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동족상잔의 참상 속에 닥친 생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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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 2023 년 4 월 [통권 제120호] / / 작성일23-04-05 09:52 / 조회2,211회 / 댓글0건본문
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8 |인환스님 ④
▶ 태평양전쟁 중에 원산중학교 다니셨다고 하셨는데 당시 상황이 어땠습니까?
중학교 때는 학교 수업으로 수영을 배웠어요. 소학교 시절 여름방학 때마다 외가가 있는 남대천에서 놀았기에 수영을 꽤 잘했지요. 또 1학년 때 기계체조를 배웠어요. 주로 철봉, 평행봉인데 자주 하다 보니 선수급이 될 만큼 잘했어요. 1학년 끝날 무렵에 기계체조부 부원, 클럽에 가입했지요. 원산관이라고 하는 극장에서 기계체조 공연을 한 적도 있어요.
해방의 짧은 기쁨과 공산정권의 핍박
2학년에 올라갈 무렵이 2차 대전 막바지여서 전황이 아주 심상치 않았어요. 일본 본토에는 미국의 대형폭격기가 수십 대, 어떤 경우에는 수백 대가 일본의 큰 도시라든지 또는 병기창이 있는 도시를 사정없이 폭격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어요. 그런 데 미국은 문화재와 전통을 지닌 교토京都는 폭격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그대로 보전되었어요. 전쟁을 해도 이러한 문화적인 안목이 있어야 되는데 말이지요. 그러나 일본군으로서는 막바지에 단말마적인 항쟁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게 없이 오만 짓을 다 했어요.
일본 본토가 맹폭격을 받게 되니까 얼마 있으면 우리 조선반도 여러 도시들도 똑같이 맹폭격을 받을 것이라고 했어요. 제가 2학년 때는 그렇게 혼란한 시대였어요. 학교에서는 공부를 안 해요. 공부할 학생들을 모두 근로동원에 차출시켰어요.
전에 말했듯이 근로동원 나간 곳이 석왕사가 있는 설봉산이었고, 6~7명씩 한 방에 합숙시켜 매일 나무 밑둥을 캐러 산에 다녔지요. 그 후 강제로 원산을 떠나 찾아간 곳이 바로 그 산 아래였어요. 한 6개월 산중 생활을 하다가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제 해방이 됐다고 모두 달려나가 춤을 추고 좋아했어요. 참~ 감격스런 일입니다.
이후 한 일주일쯤 지나 가족 모두가 원산으로 돌아왔어요. 그 다음에 이야기들은 공산국가 치하에서 여러 가지 겪은 일들인데, 지금 생각해도 다시 떠오르기 싫은 그런 일들입니다. 모두 알다시피 광복 직후 소련군이 일주일 만에 북한에 들어왔거든요. 김일성이 묻어 들어왔지요. 그 체제에서는 반동분자로 낙인찍히게 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거나, 어디 붙잡혀 가거나, 강제 노동소에 가거나 이런 형편이었지요. 사람들이 불만을 표출하거나, 들고 일어나거나 하는 상황이 아니에요. 공무원, 교사, 예술가 또는 재산이 좀 있었던 사업가, 농촌의 지주들을 모두 반동분자, 반동계급으로 몰았어요.
▶ 당시 스님 가족은 지주계급으로 분류됐겠군요?
우리 어머니 고향이 원산에서 한 20리 쯤 떨어져 있는 농촌인데, 비옥한 땅이 제법 있었어요. 이런 곳에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통지가 옵니다. “땅을 가진 지주는 많은 농민들을 착취한 계급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세월이 바뀌었으니 응당히 응징을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개인이 가진 모든 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몰수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생필품만 챙겨서 100리 밖으로 떠나라는 식입니다. 이런 청천벽력이 없지요. 어쩔 수 없이 소달구지 하나를 겨우 챙겨서 고향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이런 일을 내가 보고 겪었어요. 우리 외가도 그렇게 됐고 나도 그랬단 말이요.
스승이셨던 원허스님 밑에 법홍스님이라는 상좌가 한 분 있었는데, 이 분들도 북한정권을
피해 남으로 오셨어요. 법홍스님은 원허스님의 참회상좌懺悔上座예요. 절에 들어가면 처음에 계 받고 출가할 때 스승이 둘 생깁니다. 하나는 은사恩師 스님이고, 또 하나는 계를 받는 계사戒師 스님입니다. 그러다가 스님 노릇 상당히 하다가 나중에 나의 평생을 지도해 줄 또 다른 스승을 만나면 법사스님으로 모시게 되지요.
이런 인연을 만났을 때 참회상좌가 되는 겁니다. 예전에는 흔한 일이었어요. 그 법홍스님(2003년 입적)이 훗날 부산 금수사에 계시면서 원효종 종정을 지내셨어요. 이 분이 원허스님을 모시고 표훈사에 살았어요. 그런데 아까 얘기처럼 절에 주지를 한 사람은 다 반동계급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그러자 두 스님은 도저히 여기에 있을 수가 없으니 한밤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삼팔선을 넘어왔어요.
▶당시 가족과 어떻게 헤어졌나요?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배경을 먼저 말할까 합니다. 저는 형제가 여덟인데 내가 둘째입니다. 위에 형님은 나보다 네 살 위입니다. 제가 원산상업학교 다닐 때, 형은 그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연세전문학교에 다녔어요. 연세전문은 지금의 연세대학 전신인데. 연희전문학교라고 그랬어요. 그때 형이 2학년이었을 때인데 해방이 됐어요. 그 무렵 고향에 와 있
었지요.
6·25전쟁의 발발과 눈발 속의 1·4 후퇴
6·25사변이 일어났을 때 형이 딱 군대 적령기가 되었어요. 그냥 있다가는 뭐 틀림없이 공산군에 끌려가게 생겼지요. 그래서 형은 저 산속 깊이 숨어 들어갔어요. 전쟁 중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이 북상을 했어요. 평양을 거쳐 이쪽은 원산, 함흥 거쳐서 두만강, 압록강 그 부근까지요. 그때에 징병을 피해 숨어 있던 젊은이들이 이제 유엔군 치하가 됐으니까 전부 나왔어요. 그들이 아마 학도의용대인가 뭐 그런 걸 조직을 해서 유엔군이나 국군을 지원하는 일을 했어요. 우리 형도 그런 곳에서 상당한 활약을 했어요.
그러다가 겨울이 될 무렵에 중공군이 대량 투입되는 바람에 도저히 국군과 유엔군이 대적할 수가 없었어요. 그게 나중에 듣고 보니 추위가 문제였어요. 치열한 전선이었던 백두산 밑에 부전공원 이런 데는 몹시 춥습니다. 남쪽에서 올라간 군인들이 도저히 그 추위를 견디기가 어려웠어요. 중공군들은 별로 대단한 겨울 복장을 안 했어요. 내복에 그 카키색으로 솜에다 누빈 거 그거 두르고, 방한모 쓰고 또 장갑도 신발도 그렇고. 그런데 이들이 그냥 물밀듯이 내려왔지요.
▶ 1·4후퇴를 직접 경험하셨겠군요?
그런 중공군을 대항하는 국군이나 유엔군은 우리가 보기에도 군장이 상당했어요. 그렇게 무장을 했는데도 추위를 견디지 못해 동상이 걸리고 그래서 전쟁을 할 수가 없게 됐어요. 그러니까 후퇴 결정을 내렸지요. 후퇴하는 데 삼팔선에서 가까운 데가 원산항이고 그 위에 함흥, 흥남항이 있고, 쭉 올라가면 청진이 있고 그러지요. 개마고원까지 올라갔던 국군이 철수할 때, 철수하는 경로가 더 밑으로 안 내려오고 도중에 흥남항에서 배를 타고 철수했지요. 일반 사람들도 이남으로 가겠다고 흥남, 함흥 이쪽 사람들이 많이 피난 왔습니다.
국군들이 있을 동안에 원산에서 활동하던 청년들, 학생들은 여기 남아 있으면 틀림없이 다 죽게 될 판이에요. 가족들도 마찬가지이고. 결국 남으로 피난 가는 길이 유일한 살길이 되었어요. 그런데 원산에서는 군함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무조건 바다로, 부두로 나올 밖에 없었어요. 우리 가족들도 모두 부둣가로 나왔지요. 그랬더니 사람들로 꽉 찼어요. 그런데 떠날 수 있는 배는 한정이 있단 말입니다. 1951년 1·4후퇴, 그 날 눈이 와 가지고 허리가 묻힐 만큼 많은 눈이 내렸어요. 배는 없고 사람은 넘쳐나고 휴~.
군함을 타기위해 겨울 바다에 뛰어들다
그런데 저쪽에 지금 막 떠나는 배가 발동을 걸고 있었어요. 작은 통통배에는 이미 탈 수 있는 사람들은 다 탔어요. 그때 신체가 좋고 나이가 많은 형이 가까스로 배에 탔고, 내가 타려는 찰나 막 떠나는 겁니다. 아! 어쩔까 망설일 여지도 없었어요. 저 배에 형이 탔으니 나도 저 배를 타야 된다는 일념뿐이었어요. 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지요. “백척간두에 진일보한다[百尺竿頭進一步].”는 말이 바로 그때에 나의 경우였지요. 겨울이라 두터운 옷을 입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피난 나가게 되면, 경우 에 따라 양식이 없을 때 바꿔 먹을 수 있도록 내가 가지고 있는 옷 가운데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그 위에 오바를 걸치게 해서 옷이 퉁퉁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참 대단해요. 가족 형제 가운데는 젖먹이 동생도 있었어요. 어머니가 볼 때 여기에 같이 나서면 도중에 다 죽게 생겼고, 아녀자와 애들을 어쩌겠어요. 아버지와 형, 나, 남자들은 위험하거든요. 그러니까 가족 걱정하지 말고 제각기 힘 따라 피난하라고 하셨어요. 우리야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요. 그런데 오히려 어머니 쪽에서 우리 등을 떠밀었어요. 돌아서는 우리나, 어서 가라고 재촉하는 어머니나 이 사태가 그렇게 오래야 가겠느냐, 유엔군이 올라갔다가 임시 후퇴를 했으니 다시 또 반격하는 그런 일이 곧 온다고 믿었지요. 얼마 동안 헤어져서 참고 견디면 또다시 만날 수가 있겠지 했던 거예요. 그것이 없었더라면, 가족을 놓아두고 도저히 돌아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헤어졌는데 지금까지 60년이 흘렀네요.
그렇게 바닷물에 뛰어들어 온 힘을 다해 배를 따라갔지요. 수영은 제법 잘했으니까 상당한 거리를 헤엄쳤더니 배가 멈췄어요. 겨우 올라탔던 겁니다. 원산항이 있는 옆 반도를 영흥만이라고 합니다. 그 영흥만의 섬들은 유인도도 있지만 무인도가 더 많아요. 호도虎島라는 무인도에 배가 멈췄어요. 먼저 온 사람들이 바닷가 여기저기 있었어요. 그 엄동설한에 바다에 빠져서 흠뻑 젖어서 올라왔으니 얼마나 추운지요. 다른 옷이 없어 젖은 옷으로 견뎠어요. 그때에 양 손, 두 발 다 지독한 동상에 걸려 하룻밤 자고 나니까 발이랑 퉁퉁 부었어요.
▶고향 원산을 그렇게 떠나셨군요?
약이 뭐 있나요. 오랫동안 내려오는 민간요법이 전부였지요. 동상이 심하게 걸리면 누런 콩을 반쯤 넣고 거기다가 동상 걸린 손이나 발을 집어넣고 있으면 나아진다고 했어요. 나도 그렇게 해서 하루를 지내니까 얼어 가지고 퉁퉁 부었던 다리가 녹아서 물 흐르듯이 슥 빠져나오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거기서 한 일주일 머물러 있는 동안에 그렇게 해서 완전하진 못하지만 좋아졌어요. 또 먹을 것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손발 집어넣고 언 물이 올라온 그 콩을 깨끗이 씻어서 삶아 먹었어요. 이후에도 한 6~7년 되도록 겨울 그 시절이 되면 다시 손발이 가려워지곤 했지요.
섬 생활 일주일 만에 어떻게 연락이 닿아 가지고 유엔군이 L.S.T라고 하는 배를 보내왔어요. 여러 대가 와서 피난민들을 다 싣고 넓은 바다에 있는 큰 군함으로 옮겨갔어요. 함흥에서 철수한 큰 배들은 다 거제도, 제주도로 갔는데, 원산항에서 간 우리 배는 멀리 안 가고 가까이 있는 강원도 묵호 현 동해시에 도착했어요. 이렇게 남한 땅을 처음 밟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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