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새로운 유식불교의 제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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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3 년 5 월 [통권 제121호] / / 작성일23-05-05 11:56 / 조회2,099회 / 댓글0건본문
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29 | 웅십력②
웅십력은 유식불교(『성유식론成唯識論』)에 대한 비판과 반대에 근거해서 ‘새로운 유식불교’(『신유식론新唯識論』)를 제기하였다. 『신유식론』 자체가 유식불교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웅십력의 대안이다.
유식불교와 신유식론의 유식
유식불교는 중관학과 함께 대승불교의 이대 종파에 속할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유식불교가 중관학과 구별되는 점은 현상계의 대상들에 대하여 그 존재성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현상이 실체적 존재로서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른 형태 또는 다른 의미로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흔히 중관사상을 대승 공종空宗, 유식불교를 대승 유종有宗이라고 부른다. 유식불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을 오해하고 공에 집착하는 ‘악취공惡取空’에 대한 비판을 동기로 해서 구성된 것이며, 공사상의 허무주의 경향을 극복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런 면에서 유식불교와 웅십력 사상은 완전히 배치되는 것만은 아니다.
유식불교란 무엇인가? 세친은 “대승에서는 ‘세 현상 세계[三界]가 오직 식識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유식의 ‘오직[唯]’이라는 말은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만 표상일 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 존재하는 것과 유사하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눈병이 난 사람에게 실제로는 없는 머리카락이나 달 등이 보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투영된 표상만 있고 그것에 대응하는 외부 사물의 실재를 부정하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는 명제는 유식사상의 근본 입장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다.
선정 체험에서 떠오르는 대상이 마음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인식 내용도 외부 대상의 존재와 무관한 마음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평상시의 인식도 선정을 닦는 때의 인식과 본질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유식불교는 결국 “사람의 한평생이 한바탕 꿈이다.”라는 생각을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사람이 일생 동안 살면서 겪는 감각 경험, 외부 대상세계와 그것을 경험하는 나라고 하는 자아, 이 모든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스크린 상의 영상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유식불교의 목적은 이렇게 외부 대상과 주관적인 내가 실재한다고 보는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깨뜨려서 아법이공我法二空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성유식론』에서는 ‘나’와 ‘외부 대상’은 “단지 거짓으로 세워져 있고, 실제로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나’와 ‘외부 대상’은 모두 “식의 전변에 의해서 거짓으로 시설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유식불교에서 대상의 세계는 ‘식識으로서의 존재’, 또는 ‘식識 안에 있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 ‘오직 식만 존재한다[唯識]’는 말이 성립하게 된다.
이렇게 마음을 중시하는 정점에 위치한 유식불교는 사회의 변화를 ‘개인의 주체적 자각’에서 찾아보려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바로 중국 근대시기에 불교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내적 원인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웅십력이 처음에 유식불교에 몰입하였던 것도 바로 마음을 정화하여 개인의 주체적 자각을 고양시키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웅십력은 유식사상의 근본 입장인 ‘유식무경唯識無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때 강조점이 약간 다르다. 유식불교에서는 객관세계란 주관적인 마음인 식識의 전변으로 존재하게 되지만, 웅십력은 객관세계가 주관적인 마음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웅십력이 ‘유식唯識’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유식의 주장은 외부 객관세계에 집착하는 허망한 견해를 논파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외부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객관세계가 마음과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唯’ 자는 특수하다는 뜻이지 유독 그것뿐이라는 뜻이 아니다. 마음은 객관 대상을 이해하고 구별할 수 있어 역용力用이 특수하므로 마음에 대해 ‘특수하다[唯]’고 한 것이다. 유심唯心이 어찌 객관 대상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유식은 ‘식만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식의 작용이 특수하다’는 의미가 된다. 웅십력 철학에서는 주관적인 마음과 현상세계가 모두 본체의 현현으로 나타난 것이고, 따라서 주관적인 마음과 현상세계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心物不二]. 이런 체계에서는 식만이 존재한다고 하여 주관적인 마음만 인정하는 유심唯心이란 있을 수 없다.
결국 유식불교의 ‘유식무경唯識無境’은 웅십력에게 주관적인 마음과 객관적 대상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경불리식境不離識’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 외의 부분은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객관세계가 주관적인 마음에 종속되었다고 해서 마음을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식불교의 종자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유식불교 비판 1: 본체와 현상의 분리(종자계와 현행계)
웅십력이 유식불교를 비판하는 핵심은 유식불교의 종자설로 인해서 종자種子와 현행現行이 일치하지 않고 완전히 이분되었다는 점에 있다. 종자계와 현행계를 이분한다는 것은 세계를 이루는 근원인 본체와 현상세계를 분리하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세계 너머에 또 다른 본체세계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종교적인 신神 이론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웅십력의 생각이었다. 이것은 서양 형이상학의 초월적인 본체론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착학파의 최대의 오류는 종자계와 현행계를 두 개의 세계로 완전히 이분한 것이다. 숨겨져 있는 것[隱]과 드러난 것[現]을 낳는 것[能]과 낳아진 것[所]이라고 나누어서 따로이 두 세계로 구분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비판은 유식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것인만큼, 유식불교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라고 할 만하다.
웅십력이 보기에 유식불교는 종자를 본체로 상정함으로써 본체계와 현상계를 두 개의 세계로 구분하는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렀다. 유식불교에서는 숨겨져 있는 저장된 세계(종자계)와 밖으로 드러난 세계(현행계)가 둘로 나뉘어 일원론으로 합치될 수 없다. 유식불교의 이러한 이원론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세계를 본체세계에 종속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본체세계에 비해 무가치한 것, 또는 덜 중요한 것으로 보게 한다.
지금 이 곳의 현상계보다 중요한 것은 본체계, 즉 아라야식 속의 종자들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 속에서 도덕적으로 최선을 다하더라도, 그것이 해탈 여부를 결정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구도에서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그 때문에 웅십력은 본체와 현상을 이분하는 유식불교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유식불교 비판 2: 이중 본체의 문제(진여와 종자)
웅십력이 유식불교를 비판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중 본체의 문제이다. 유식불교에서는 종자를 마음과 현상세계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삼으면서도, 불교 일반의 논의에 따라 진여眞如가 만법의 실성實性이라고 하여 ‘진여’와 ‘종자’라는 이중 본체를 주장하는 잘못을 범하였다는 것이다. 유식불교는 종자를 마음과 객관대상의 근거, 최초의 원인[因], 본체로 삼음과 동시에, 공종 이래의 진여관을 계승하여 절대적이고 진실되고 부동불변한 진여를 만물의 실체로 인정하였다. 이처럼 진여와 종자를 동시에 현상계의 본체로 상정함으로써 이중 본체의 문제가 야기된다고 한다.
“유종은 이중 본체의 잘못에 빠졌다. 그들은 종자를 현상의 원인으로 세웠으므로, 종자는 이미 하나의 본체이다. 그러나 또 불교에서 한결같이 이어져 온 본체론을 준수하기 위하여 진여眞如라고 하는 것을 현상의 실체로 삼았다. 유종의 종자계와 현행계는 생멸하는 것과 변화하는 것의 이중세계이다. 지금 움직이지 않고 불변하는 진여와 이 이중세계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물어보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
유식불교에서 진여와 종자라는 이중 본체를 가지게 된 것은 진여의 불변성과 종자의 변화가능성을 동시에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본체의 ‘불변성’과 ‘변화가능성’은 서로 모순되므로 이 두 본체는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다. 불교의 본체인 진여에 대한 이해에서 볼 때, 진여는 무위법이므로 결코 끊임없이 생성·변화하거나 유행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유식불교는 이러한 성격의 진여가 아라야식의 ‘실성實性’과 ‘체성體性’이라고 본다. 따라서 무위법인 진여와 생멸변화하는 현상계의 모습은 서로 뛰어넘을 수 없는 다른 영역의 것이 되므로, 진여와 현상계의 관계를 설명할 방법이 없게 된다. 이것이 이중 본체가 야기하는 문제이다. 웅십력은 “종자는 종자이고 진여는 진여이다. 이 이중 본체는 서로 관계가 없고, 진리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확실히 말이 되지 않는다.”라고 결론지었다.
웅십력은 결국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불교의 유학화라는 제3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유식불교에 대한 비판은 실제로는 동일한 성향의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으므로 그에게는 민족적 자존심을 건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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