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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선사상과 서양철학의 접목을 시도한 한국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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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3 년 4 월 [통권 제120호]  /     /  작성일23-04-05 09:43  /   조회2,25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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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28 | 고형곤

 

청송廳松 고형곤高亨坤(1906∼2004)은 박종홍과 마찬가지로 경성제국대학을 나와 서울대학교 철학과의 교수를 역임한 한국 철학계의 1세대 학자이다. 그는 서양철학을 전공하면서도 선불교에 깊이 천착하여 『선의 세계』라는 역저를 펴냈다.

 

철학과 정치를 넘나든 거장의 삶

 

불교를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이해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적 철학’ 연구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한편 국회의원을 지내고 정치 일선에서 뛰는 등 학계와 사회의 벽을 넘어선 과감한 행보를 선보였다. 그렇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그의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대신 아들 고건 전 총리의 인지도가 훨씬 높다.

 

사진 1: 청송 고형곤.

 

고형곤은 1906년 4월 16일 전라북도 임피군 남일면 상갈리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6세부터 15세까지 한학을 익혔고 검정시험을 거쳐 이리 농림학교를 나온 뒤 1928년에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했다. 본과는 법문학부 철학과로 진학을 했고, 1933년 쉘링의 지적 직관을 주제로 한 학부 논문으로 졸업했다. 이후 약 2년간 동아일보에서 근무하다가 경성제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서양철학의 존재론을 공부했다. 당시는 독일에 가 있던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후설, 그리고 철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하이데거가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경성제대 철학과에서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강독했다고 한다.

 

1937년에는 연희전문학교에 부임하여 1944년까지 철학 강의를 담당했다. 이 무렵 그는 키에르케고르의 저술에 탐닉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대가 유일한 대학이었고, 1940년대 전반에는 보성, 연희, 혜화 같은 전문학교만 있었다. 고형곤은 최고 학부를 나와 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당대 철학 분야를 이끈 유망한 학자였다. 

 

이 무렵 그가 주로 관심을 가졌던 서양 철학자는 칸트, 하르트만, 하이데거, 헤겔, 후설 등이었다.해방 후에 서울대 문리과대학 철학과의 교수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칸트, 헤겔 등의 독일 관념론 철학을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하이데거를 주로 강의했으며, 연구도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강의나 연구에서 선불교도 다루어졌는데, 그 성과로 1958년 「선의 존재론적 구명」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초창기 한국 철학계에 서양철학의 최신 조류를 소개하고, 그것을 선불교와 접목시킨 점은 그만의 연구사적 성취였다고 할 수 있다. 1959년에는 전북대 총장에 취임했고, 한국철학회 초대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 등을 역임했다.

 

사진 2. 1966년 민정당 의원 시절 국회에서 질의하는 고형곤. 사진: 중앙일보.

 

고형곤은 50대 후반에 삶의 노선을 완전히 바꾸어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63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민정당 후보로 출마하여 제6대 국회의원으로 4년간 일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에 대해 그는 “미국 예일대학에 1년간 유학한 뒤 여의도 비행장에 내리면서 한국과 한국인의 삶이 미국과 비교해 너무 가난하고 초라한 데 놀라 이제는 철학이고 뭐고 걷어치우고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을 위해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솟구쳤다.”고 술회했다. 5·16 군정 세력에 반대하는 민정당의 사무총장을 지냈고, 민정당을 이은 민중당과 신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그는 한동안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국회의원 시절에 청송장학금을 조성했고, 고려대장경 번역의 의의와 가치를 인정하여 동국역경원의 사업 예산을 늘리는 데 일조했다. 1975년에는 70세의 나이로 내장산에 들어가서 10여 년간 칩거하며 원효 및 현대철학에 관한 저술 집필에 전념했다. 하지만 서울로 상경하는 도중에 아쉽게도 원고를 분실했고, 이후 연구를 지속하며 그 내용을 복구하려 했지만 고령으로 결국 이루지 못했다. 만년에는 『금강삼매경』에 대한 독창적이고 알기 쉬운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2004년 6월 25일 향년 98세로 별세했다.

 

서양철학과 선불교의 만남

 

고형곤이 발표한 논문들은 주로 불교에 관한 것으로 국회위원을 그만둔 직후인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 「선의 존재론적 구명」(1968), 「존재 현전으로서의 자연」(1969), 「해동 조계종의 연원 및 그 조류 - 지눌과 혜심의 사상을 중심으로」(1970), 「현대사조의 전향과 선사상」(1974), 「추사의 백파망증 15조에 대하여」(1975), 「화엄신론 연구」(1977), 「추사의 선관」(1979)이 있고, 이들 논문을 집성한 주저 『선의 세계』(1971, 1995 증보, 2005 개정)로 대한민국학술원 저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진 3. 청송 고형곤의 『선의 세계』(운주사, 1997).

 

박사논문이기도 한 「선의 존재론적 구명」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선불교와 서양철학을 아우르는 독자적 연구를 수행했는데, 특히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선불교에 적용하는 시도를 했다. 예를 들어 「해동 조계종의 연원 및 그 조류」에서는 원효 이래의 통불교 사상을 이어서 지눌의 선교일치를 선양했고, 이후에는 중국, 일본과도 다른 독특한 전통으로 계승되었다고 보고 지눌 등의 사상 내용을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규명하려 했다. 

 

『선의 세계』에 수록된 「선에서 본 하이데거의 존재현전성」에도 이러한 그의 연구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고형곤은 선사상을 현대 서양철학의 존재론을 가지고, 특히 관념론적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존재 현전의 자기 현시를 추구한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에 입각하여 해명하려고 했다. 보조지눌의 돈오점수 등을 존재론적으로 고찰하려 한 것이 하나의 사례이다. 그의 방법론은 스스로 현전하는 존재를 집념이나 망념이 아닌 무념으로, 그대로의 존재를 단적으로 직관해야 한다는 것으로, 망견을 단절하는 무념의 일념에서 존재와 사유가 일치하게 된다.

 

그의 저작인 『선의 세계』는 서양철학과 선불교를 결합한 뛰어난 연구이지만, 내용이 너무 어렵고 전문적이어서 읽기에 쉽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그 주된 이유는 ‘불교를 아는 사람은 후설과 하이데거를 모르고 후설과 하이데거를 이해하는 사람은 선불교를 모르기 때문’으로, 바꾸어 말하면 이 책은 그만이 도달할 수 있는 독보적 경지의 연구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고형곤은 말년에 『금강삼매경』을 번역하며 그 가치를 높이 샀는데, ‘불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이라고 전제하고 『금강삼매경』이야말로 불교의 진리를 온전히 담고 있어서 이를 제대로 읽으면 불교를 이해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19세기 선 논쟁, 추사를 불러내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를 거치면서 불교학계에서는 19세기 선 논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무렵은 사상 면의 내재적 발전론의 시각에서 근대를 지향하는 전통 학술로서 실학이 학술 담론으로 떠오르던 때였다. 그렇기에 19세기의 대표적 학자 중 하나였던 추사 김정희가 불교계의 선 논쟁에 직접 뛰어든 사실은 조선시대 불교에도 사상사의 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논쟁이 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19세기 선 논쟁 연구의 포문을 연 이는 한기두였지만 여기에 철학자 고형곤이 참여함으로써 불씨를 지폈다.

 

1975년에 발표한 「추사의 백파망증 15조에 대하여」는 김정희가 백파긍선의 설을 근거 없

는 잘못된 주장이라고 비판하며 15개 항목에 걸쳐 반박한 편지 내용을 분석한 글이다. 고형

곤은 긍선의 『선문수경』에서 임제 제2구의 삼현三玄을 여래선이라 하고 여기에 법안종, 위앙종, 조동종을 소속시킨 것은 잘못임을 지적하고 임제 삼구로 삼처전심 등을 해석한 것 자체가 당시에 물의를 일으켰다고 보았다. 또 긍선의 삼종선은 조사선과 여래선을 격외선이라 통칭하고 의리선을 별도로 두는 등 전통적 이해와 달랐기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이어 선문 오가를 조사선과 여래선으로 나누어 배정한 것은 모든 것을 하나의 체계 안에 묶어 두려는 긍선의 분류 벽에서 기인한 잘못된 이해라고 결론지었다.

 

사진 4. 고형곤의 생애와 사상을다룬 소광희의 『청송의생애와 선철학』(운주사 2014).

 

1978년의 「추사의 선관」에서는 김정희가 긍선에게 보낸 편지 3통, 또 초의의순과 교신한 편지 38통을 분석하여 추사 김정희의 선에 대한 인식을 재검토했다. 그는 “부처의 말과 뜻이 모두 화두라면 왜 삼처전심에는 한 구의 화두도 나오지 않는가?”라는 김정희의 의문을 들어 설명하고, 김정희가 긍선의 비문에서 “서로의 논란은 세상 사람들이 헐뜯는 것과는 다른 우리 두 사람만이 아는 대목이다.”라고 썼음을 언급했다. 끝으로 김정희의 비판 내용에도 오해나 실수가 있지만 ‘직절입묘直截入妙의 선객禪客’의 면모를 가졌음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고형곤의 이 논문들은 이후 선 논쟁의 의미와 유불 교류를 다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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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서울대 국사학과 문학박사 학위 취득(2008). 저서로 『韓國佛敎史』(2017, 東京:春秋社), 『토픽 한국사12』(2016, 여문책),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임제 법통과 교학전통』(2010, 신구문화사) 등이 있고,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및 한문불전 번역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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