고 남경을 포교의 거점으로 삼을 것, 아미타여래 이외에도 태신궁太神宮과 공자를 함께 모셔야 한다고 진종 본산에 건의했다.
당시 동본원사 측은 서본원사(정토진종 본원사파) 측과 대립관계에 있었다. 서본원사가 조슈벌長州閥의 에토 신페이와 긴밀한 관계를 맺자 동본원사는 조슈벌에 포함되지 않는 메이지정부 요인과 관계를 강화시켰다. 원래 동본원사와 에토 신페이는 호의적 관계였지만 에토가 자신의 정적인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숙청당하자 동본원사는 에토를 대신해 오쿠보와의 관계를 구축했다.
메이지 9년(1876) 동본원사는 포교영역을 확장해 오키나와와 상해에 별원을 설치했고, 이듬해(1877)에는 부산에서도 포교활동을 개시했다. 중국은 오구루스가, 조선은 오쿠무라 엔신奥村円心이 담당했고, 이들의 성과는 오쿠보에게 보고되었다. 즉, 메이지 초기의 동본원사 포교활동은 오쿠보 도시미치의 의향이 깊게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포교승들은 현지인들과 함께 일본인 거류민들 역시 포교의 대상으로 삼았다. 메이지 초기의 주요활동은 설법과 불사, 장례, 의료, 교육, 묘지관리 등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메이지 후반에 이르면 이러한 포교내용은 현지인이 아닌 거류민들로 대상이 바뀌게 된다.
시문 교류와 서적 배부를 통한 중국 포교
메이지 10년(1877) 10월 4일, 핫카가 상해 별원에 도착해서 맡은 업무는 종무와 일본인 유학생 감독, 서적 자료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핫카는 청말 거사불교의 중심에 있던 양인산楊仁山을 접견하고 그에게 런던에서 유학하고 있는 난조 분유南條文雄를 소개했다. 또한 핫카와의 교류를 통해 불교신자가 된 소주의 허령허許霊虗 등을 만났다. 허령허는 이후 오구루스 코쵸의 『진종교지眞宗敎旨』를 자비로 복각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중국[청] 조정으로부터 정식적인 포교활동을 허락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포교승들은 각 지역의 유지들이나 지식인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의 초기 포교단계에서는 한시漢詩 교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핫카 역시 시를 통해 상해 문인들이나 불교학자들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핫카의 저서 『잡록雜錄』, 『서당시고西塘詩稿』, 『서당정축시고西塘丁丑詩稿』에는 이 시기의 기록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잡록』은 교토에 상경해서부터 교부성이 폐관될 때까지 작성한 한시와 상해 별원의 회계장부와 규칙, 상해 별원이 출판한 서적들의 자료 등이 기술되어 있다. 『서당시고』는 유럽에서 귀국(1873)한 이후부터 1875년경까지의 한시들을 수록했다. 권두에는 청말 문인인 진만수陣曼壽(진종 본산 중국어 교사), 전자금錢子琴, 장문호蔣文虎(상해 별원 상해어 교사), 왕야매王冶梅 등 모두 동본원사와 관련 있는 중국인들의 서문과 서평을 실었다.
권말에는 핫카 자신이 발문을 작성해 모상린과 제옥계를 알게 된 경위와 전자금의 문장과 명성을 소개했다.
『서당정축시고』는 교부성이 폐관된 이후부터 상해 도착 직후까지의 한시들을 수록했다. 여기에는 상해 문인인 양경홍梁景鴻과 모상린毛祥麟이 발문과 서평을 적었다. 핫카의 시에 대해 진홍고陳鴻誥는 “글이 방대하고 기운이 청아하다. 격률格律이 엄격하다.”고 적당히 총평했다. 모상린은 “글에 오자가 있다”는 평을 남기는 등 핫카의 시는 상해 문인들에게 크게 평가받지 못한 것 같다.
이와는 별개로 『잡록』에는 흥미로운 기술들이 있다. ‘메이지 11년(1878)1월 경비, 6원 설교 제78호 백부 인쇄제본’, ‘메이지 11년 4월 경비, 9엔 50전 설교 제1호 제판’. 여기에서 설교는 상해 별원이 간행한 「진종설교」를 말한다. 당시 일본영사관은 영사관 내에 어학교를 설치해 일본인 유학생들에게 중국어 교육을 실시했다. 동시에 별원에서는 중국인을 고용해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 설교를 했다. 이때 사용한 설교는 일본 포교승들이 한문으로 문장을 작성하면, 고용된 중국인 혹은 중국 문인들이 한문을 토대로 설교를 한 것이다. 나아가 「진종설교」를 매달 발행해서 중국인에게 배포했다. 메이지 초기의 포교는 대개 이와 같은 수순으로 이루어졌다.「진종설교」의 내용은 우선 불교와 정토진종의 교의에 대해 한문으로 간결하게 기록하고, 『무량수경』 등 정토계 불전과 함께 논어·맹자·시경·중용의 내용을 함께 실었다. 여기에는 오구루스 코쵸가 진종 본산에 아미타여래와 함께 공자도 함께 모셔야 한다는 건의가 받아들여진 결과이다.
즉 중국 포교는 중국 상황에 맞춘 설교와 교재가 사용되었다. 별원은 한 발더 나아가 당시 정토진종이 국내 상황에 맞춰 주창한 ‘왕법위본王法爲本·진속이체眞俗二諦’를 「진종설교」에 포함한 점은 흥미롭다. 이외에도 상해 별원은 같은 시기에 『일본외사日本外史』(1879)를 출판했다. 이 책은 청말 문인인 전자금이 서평을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인들은 모두 중국의 책을 읽지만 나는 아직 일본 책을 읽지 않았다. 일본 역사책을 읽으려 해도 잘못된 글자가 난해하고 읽기도 전에 잠이 온다. 이번에 『일본외사』를 받아보니 모두 22권으로 …… 사적이 빠짐없고 오기육도의 풍토와 인정이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문장은 매우 능숙해 생각한 대로 이루어졌다. 서사는 간결하고 분명하고 논의는 깔끔하게 지나가며, 칭찬과 헐뜯음도 희미하게 드러난다. 진정으로 뛰어난 역사가의 재능이 있고 본보기가 될 만한 문장들이 가득하다.”
『일본외사』 역시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일본 역사서로 이후 일본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을 심화하는 계기가 된 서적이다. 핫카는 『일본외사』 출판에 대해 자신의 『잡록』에 출판 비용과 전자금에게 보내는 사례금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핫카의 행보를 보면, 그는 학자보다는 행정가 혹은 관료에 가깝다. 메이지 시기 일부 승려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핫카와 유사한 여정을 걸었지만, 핫카의 경우 유독 관료적 성격이 강한 포교승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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