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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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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3 년 5 월 [통권 제121호]  /     /  작성일23-05-05 14:01  /   조회1,87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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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수녀님이 법정스님에게 질문을 한다. “종교적 실천을 필요로 하는 곳이 이렇게나 많다. 산속에서 참선만 한다면 종교적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 아닐까?” 자기의 고민을 담은 진지한 종교인의 질문이었다. 법정스님은 이에 한참 침묵하다가 대답한다. “그래도 해야 됩니다.” 

 

불교의 생명은 수행

 

당시 그 수녀님의 대학원 지도학생으로 함께 불일암을 찾아갔던 한 교수님에게 들은 얘기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감동을 느낀다. 불교의 사회적 실천에 헌신했던 법정스님이다. 그러면서도 법정스님은 철저한 수행승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서 법정스님의 침묵은 길고 긴 서론과 본론의 축약이다. 그리고 그 결론이 “그래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법정스님도 성철스님에게 똑같은 것을 물은 일이 있다. 수차에 걸친 두 분 스님의 대화를 들어보면 법정스님은 불교의 사회적 실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거듭 묻고 있고, 성철스님은 수행으로 들어가 깨달음으로 나올 때 모든 행위가 진정한 사회적 실천이 된다는 대답을 반복적으로 내놓고 있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말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 대화는 ‘찰떡궁합’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사회적 실천에 헌신했던 법정스님의 걸음은 봉은사 다래헌에서 송광사 불일암으로, 다시 강원도 오두막으로 더욱더욱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으로 향한 걸음이다. 이에 비해 장좌불와 8년, 동구불출 10년 이후에도 평생 백련암을 벗어나지 않았던 성철스님의 모든 구상은 대중과 사회를 향하고 있었다. 밖을 향한 걸음이다. 그 두 걸음은 수행이라는 생명선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진공眞空과 묘유妙有가, 쌍차雙遮와 쌍조雙照가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처럼 두 위대한 불교인은 필연적으로 만나는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1. 성철스님과 법정스님의 문답을 다룬 책 『설전』(책읽는섬, 2016).

 

그러니까 수행이야말로 불교의 생명이다. 화두가 있으면 모든 것이 살고, 화두가 없으면 모든 것이 죽는다. 그것은 성철스님이 쇠말뚝으로 박아 놓았다는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는 푯대에 담긴 내용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화두 참구야말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하는 일이다. 화두 참구는 진리를 위해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나를 희생해야 한다. 진리를 위해 대상에 대한 지향을 내려놓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모든 지향, 심지어 부처와 깨달음까지 희생해야 한다. 이 희생의 수준에 따라 화두는 명료성과 지속성을 더해 간다. 

 

화두의 명료성과 지속성

 

그리하여 좌복에 앉아 좌선을 하거나 몸을 일으켜 활동을 하거나 간에 화두가 또렷하게 된다. 동정일여動靜一如다. 이 차원에서 보면 여러 공안들의 맥락이 쉽게 이해된다. 그것을 설명하고 해설하는 일도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언어와 사유의 차원으로 다가갈 수 없는 속 깊은 사연에 대해서는 그저 까맣기만 할 뿐이다. 알고 이해하는 범주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대혜스님이 원오스님 회상에서 마흔아홉 번이나 정답을 들고 방장실을 찾아갔지만 매번 “아니다.”라고 퇴짜를 맞았던 것도 이때의 일이다.

 

사진 2. 간화선의 요체를 담고 있는 대혜스님의 『서장』.

 

그래서 수행자는 기왕의 성취를 통째로 내려놓고 새롭게 화두의 참구에 들어가야 한다.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는 자아를 희생하고, 또한 그 얻은 경계를 희생하는 자세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그렇게 공부가 깊어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꿈속에도 화두가 분명한 국면을 맞게 된다. 몽중일여夢中一如다. 가슴에 체증이 내려가듯 공안들이 쉽게 풀린다. 깨어 있을 때 번뇌에 휘둘리는 일이 없고 잠을 잘 때 꿈으로 헷갈리는 일이 없다. 깨달음을 선언해도 좋을 것 같은 지점이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몇 가지 증거를 들어 이러한 몽중일여가 화엄 7지의 경계라는 것을 밝힌다. 화엄 7지는 먼 여행을 시작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원행지라고 부른다. 새로운 여행은 지금 도착한 이 전망 좋은 자리를 유감없이 떠나는 일로 시작된다. 그러려면 용기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 더욱 애쓰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애쓰다 보면 꿈조차 없는 숙면시에도 화두가 또렷한 경계가 나타나게 된다고 얘기된다. 오매일여寤寐一如다. ‘개가 뜨거운 기름 솥을 앞에 두고 핥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되는 경계이다. 이러한 멸진정滅盡定의 자리에서 선지식의 한마디가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인연이 성숙했다면 여러 전등록傳燈錄에서 전하는 것과 같이 말끝에 깨닫는 기연이 일어나게 된다.

 

사진 3. 태고보우 스님.

 

우리는 이 기적 같은 순간의 기록만을 보고 스승을 잘 만나기만 하면 단번에 깨닫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로또 당첨 같은 요행이 아니라 필연이다. 알 속의 병아리가 준비가 되어 있을 때라야 바깥의 어미 닭의 도움을 받아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수행이 충분히 익어 오매일여가 되어야 스승의 마지막 말씀이 무쇠를 황금으로 바꾸는 신묘한 묘약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매일여는 깨달음의 필수조건이다. 성철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니 태고스님도 오매일여를 거쳐 대오하고 인가받았던 것이다. 철저히 깨쳤더라도 오매일여가 되는지 점검해야 하며, 또 오매일여가 되었더라도 반드시 정안종사를 찾아가 점검받는 것이 우리 종문의 철칙이다.” 

 

오매일여에 대한 비판과 재비판

 

이러한 오매일여가 워낙 고원한 차원이다 보니 그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일어나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은 오매일여가 불이사상의 철학적·문학적 표현이지 실제 경계가 아니라거나, 숙면시가 되면 정신의 활동이 사라지므로 오매일여는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거나, 옛 선사들이 말한 오매일여를 성철스님이 잘못 해석하고 있다거나 하는 등의 주장을 한다. 결론적으로 성철스님이 말하는 오매일여가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화두 참구가 분별의식의 차원, 상식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원래 상식은 기존의 틀을 부수는 새로운 상식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마련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서구의 심리학에서는 슈퍼 에고, 에고, 이드로 마음을 파악하고 그것을 실제 심리 치유에 활용하고 있다. 나아가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으로 보다 본질적 의식의 존재와 작용을 규명하고 있다. 불교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분명한 이 심리학의 이론들이 이제는 상식으로 통용되는 상황이다.

 

사진 4. 나옹혜근 스님.

 

그런데도 무의식을 관통하는 오매일여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제8식 아뢰야식은 꿈도 없는 숙면과 기절하여 정신작용이 멈춘 상황에도 작동한다. 그러므로 아뢰야식 차원을 관통하려면 숙면시에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선정이 필요하다. 또한 그 미세한 장애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려면 아뢰야식 차원의 오매일여에서 한 걸음 더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유식의 이론에 의하자면 이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러니까 오매일여를 부정한다는 것은 유식에서 말하는 바, 아뢰야식의 타파로 깨달음이 성취되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깨달음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이것은 불교의 수행과 깨달음을 자기 수준의 상식에 가두는 일 외에 다른 일이 될 수 없다. 불교의 깨달음은 자신에게 일찍이 없던 일의 체험으로 일어난다. 그것은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미증유의 일이기 때문이다. 오매일여의 경계가 자기에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불가사의한 깨달음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한편 선사들의 어록에 오매일여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들어 그것이 선문의 보편적 노선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조사어록 등에 오매일여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선종의 여러 기록이 주로 깨달음이 일어나는 현장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깨달음에 이르는 심리적 변화가 세세하게 기술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더구나 오매일여가 깨달음의 필수조건임을 확인할 정도의 기록은 충분하다. 성철스님이 인용한 것처럼 설암스님, 원오스님, 대혜스님, 고봉스님과 같은 최고의 고승들이 자신이 체험한 바를 가감 없이 기술하면서 오매일여의 관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선에 대한 국가고시 시험문제였던 나옹스님의 오매일여

 

특히 우리는 고려조 나옹스님이 「공부10절목工夫十節目」에 오매일여를 점검 항목으로 제시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공부10절목」은 공민왕 때 실시된 공부선功夫選, 즉 참선으로 깨달은 도인의 선발을 위한 과거시험에 출제된 시험문제였다. 열 개의 항목이 모두 질문의 형태로 제시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시험문제였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이 오매일여론의 마지막 결론격으로 인용한 해당 항목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공부가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중간에 끊어지는 일이 없으며 깨어 있거나 잠자거나 항상 한결같아지면(오매일여) 건드려도 흩어지지 않고 쓸어내도 사라지지 않게 된다. 그것은 마치 개가 뜨거운 기름 솥을 보면서 핥으려 해도 핥을 수 없고,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일과 같다. 이때 어떻게 하면 말끔히 매듭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나옹스님은 깨달은 도인을 선발하는 과거시험에서 오매일여의 경계를 물었던 것이다. 성철스님이 거듭 강조한 것처럼 ‘종문의 철칙’이 아니었다면 이것이 도인을 선발하는 국가고시의 시험문제에 포함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공부선 과거는 실제로 시행되었고 고려조의 마지막 국사에 책봉되는 환암혼수 스님이 막힘없는 대답으로 유일한 급제자가 된다. 

 

그런데도 오매일여에 회의적 태도를 보이기는 수행자들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요원한 경계이기 때문이다. 성철스님 생전에도 선승들이 찾아와 “공부를 해 보니 일여한 경계를 차츰차츰 맛보게 되는데 오매일여는 도저히 되질 않습니다. 그거 혹시 스님만의 주장은 아닙니까?”, “스님이 말씀하시는 견성은 하늘의 별처럼 아득해 감히 엄두도 나지 않습니다.”라는 등의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또 아예 오매일여를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이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정신일 때 바로 깨쳤으면 되지 오매일여가 뭐냐.”는 것이었다.

 

사진 5. 대혜종고 스님.

 

사실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매일여는 참으로 입이 벌어지고 기가 막히는 경계다. 동정일여도 아니고, 몽중일여도 아니고, 숙면 중에 한결같은 화두라니! 좌복에 앉기만 하면 산란한 잡념과 무거운 혼침이 무한 릴레이를 하는 상황에 있는 대부분의 수행자들로서는 용기가 꺾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오매일여의 법문은 잘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성철스님은 오매일여를 향해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 뿌듯해하는 어떤 경계가 있다면 그것이 동정일여인지, 몽중일여인지, 숙면 중에 한결같은 오매일여인지 점검해 보라고 했을 뿐이다. 원래 목적과 지향을 세우면 삶이 헛돌고 공부가 헛돌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오매일여를 지향하며 애쓰는 대혜스님을 향해 원오스님은 “쉬어라! 쉬어라! 망상을 쉬어라”고 했던 것이다. 오로지 스스로의 성취에 대한 자기 기만적 뿌듯함을 내려놓고, 또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을 내려놓고, 새롭게 화두 참구에 돌아가면 될 일이다. 

 

참 좋은 화두 공부

 

성철스님은 화두 참구를 권하면서 “참 좋은 게 있다.”고 했다. 과연 그렇다. 설사 순간의 일일지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앉거나, 눕거나 하는 이것을 밝게 알아차리는 지점에 서서 보면 삶의 모든 현장이 완전해진다. 이미 화두를 드는 순간 ‘좋은 게 있는’ 것이다. 나아가 화두를 깊이 들수록 더 ‘좋은 게 있게’ 된다. 이렇게 매번 ‘좋은 게 있는’ 자리에 나아가 화두를 참구해 가다 보면 저절로 동정일여도 되고, 몽중일여도 되고, 숙면시에 여일한 오매일여도 된다고 보아야 한다. 스스로 아는 것에 뿌듯한 자부심으로 머문다면 그 순간 그는 나라는 주체도 있고 깨달음이라는 대상도 있는 범부가 된다. 이에 비해 까마득하게 모르는 현장을 향해 지금의 이 ‘좋은 자리’를 내려놓고 새 출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순간 그는 이미 도인이다. 그리하여 내딛는 걸음마다 미증유의 ‘참 좋은 게’ 

그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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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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