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각화사 동암의 깨달음과 돈오점수의 한계를 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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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3 년 5 월 [통권 제121호] / / 작성일23-05-05 13:44 / 조회2,978회 / 댓글0건본문
1980년 고우스님은 10·27법난 수습을 위해 봉암사 수좌대중들과 함께 서울 총무원에서 석 달 생활한 뒤 봉화 문수산 축서사로 가서 2년여 정진했다. 축서사는 지금이야 무여스님 원력으로 대작불사를 하여 사찰 불사의 현대적 모델이라 할 정도로 대찰이 되었지만, 고우스님이 주지를 맡을 당시에는 봉화 문수산 높은 산비탈의 작은 절이었다.
고우스님은 봉화와 문수산이 훌륭한 수행 환경을 갖춘 곳이라 생각했지만 주지 소임은 늘 부담스러웠다. 봉암사에서 처음으로 주지 소임을 맡아 선방을 짓는 불사까지 했다. 하지만 주지는 당신의 기질과 맡지 않다고 2년여 만에 그만두었듯이 축서사 주지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이번에도 2년여 만에 주지를 그만하고 후임을 구했다. 마침 훌륭한 후배 수좌인 무여스님이 축서사를 맡겠다고 하여 축서사의 본사인 고운사 근일스님과 협의하여 인수인계를 해주었다.
1985년 무렵 고우스님의 후임으로 축서사의 주지를 맡은 무여스님은 오대산 월정사로 출가하여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다가 이 무렵 축서사로 왔다. 무여스님은 산중 오지의 문수산 축서사에 불사 원력을 세우고 대작불사를 성취하고 선원도 열었다.
각화사 동암에서 『단경』을 보고 깨닫다
고우스님은 축서사를 떠나 지리산 천은사, 수덕사 등 제방 선원을 유력하다가 1987년 무렵 봉화 춘양 태백산 각화사 동암으로 가서 정진하게 되었다. 태백산 동암은 각화사에서 동쪽 산 위에 있는 작은 암자로 근세에 많은 수행자들이 거쳐 간 빼어난 수행처다. 법주사 조실을 지낸 금오스님을 비롯하여 종정을 지낸 혜암스님, 법전스님이 동암에서 정진하신 분들이다.
어느덧 오십이 된 고우스님은 태백산 동암에서 혼자서 정진하던 어느 날 부처님을 모신 법당 겸 선방에서 좌선하다가 너무 피로를 느껴서 좌복 위에 그냥 누웠다. 대중이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없지만 혼자 있으니 누워서 좀 쉬려고 하는데 올려다보니 부처님이 내려다보고 계셨다.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일어나 옆에 붙은 지대방으로 가서 쉬려고 누웠다.
무심코 머리맡에 책이 한 권 있어 집어보니 『육조단경』이었다. 『단경』을 펼쳐 보던 중 우연히 「정혜불이품」 중에 “정定과 혜慧가 둘이 아니다. 정과 혜가 하나가 되어도 비도非道다.” 하는 구절을 보고는 벼락이 치는 듯한 충격을 받고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그동안 스님은 ‘정과 혜가 하나가 되면 도’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고는 일어나 그 뒷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과 혜가 하나가 되어 통류通流해야 도다.”라는 구절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동안 알고 있던 깨달음에 대한 생각과 너무나 달라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으니 드디어 확연해졌다.
백척간두 진일보의 뜻을 깨치다
그런데 ‘정혜가 둘이 아니고 통류해야 한다’는 『단경』의 구절을 알게 되니 또 다른 것을 깨치게 되었다. 참으로 묘했다. 예전에 누가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의 뜻을 물었는데 제대로 답을 못해 주고 거기에 막혀서 상당히 고심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이날 불현듯 ‘통류通流’를 알게 되니 그 막혀 있던 ‘백척간두 진일보’의 뜻을 깨치게 된 것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할 때 ‘백척百尺’은 100자를 말하니 33미터다. 백척 높이는 불교에서 깊은 뜻이 있는데, 법주사 미륵대불이나 동화사 약사대불 높이가 백척이다. 백척간두란 백척 높이의 장대 위라는 말이고, 진일보進一步란 한 걸음 더 내딛는다는 말이다.
백척 장대 위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다 하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불교의 궁극적인 깨달음 자리, 구경각究竟覺 자리를 말한다. 이것이 정과 혜가 하나가 된 자리이다. 즉 선정과 지혜가 하나가 된 자리를 백척간두, 백척 장대 위로 비유한 것이다.
그렇지만 백척간두 진일보라 함은 백척 장대 위에 머물러 있으면 깨달음이 아니다. 선정과 지혜가 하나가 되어도 도가 아니다. 하나가 되어 통류해야 한다. 통하여 흘러야 한다는 말이 바로 ‘백척간두 진일보’라는 말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때 비로소 고우스님은 부처님이 깨친 중도中道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공空에 대한 작용, 작용과 비작용을 이해하게 되니 남과 비교하지 않게 되었고,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는 본래 그 자리를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고우스님은 그 동암의 깨달음이 확철대오는 아니라고 당시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정혜定慧가 하나된 그 자리에서 어떤 경계든 자유자재하게 되었다. 느낌이 트인 것이다. 확철대오의 깨달음은 아니었다. 깨치면 시간에 지배당하지 않고, 경계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래서 깨치면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잘 안다. 깨쳤는지 못 깨쳤는지는 경계에 휘둘리고 시간에 지배당한다면 깨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깨치지는 못해도 그 후로는 선어록을 보니 재미가 있고, 이해 안 되던 것이 다 이해가 되고, 화두도 알음알이로나마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화두를 다시 들었다. 다른 화두는 다 알겠는데 딱 하나가 꽉 막혔다. 그래서 다시 화두를 들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여 부처님이 중도를 깨달아 생사의 괴로움을 영원히 해탈하여 대자유를 누리셨는데 그 중도를 고우스님은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중도의 깨달음인 견성성불이 아니고 그야말로 이해, 알음알이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비록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처럼 확철대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중도를 확실히 이해하게 되니 더 이상 깨달음에 대한 오해가 사라져 너무나 기뻤다고 뒷날 회상하셨다. 이제 생각으로는 이치로는 다 안 것이다. 분별심으로나마 불교에 대하여 이제 더 이상 의심이나 걸림이 없었다. 이것만 알아도 너무나 기뻤고 행복했다. 이때가 1988년 고우스님 나이 만 50세였다.
돈오점수의 한계를 알게 되다
고우스님은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이 깨친 중도를 이치로나마 확연히 알게 되니 너무나 기뻤다. 이제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의심이나 혼란이 없어지고 믿음이 확고해졌고 확연했다.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출가한 이후 불교 공부를 차분하게 되돌아보았다.
그동안 고우스님은 1971년 문경 도장산 심원사에서 공을 체험하고는 깨달았다고 돈오했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돈오頓悟했으니 점차 전생의 습기와 미세한 망상만 없애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이번 태백산 동암에서 ‘통류通流’와 백척간두 진일보를 깨달은 체험은 도대체 무엇인가? 심원사에서 깨달았다고 돈오했다고 알았는데, 이번 동암 깨달음은 심원사 체험보다 훨씬 더 강력한 체험이고 깨달음이었다. 그러니 이전의 공 체험을 깨달음, 돈오라고 판단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우스님은 이런 생각을 정리하고 심원사 이후 동암까지 스스로의 공부를 점검해 보았다. 과연 심원사에서 공을 체험하여 깨달았다고 돈오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욕망과 화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는 돈오점수 공부를 했으니 남아 있는 욕망과 화도 점차 없애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깨닫고 도인이 되었으니, 욕망이나 분노가 어쩌다 일어나더라도 전생의 습기 때문이니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의 안목으로 점검해 보니 그것은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 무상정등각이 아니라 깨달음의 체험 정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문제의식을 느낀 고우스님은 이것을 좀 정리해서 그동안의 혼란을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고우스님은 동암에서 해제를 하고는 각화사 서암西庵으로 가서 바랑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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