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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일본불교 최초의 중국포교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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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3 년 6 월 [통권 제122호]  /     /  작성일23-06-05 09:24  /   조회1,08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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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29 |오구루스 코쵸 ②

 

1876년 7월, 오구루스 코쵸小栗栖香頂(1831~1905)는 중국포교를 위해 다시 도항했다. 같은 해 8월 상해에 본원사 별원을 설치하면서 중국포교의 첫 삽을 떴다. 하지만 11월에 중풍을 앓게 되자 오구루스는 다음해 일본으로 귀국했다. 결국 1년 6개월이라는 짧은 중국 생활을 마감하면서 그의 중국포교는 멈추었다. 

 

사진 1. 동본원사 상해별원. 원래의 별원 위치에서 이전해 1883년에 다시 건립한 건물.

 

오구루스는 이 시기에 『진종교지』라는 포교용 교재를 저술했고, 이 저서는 향후 조선포교에도 사용되었다. 이상의 내용은 한국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이번 호에서는 그간 한국에는 소개되지 않은 1차 도항(1873~74)과 2차 도항(1876) 사이, 중국포교를 위한 오구루스의 흔적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삼국동맹과 북경호법론

 

오구루스가 중국포교에서 가장 큰 목표로 설정한 것은 일본·중국·인도를 하나로 묶는 삼국동맹 결성이었다. 동맹을 위한 방안으로 호법안 13조를 제안했는데, 이는 낙후된 중국불교를 개선시켜 동맹을 결성한다는 취지이다. 호법안의 내용은 출가승 혁신(제1조), 불교조직 개혁(제2~4조), 불교교육 개혁(제5~6조), 교화개혁(제9~13조)으로 분류된다.

 

외부적 요소로는 중국의 유교·불교·도교가 서로 합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불도가 사상적으로는 서로 상이해도 그리스도교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서로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구루스의 논점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항심과 함께 일본 내의 사정을 중국에 일률적으로 대입한 경향이 있다. 그는 일본·중국·인도 3국의 관계에 대해 『북경호법론』(1903)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사진 2. 『북경호법론』(1903).

 

“일본과 중국, 인도는 수레와 바퀴처럼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친족 혹은 사돈 관계이다. 따라서 서로 왕래하고 절차탁마해서 함께 불교를 공부하고 곤란한 일을 맞닥뜨렸을 때는 서로 도와야 한다. 그렇게 하면 불법의 정기는 하늘 높이 올라갈 것이다.”

 

오구루스는 이들 3국이 친족관계이므로 동맹을 맺어야 하지만, 중국의 현 상황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중국을 교화하고 진흥시킬 필요가 있고, 이후 삼국동맹을 체결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나아가 종국에는 3국동맹이 그리스도교에 대항해야 한다는 강력한 불법호지론을 펼쳤다. 흥미로운 점은 오구루스가 생각한 불교권(동아시아)에는 조선이 포함되지 않았고, 이는 일본이 불교의 순수성 혹은 원형을 이야기할 때 조선을 패스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북경호법론』은 오구루스가 1874년 3월부터 4월에 걸쳐 작성한 문서로 1903년에 오구루스가 직접 비매품으로 발행했다. 책의 구성은 중국 승려에게 보내는 서간문과 일본불교 소개로 이루어졌다. 내용은 일본불교의 각 종파와 종지 소개, 정토진종의 법어, 호법이 주요 내용이다. 이와 함께 중국 승려에게 보내는 서간문에는 자신이 중국에 온 목적과 책을 저술한 이유, 중국불교 관련자들의 협력을 구하는 내용이다. 『북경호법론』에서의 일본불교 소개는 단순히 개괄식 소개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도발에 가깝다.

 

사진 3. 1880년대 상하이 거리 풍경.

 

“일본의 천태는 본산과 말사에서 석학을 배출하고 있다. 현재도 쇠퇴하지 않았다. 중국의 천태산에서는 이 학문을 계승하는 자가 존재하는 것인가. 알려주세요. … 일본의 본원사本願寺는 법상의 학문을 가장 많이 연구한다. 중국은 어느 사찰에서 이 학문을 연구하는지 알려주세요.”

 

오구루스는 각 종파를 설명한 후, 말미에 현재 중국에서 불교가 쇠퇴한 이유를 질문한다. 질문의 의미는 중국의 모든 종파는 인도가 아닌 스스로 창출해서 대성했다. 일본불교는 모두 중국불교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중국불교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불교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중국불교 관계자들은 쇠퇴한 불교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일본불교의 종파를 파악해 중국에 대입시켜야 한다는 논조이다. 

 

일본불교의 아시아 진출을 위한 교두보

 

중국불교가 취약해졌다는 오구루스의 시각은 불교에 국한하지 않고 중국 전체가 정체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문명개화론’을 주장했다. 그의 문명개화론은 개화한 나라가 미개한 나라의 개화를 도와야 한다. 이는 만국의 간절한 소망이고 일본 역시 중국을 개화시킬 책임이 있다고 했다. 다만, 영국처럼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고 피력했다. 오구루스의 시각은 철저히 일본의 책임을 강조한 것으로 상대국의 입장은 가볍게 치부했다.

 

사진 4. 『오구루스 코쵸의 청말 중국체험』(2016).

 

오구루스는 중국인의 성정이 서양인을 매우 싫어하고 조선과 일본을 좋아하지만, 조선에는 인물이 없다고 했다. 중국은 개화하기 위해서 일본의 충고를 따라야 한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위세나 위협에는 순응하지 않을 것이고, 교사가 가르치는 것 역시 설득력이 없다. 승려가 먼저 건너가 진종의 극락왕생의 길과 현생의 편리함을 제공하면 중국인은 황국의 간곡함에 감탄할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의 민의를 얻기에는 진종이 적임자라고 주장했다.

 

“진종이 흥하고자 한다면, 만리장성의 동쪽에 사찰을 건립해야 한다. 만리장성 서쪽에는 라마교가 번창해서 회교도 미치지 못한다. 남경을 중앙으로 해서 사찰을 건립할 수 있다. (진종은) 본원타력本願他力과 육식대처의 이점이 있다. 학교를 세우고 교화시키기 위해 매일 설법회를 열면, 중국 승려들이 질투하고 숨어서 욕할 것이다. 하지만 후에는 모두 귀의할 것이다.”

 

중국포교 대상 지역을 찾는 계획은 구체적이면서도 중국 승려에게 육식대처의 이점을 알리겠다는 그의 계획은 다소 일방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결국 오구루스의 진종 포교 계획은 조선에도 기본틀이 그대로 적용되는 등 향후 일본불교의 아시아 진출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했다.

 

오구루스는 구체적으로 중국인을 귀의시키기 위해 3가지 안을 제시했다. 첫째는 공자의 가

르침을 이용하자는 것이다. 공자가 중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물론이고, 정토진종의 속제俗諦가 공자의 가르침에 부합한다. 따라서 정토진종 사원에 공자를 봉안하면 중국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이다. 

 

사진 5. 중국 열하성 라마교 사원. 엽서 사진.

 

둘째는 여성의 전족을 금하는 일이다. 전족이 여성에게 고통을 주는 악습이므로 전족풍습을 없애야 한다. 그는 전족과 진종 포교에 대해 “진종의 가르침을 진실하게 믿으면 전족을 하지 않더라도 정녀貞女가 될 수 있다.”고 그 관계를 설명했다. 다소 뜬금없는 주장이긴 하지만 개화시켜야 할, 혹은 교화시켜야 할 목록 중 하나로 전족을 바라본 건 사실이다. 셋째는 아편을 금지하는 것이다. 진종은 아편에 관한 규정을 세워 수천 명의 중국인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구루스의 제안은 중국 사회의 폐해를 직시한 후 나온 현실적 방안 제시였다. 어디까지나 오구루스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그는 단순히 진종의 교의를 전하는 것이 아닌, 중국사회를 개량시킬 수 있는 진종의 역할을 제시하려 했다. 나아가 중국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큰 라마교를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라마교와 진종 모두 아미타불을 모시고 염불과 육식을 하므로 진종의 교의 속에 라마교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구루스는 라마교의 교의를 수용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으나, 라마교의 수용 여부가 중국포교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판단한 것은 틀림없다. 

 

사진 6. 묘쇼지妙正寺. 오구루스 코쵸가 말년에 주지로 보냈다.

 

흥미로운 점은 오구루스가 중국포교를 위해 이안심異安心을 이용하자고 제안한 점이다. 이안심은 정토진종의 개산조인 신란親鸞을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견들을 의미한다. 이안심 문제는 이미 신란 재세 당시인 12세기에도 있었고, 에도시대에 논쟁이 가장 크게 격화되었다. 메이지 이후에도 진종교학과 서구 근대사상과의 접점에서 발생한 정토 논쟁 등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때문에 진종 교단은 이안심을 배제하려는 입장을 끊임없이 고수했다. 이러한 이안심을 오구루스가 이용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의 논점은 이안심자들은 염불을 잘하고 정의롭기보다는 끈기가 있으므로 중국에 파견해 언어를 습득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이들이 염불을 포교할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진종이 바라지 않는 염불을 이안심이 하더라도 그리스도교보다는 낫다고 했다.

 

오구루스의 중국포교 계획은 진종에 대한 자신감과 중국불교나 중국 사회에 대한 과소평가로 이루어진 낙관적 시각이었다는 평가가 크다. 당시 오구루스의 중국포교 계획이 정토진종 본산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별개로 두더라도 진종 포교를 위해 현실과 이상의 접점을 찾아 중국 사회에 침투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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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현재 아시아 종교문화 교류에 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ikemire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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