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禪, 禪과 시]
끝내 넓은 바다로 돌아가 파도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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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3 년 4 월 [통권 제120호] / / 작성일23-04-05 11:00 / 조회3,276회 / 댓글0건본문
“다음 달에는 바다를 한번 봤으면 좋겠다.”
“바다? 좋지!”
“우리 나이에 장거리 운전은 이제 무리고 기차 타고 갔으면 좋겠다.”
“기차 여행? 좋지!”
“기차역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가 어디에 있나?”
“월포역에서 내리면 바로 바다다.”
쩨쩨한 속세를 벗어나는 데는 여행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처럼 친구들과 기차 여행에 나섭니다. 동대구역에서 10시 4분에 출발하여 무정차로 10시 39분에 포항역 도착입니다. 짧은 여행이지만 모처럼의 기차 여행에 모두들 조금은 들뜬 모습입니다.
기차를 타고 바다로
어린 시절 겨울밤, 이불 속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렸습니다. 철로에서 한참 떨어진 곳인데도 겨울밤이면 기적 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들렸습니다. 기적 소리에는 뭔가 특별한 울림이 있어서 어린 마음에도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습니다.
기차를 타면 항상 어린 시절 이불 속에서 느꼈던 특별한 울림이 되살아납니다. 차창 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가슴이 설레고 즐겁습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난다는 느낌이 우리를 들뜨게 하는 걸까요. 기차를 타고 달리면 보잘것없는 산자락까지도 눈길을 끌고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정확하게 35분 만에 종점인 포항역에 도착합니다. 포항역에서 15분을 기다린 다음, 동해선 무궁화호로 갈아탑니다. 2004년 KTX가 개통되면서 옛날 급행열차이던 무궁화호가 이제 가장 등급이 낮은 기차가 된 것입니다.
불과 10분 만에 기차는 첫 번째 역인 월포역에 도착합니다. 월포역에서 조금만 걸으면 바닷가에 도착합니다. 옛날부터 청하면 월포리는 작지만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있는 한적한 바닷가였습니다.
오늘은 비가 오다가 멈춘 날이라 하늘도 흐리고 바다도 회색입니다. 바다의 푸른색은 바다 고유의 색이 아니라 빛이 만들어낸 색입니다. 빛이 사라지면 색깔 또한 사라집니다. 오후 1시가 좀 넘어가자 하늘이 개며 바닷물 색도 푸른색이 됩니다.
백사장을 걸어 봅니다. 바다 냄새가 훅, 하고 밀려듭니다. 어촌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가 아니라 신비로운 소금기를 머금은 바다 냄새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바다에서 생겨났으니 이 냄새는 고향의 냄새입니다.
저 멀리 빨간 등대가 아름답습니다. 물보라는 여전히 높게 칩니다. 바람 부는 날의 바다도 아름답습니다. 물결이 죽 밀려와서는 백사장에서 부서지며 거품 소리를 내며 밀려갑니다.
해조음海潮音
바람이 강하게 불면 바닷물은 물결 위로 올라가서 물마루를 형성합니다. 물마루에서 공기가 섞이면서 흰 거품의 선인 물결이 나타납니다. 거품의 미세 기포는 겨우 몇 밀리미터에 불과하지만 지구상 미생물의 대부분이 삽니다.(주1) 파도 소리는 부서지는 파도가 만드는 거품이 진동하면서 나는 소리입니다. 바다 색깔은 자세히 보면 하나의 색이 아니라 여남은 색조가 넘실대는데 어떤 색이든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바닷가에 서면 누구나 아이가 되어 동심童心으로 돌아갑니다.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모래로 성을 쌓고, 예쁜 조개껍질을 줍던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근대 과학의 시조로 꼽히는 뉴턴(1643∼1727)은 생애의 말기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진리라는 거대한 대양이 펼쳐져 있고, 가끔씩 보통 것보다 더 매끈한 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질을 찾고 즐거워하는 소년 말이다.”(주2)
뉴턴의 이 말은 그대로 한 편의 선시禪詩와도 같습니다. 인류 지성사에 전환점을 마련한 위대한 과학자가 자신을 미지의 진리가 가득한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라고 표현했다니 참으로 절묘한 은유입니다. 뉴턴이 말한 거대한 진리의 바다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진리를 낚아 올립니다.
사람들이 어떤 진리를 낚아 올릴지는 부분적으로는 우연에 의존하지만, 주로 어떤 방법으로 낚시를 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좌뇌를 활용 해서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는 사람도 있고, 우뇌를 좀 더 활용해서 주관적 진리를 발견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바다라는 대양에 비하면 우리가 알아내는 것은 정말이지 매끈한 돌이나 조개껍질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매일 뭔가 작은 것을 하나 알게 된다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쁨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일진대 우선 마음에 응어리나 번뇌가 없어야 합니다. 번뇌를 없애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습니다. 『능엄경』에 따르면 25가지 수행 방법이 있는데 그중 관세음보살이 수행한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이 가장 훌륭합니다.
“이 방법은 참으로 가르침의 본체이니 청정함이 소리를 듣는 데 있다. 삼매를 얻기 위해서는 실로 듣는 것으로 들어가야 한다.”(주3)
실제로 우리는 시각 정보에 의식을 집중하면 긴장하고, 청각 정보에 의식을 향하면 긴장을 풀어주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치다 다츠루에 의하면 인간이 가장 무리 없이 이완되어 있는 상태는 외부에서 도래하는 ‘소리’에 고요히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철학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매너는 바로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주4)
『법화경』에 따르면 관세음보살님은 해조음海潮音(주5)을 들으며 수행하여 깨달았습니다.(주6) 해조음은 백색소음입니다. 듣고 있으면 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백색소음이란 백색광과 비슷하게 수많은 주파수의 음들이 전체 음향 스펙트럼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소리를 말합니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에는 백색소음의 요소가 들어 있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주7) 『성경』에도 예수님의 음성이 맑은 물소리와 같다고 했습니다.(주8)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리에 귀 기울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끝내 넓은 바다로 돌아가 파도가 되리라
바다 앞에 서면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계와 경계가 없는 광대한 느낌입니다. 한계가 없는 영원에 대한 이 감각을 종교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당나라 시절 한 사미승(주9)이 읊은 짧은 시는 우리들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립니다.
“끝내 넓은 바다로 돌아가 파도가 되리라.”(주10)
‘파도가 되리라[作波濤]’라는 세 글자는 기운氣運이 생동生動하고 형상이 지극히 웅장하여 결코 범부가 우연히 얻을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닙니다. 과연 이 사미승은 훗날 황제의 자리에 올라 선종宣宗(847~859)이 되었으니 이 세 글자의 기운생동을 천하가 다 알게 되었습니다. 한 편의 뛰어난 시는 읽는 이들을 일상적 세계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꺼내 주어 시간이 정지한 것과 같은 평온함과 기쁨을 선사합니다.
3시간 정도 바닷가에 머문 다음 귀로에 오릅니다. 월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면 포항역에서 대구행으로 노선을 변경하여 그대로 운행합니다. 같은 열차라서 내렸다가 좌석 번호를 찾아서 다시 타면 됩니다. KTX가 35분 걸린 거리를 무궁화호는 1시간 25분 걸립니다. 세상에는 걷고 싶은 길이 있고, 타고 싶은 기차가 있습니다. 무궁화호도 그런 타고 싶은 기차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다를 실컷 보고 오는 길이지만 문득 어린 시절에 한 번 읽었을 뿐인데 저절로 외우고 있는 장 콕토(1889∼1963)의 짧은 시 〈귀〉가 떠오릅니다. 콕토는 젠체하지 않고 그저 평범한 어조로 평범한 단어를 툭 던지고 지나갔는데 두고두고 뒤돌아보게 합니다. 이 시는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영원한 고향, 바다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표현한 것입니다. 바다를 시각이 아니라 청각으로 표현함으로써 평생 잊지 못할 청각적 그리움을 들려줍니다. 귀 기울여 해조음을 듣는 것, 그것은 대단한 행복입니다.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 소리를 그리워하네.(주11)
<각주>
주1) 시드니 퍼코위츠, 『거품의 과학』, 사이언스북스(2008).
주2) 데이비드 브루스터, 『아이작 뉴턴 경의 생애, 저술, 발견의 회고록』(1855)
주3) 『楞嚴經』, 「耳根圓通章」, “此方眞敎體 淸淨在音聞 欲取三摩提 實以聞中入.”
주4) 우치다 다츠루, 『힘만 조금 뺐을 뿐인데』, 오아시스(2017).
주5) 밀물이나 썰물이 흐르는 소리. 또는 파도 소리.
주6) 『妙法蓮華經』 「觀世音菩薩普門品」.
주7) 버니 크라우스, 『자연의 노래를 들어라』, 에이도스(2013).
주8) 『계시록』 1:15.
주9) 『庚溪詩話』, “唐宣宗微時,以武宗忌之,遁跡爲僧.一日遊方,遇香嚴閒禪師.同行,因觀瀑布.香嚴閒禪 師曰:‘我詠此得一聯,而下韻不接’ 宣宗曰:‘當爲續成之’ 其後宣宗竟 踐位,志先見於此詩矣.”
주10) 『全唐詩』, 香嚴·李忱 「瀑布聯句」, “終歸大海作波濤.”
주11) Jean Cocteau, 『Po sies(1917∼192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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