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신불교를 통해 제3의 길을 개척한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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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3 년 4 월 [통권 제120호] / / 작성일23-04-05 09:25 / 조회2,131회 / 댓글0건본문
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28 | 웅십력
중국 근대시기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였다. 서양 문화와 사상의 침입과 충격에 맞서 중국의 전통철학은 다양하게 대응하였다. 특히 불교는 다음 세 가지 방식으로 대처하였다.
불교·유학·서양철학을 합친 제3의 길
첫째는 유식불교의 등장이다. 당시에는 유식불교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일어났는데, 지식인들 중 유식불교에 탐닉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칸트나 헤겔 등 서양 관념론 철학이 중국에 소개되고, 전통철학은 인식론이나 논리적인 부분이 약하다고 비판받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서양 관념론 못지않은 인식론과 논리로 무장한 동양의 관념론인 유식불교가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구양경무歐陽竟無 등 유식불교의 부활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유식불교의 이성적·사변적인 논리 정신을근대 이후 서양철학의 유입에 대응하는 최상의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이들은 특히 근대성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둘째는 전통불교의 옹호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해서 기원 전후에 중국으로 들어온 뒤 한국·일본 등 동아시아로 전파되었고,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 전통불교는 인도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천 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중국화한 불교인데, 그 핵심적인 내용은 연기론의 변화이다.
인도불교의 연기론이 진상심眞常心, 진심眞心, 또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사상으로 변화하였다. 현상계의 모든 현상이 진심, 또는 진여에 의거하여 생겨난다고 보는 이 변화된 관점을 ‘진여연기론’이라고 한다. 중국 전통불교는 진여연기론에 근본을 두고 있고, 태허太虛 등 전통 불교학자들은 이것이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동양의 우수성의 근거라고 보았다.
셋째는 불교의 유학화이다. 유식불교와 전통불교를 옹호하는 학자들 간의 논쟁은 많은 철학적 논의를 불러일으켰고, 보다 독창적인 제3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불교와 유학, 그리고 서양철학을 융합하여 현대신불교, 또는 현대신유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근대철학을 제기하였다.
현대신불교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독창적인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웅십력(슝스리, 熊十力, 1885~1968)이다. 서양 제국주의가 아무리 동양을 침범해도 동양의 바탕은 불교의 불성론佛性論·유학의 성선론性善論을 통한 인간 긍정에 있으며, 동양은 결국 도덕의 측면에서 서양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이런 입장의 요지였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현실세계 외에 피안의 또 다른 세계는 없으며, 이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도덕적 행위는 최대의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여기에 반외세·반봉건의 사회적 실천을 더한 것이 제3의 불교인 현대신불교이다.
서양으로의 전환이 역사 발전의 필연인가?
당시 사상계에는 두 가지 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이들 논쟁은 웅십력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첫째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 성격을 다루는 ‘동서문화 논쟁’, 둘째는 과학과 형이상학을 같은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는가를 논하는 ‘과학과 형이상학 논쟁, 또는 과학과 인생관 논쟁’이다.
이 논쟁들은 근대 시기에 서양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발생하였고, 철학, 종교 등에 중요한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당시에도 물론 서양 세력과 문화를 무조건 배척하는 완고한 보수파도 있었지만, 서양 세력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식민주의의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이들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였다.
서양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여 중국을 근대화시키려는 근대화 운동은 당시 상황에서는 피할 수 없는 조치였다. “힘 있는 서양의 학문을 배우자!”는 민족주의적 노력은 가혹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방법이었고, 그것은 과학 기술, 정치, 문화라는 세 단계에서 양무운동 → 무술변법·신해혁명 → 5·4 운동의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났다.동서문화 논쟁은 동서 문화의 본질에 관한 논의로, 당시 지식인들은 동방문화파와 서방문화파로 나뉘어 대규모 논쟁을 진행하였다. 동방문화파는 동양 문화를 우월한 정신 문화로, 서양 문화를 저급한 물질 문화로 파악하여 동양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동방문화파는 서양을 정신성이 없는 물질문명으로만 매도하였고, 동양이 서양에 비해 물질적으로 뒤떨어진 것이 마치 정신성에만 치중했기 때문인 것으로 합리화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전통문화와 전통철학의 가치를 높임으로써 민족주의적 자존심을 북돋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서방문화파는 동양 문화는 아직 고대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대의 유물이고 서양 문화만이 진정한 근대 문화라고 보았다. 사회는 당연히 고대 문화에서 근대 문화로 발전해 가는 것이므로 동양 문화는 무조건 서양 문화로 이행하는 것이 역사적 필연이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동양은 전적으로 서양 문화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입장으로 이어졌다.
중국 근대불교의 독창적인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웅십력은 동양 문화를 우월한 정신 문화로 파악하는 면에서 동방문화파에 속하며, 동양의 도덕을 바탕으로 서양의 과학 문화를 조화해야 한다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의 맥을 계승하였다. 전통철학의 입장에서는 서양 근대사상이 침범해 들어온다고 해서 무조건 전통을 버리고 서양 문화만을 추종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렇게 하고자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전통을 전적으로 없애면 중국 자체의 정신성이 사라져 버릴 것이고, 또 서양이 최상의 가치를 가졌다고 여겨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한 참사가 그 한 예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서양과 동양의 좋은 점만을 뽑아서 새로운 중국의 길을 개척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중체서용론이 바로 동양의 정신성, 서양의 물질성을 다 받아서 조화시키는 방법이었다.
철학사상·종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특히 이 길을 선호하였다. 유식불교의 부흥을 주장하는 구양경무나 전통철학을 중시한 태허, 불교와 유학, 서양철학을 합쳐 새로운 독자적인 길을 모색한 웅십력, 이들 모두가 동서문화 논쟁에서 동방문화파의 주장을 수용하였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손중산을 중심으로 한 민주혁명파는 5·4 운동 이후 좌파는 마르크스 주의에 접근하게 되었고, 중간파는 대개 동방문화파로 연결되었다.
과학과 형이상학(철학)이 같은 길을 갈 수 있는가?
과학과 형이상학 논쟁, 또는 과학과 인생관 논쟁은 과학과 형이상학, 과학과 인생관의 관계를 놓고 과학파와 현학파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현학玄學(=형이상학)파는 기본적으로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하는 인생관에 근거해 있고, 과학파는 과학적 인생관에 근거해 있었다. 현학파에 따르면, 사람의 인생관은 결코 통일될 수 없고 계속 변화하는 것이며 살아 있는 것[活] 그 자체이다. 우리의 삶은 쉬지 않고 변화하며, 개별적인 것이어서 하나의 것으로 통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학파는 이러한 입장이 세계를 ‘본체와 작용의 일치[체용불이體用不二]’라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송명 성리학의 전통에 서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나아가 철학과 과학의 영역을 확연히 구분하여, 가치 세 사진 5. 중국 신문화운동의 두 기치인 민주주의와과학을 다룬 잡지 『新靑年』.계는 철학의 영역일 뿐이고 과학은 철학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원론은 과학파의 ‘과학만능주의’에 대항하려는 논리적 기초를 구성한다. 과학이 만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물질 영역에 제한된다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시기에 중국인들이 파악한 서양 문화의 핵심은 실용적인 ‘과학’과 봉건제를 반대하는 ‘민주주의’였기에 과학과 형이상학 논쟁은 더욱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5·4 신문화운동 때에는 서양의 과학, 즉 사이언스(science)를 ‘새선생赛先生’이라고 부르고, 민주주의, 즉 데모크라시(democracy)를 ‘태선생泰先生’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당시 ‘새선생’과 ‘태선생’, 이 두 선생은 중국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이 두 분의 선생을 모셔 오는 것이 중국 근대화의 첫 번째 과제였다.
이처럼 과학만능주의자들이 즐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현학파들이 정면으로 반대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 과학과 기술 문명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파는 이들 현학파에 대응하여 인생관도 경험으로 환원될 수 있고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과학적 방법·과학적 태도·과학 정신에 기초한 과학적 인생관을 성립시켜야 함을 주장하였다.
과학파는 현학파의 주장이 본체론이라는 ‘검증불가능한 영역’으로 도망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형이상학적 본체론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감각 범위 밖에 있는 어떠한 정신 실체나 물질 실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증거를 제시할 수 없는 본체론은 모두 신앙·교조·미신에 불과하다고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오죽하면 현학파들을 ‘현학 귀신들’이라고 폄하해서 불렀겠는가.
동방문화파와 현학파를 계승한 웅십력
웅십력의 불교사상은 기본적으로 현학파의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현학파가 웅십력이 주장하는 ‘본체와 현상의 불이不二[體用不二]’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과학파는 ‘현상은 우주의 본체’라고 주장하는데, 이 말은 주체의 직접적 감각지 외에 모든 것은 실재성이 없다는 것이다. 과학파의 이러한 실증주의 관점과는 상대적으로 현학파는 물질 현상 배후에 신비한 우주 본체가 존재하며, 이 본체는 과학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과학파는 실재를 현상으로 귀결하고 현상을 감각으로 보아서 물질의 실체를 부정한 반면, 현학파는 실재를 물질 현상 배후의 초경험적인 본체와 같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과학파와 현학파는 모두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체와 현상을 이분한 것이다. 웅십력은 과학파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학파는 실체가 있다고 보지만 현상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과학파와 현학파의 두 관점을 모두 비판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주 본체는 과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인정함으로써 기본적으로 현학파의 입장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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