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인환스님 ⑥, 향곡스님의 법문을 듣고 출가를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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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 2023 년 6 월 [통권 제122호] / / 작성일23-06-05 09:42 / 조회2,287회 / 댓글0건본문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다
▶ 절로 들어가자마자 큰 스님의 법문을 들으셨군요?
그 날 향곡스님이 선암사 법당에서 하안거 해제법문을 하셨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해제라고 해도 이것은 이름이요, 숫자놀음일 뿐이요. 진정으로 정진하는 수좌들에게 해제라고 하는 것은 화두를 타파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 했을 때, 그게 진정한 해제입니다. 타파칠통打破漆桶을 해야 합니다. 90일을 지내고 백중이 되면 해제라고 해서 정진하는 마음을 늦추지 말고 계속해서 정진해야 합니다.”
해제한 이후 석 달 동안을 산철이라고 합니다. 산철에도 정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구석진 기둥 옆에 앉아서 해제법문과 법거량을 보면서 속으로 “아! 처음 부모 밑에 있던 세계, 피난 올 때 그 아수라 같고 지옥과 같았던 세계, 이 백암산 선암사에는 듣거나 보거나 경험해 보지도 못한 또 다른 세계가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조실 향곡스님과 수좌스님의 법문 거량을 보면서 아무것도 모르던 내 마음에도 그야말로 두 분이 진검을 가지고 생명을 걸고 하는 싸움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 느낌이 고스란히 내 가슴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아! 이런 세계가 또 있구나.”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보고 눈을 떴어요. 그리고 “이제 망설임 없다. 여기서 시작해서 일생 이 길을 가는 걸로 내 일생 정한다.” 무슨 설명이나 이유 그런 거 필요 없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고 그런 결심을 했어요.
법문이 끝난 다음에 부처님 전에 백중 시식을 끝내고 대중공양을 했어요. 절이 좁으니까 법당에도 상을 놓고, 마당에도 상을 놓고 모두 함께 공양하는데 나도 끼어서 점심을 했어요. 그랬더니 얼마 있다가 나를 인도해 준 천한행 보살님이 불러요. 참선 안거한 대중 가운데 대여섯 명이 향곡스님 상좌들이었어요. 지금 대구 여여선원의 혜운스님, 혜욱스님, 그 다음에 혜안스님 또 혜주스님 등 그 외에 또 각처에서 모인 참선 수행자들이 있었어요. 조실스님한테 인사하러 가자고 해서 따라갔지요. 향곡스님은 공양 끝나고 혼자 방안에 계시는데 여전히 몸을 흔들흔들하고 앉아 계시더군요.
▶그렇게 향곡스님과 첫 대면이 이루어졌군요?
천한행 보살님이 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자기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큰절을 하라고 해요. 보살님이 하는 대로 따라서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삼배를 하고 앉았지요. 보살님이 선암사 선방도 시주를 많이 하고 향곡스님 하고도 인연이 깊은 분이었어요. “스님, 이 학생이 불도를 닦겠다고, 스님이 되겠다고 해서 제가 안내해 왔습니다. 스님께 인사 올리려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큰 몸을 여전히 흔들흔들 하시면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굵직하고 괄괄한 목소리로 “니 뭐할라고 중노릇 할라카노? 허허허.” 하시면서 심한 사투리로 물었습니다.
아마 스님께서 나를 볼 때는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였기에 건방기가 있어 보였을 겁니다. 머리를 길렀을 당시 머리는 곱슬머리였고, 피난 간다고 어머니가 제일 좋은 옷을 입혔거든요. 지금처럼 안경이 흔치 않은 시절인데 금테 안경까지 쓰고 있었지요. 생긴 모양을 보아하니 절에 들어온들 얼마나 붙어 버틸 수 있겠느냐고 보셨을 수도 있지요. 그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처럼 “네. 그 창천, 창천 하시는 것 알아보고 싶어서 절에 있으려고 합니다.” 그랬지요. 스님은 더는 말씀을 안 하고 그냥 앉아 흔들흔들 몸을 흔들고 계셨어요. 그러니까 노보살님이 옆구리를 쿡 찌릅디다. 그래서 인사하고 나왔지요.
저녁 무렵에 보살님이 다시 날 불러요. “내가 여기까지 안내는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는가는 학생하기 나름이요. 이 선방에서는 절에 들어오겠다고 하는 사람 안 받아주거나 안 가는 사람을 억지로 내쫓는 일도 없을 것이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학생이 하기 나름이다.”
보살님이 내려가고 법당 앞 큰 은행나무 밑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지요. 그때 한 스님이 오셔서 “이 사람 집에 가야 하는데 왜 가지도 않고 이리 서 있나?” 그래서 나는 “절에 있을라고 왔습니다.”라고 답하니 “그러믄 저 뒤쪽에 부목방負木房이 있는데 거기 가서 하룻밤 같이 자거라.” 그래요. 그 스님이 절의 감사監寺를 맡고 계신 석암스님이셨어요. 향곡스님이 선암사의 주지 겸 조실스님이었지만 절에는 초하루와 보름, 한 달에 두 번 있는 법회 때 와서 법문만 하고 내려가셨어요. 그래서 석암스님이 감사로서 절의 살림살이를 맡으셨지요.
▶ 절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구요?
부목은 절의 일꾼이지요. 산에서 나무해 오던지, 채소를 가꾸는 등 온갖 일을 해요. 그때 선암사의 논이 절 밑에 있었어요. 절에는 부목이 네 사람 있었어요. 부목방에 갔더니 좀 험하게 생긴 분들인데 반갑게 맞아 줍디다. 그들이 말하길 젊은이들이 절에 있겠다고 찾아오지만 며칠 못 버티거나 한두 달 있다가 간다고 하더군요. 속으로는 너도 오래 있겠냐 뭐 그런 생각이었겠지요. 그들 사이에 끼어 자고 다음 날 아침 뭐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어젯밤에 서 있던 그 나무 밑에 또 서 있었어요.
나무하고 밥하는 행자생활
석암스님이 지나가다가 나를 보시고는 “어, 이 사람이 아직도 이러고 있나? 절에 있으려면 공밥 먹어서는 안 돼. 부목들 따라서 뒷산에 나무하는 일을 같이 해라.”고 하시더군요. 즉시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갔어요. 부목들과 같이 소나무 가지들을 적당하게 잘라 짊어졌어요. 이제 한 반쯤 내려오니까 다리가 후들거리더니 그만 비탈길에서 꼬꾸라졌어요. 부축받아 겨우 일어나니 정신이 까마득해요.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어요. 이렇게 산에 나무하기를 한 보름 가까이 했어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열심히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석암스님이 부엌일을 하라고 하셨어요. 이 말은 이제 절에 있어도 된다는 허락이지요. 소림선방 옆에 큰 부엌이 딸려 있어요. 그 부엌이 옛날의 전형적인 부엌이에요. 높은 천정에 굵은 대들보 서까래가 쭉 그대로 나와 있어요. 오랫동안 불 때 가지고 그을음이 붙어 있어요. 그때 나보다 먼저 들어온 행자가 하나 있었어요. 석 달 먼저 왔다는데 키가 전봇대만큼 커요. 내가 들어갔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맞아 주더군요. 그다음부터 약 1년 동안 부엌 옆에 딸린 후원 방에서 그와 무릎을 맞대고 지냈어요.
▶그분은 어떤 분이었나요?
그렇게 같이 지낸 사람이 바로 화엄학자로 유명한 김지견金知見 박사입니다. 세속 나이는 신미생으로 나와 동갑인데. 석 달 먼저 절에 들어왔지요. 그는 고향이 전라도 영암인데 이미 세속 때부터 서옹스님과 인연이 있었어요. 서옹스님이 피난 시절에 선암사 선방에 계셨어요.
스님께 출가하러 선암사에 온 겁니다. 둘이 공양주 한다고 참 죽이 잘 맞아 행자시절을 잘 지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는 키 크고, 하나는 작은 게 잘 어울려 산다고 한산寒山 습득拾得과 같다고 하는 분도 계셨어요. 선암사 1년의 행자시절 에피소드가 많지만 다 할 수는 없고, 몇 가지 별다른 얘기나 조금 하겠습니다.
▶원산에서 부잣집 아들로 사셨는데 행자생활이 힘들지 않았습니까?
여름 백중 때 선암사에 들어갔으니 제일 더울 때 아닙니까? 새벽 3시에 목탁 치면 일어나 김지견 박사와 둘이서 공양 준비를 합니다. 선방 수좌 40여 명 계시고 부목들, 기도하러 온 신도들 합쳐서 60여 명쯤 됐어요. 하루 세끼를 행자 둘이서 하나는 공양주하고, 나는 반찬 장만하고 국 끓이는 것, 갱두라고도 하고 또 채공菜供이라고 하지요. 잠시라도 쉴 새가 없어요. 대중과 같이 세벽예불 모시고, 대중들이 선방에 들어가면 우리는 부엌으로 들어가는데 공양주는 아침 죽을 쑵니다. 큰 무쇠솥에다가 육십 명이 먹는 죽이니까 적지 않아요.
나는 간단한 찬상을 준비합니다. 아침 두 시간 선방에서 정진한 수좌들이 6시쯤에 아침 죽 공양을 해요. 놋으로 만든 다리 셋 달린 대야 두 개에 죽을 퍼서 마루에 갖다 놓고, 찬상 7~8개를 줄을 세워 놓으면 젊은 스님들이 나와서 들고 들어갑니다. 공양 후 8시가 되면 다시 선방에 들어가 10시까지 또 참선 정진합니다. 10시 반쯤 되면 법당에 사시마지를 올리고 12시 조금 넘으면 큰 방에 모여 점심 공양을 합니다. 어느 날 노장스님이 공양간에 오셔서 말씀하셨어요.
“공양주하기 쉽지 않지? 대중 가운데는 나이가 많은 노장들도 여럿 계시고 젊은 사람들, 중견이 뒤섞여 있어 모든 이에게 딱 맞게 할 수가 없지. 옛날에 금강산 마하연 선방에 음식 솜씨가 좋은 공양주가 있었어. 신분은 스님인데 나이 60 가까울 때까지 이 절 저 절 다니면서 주로 공양주를 하셨다네. 한 번은 어느 노장님이 선방에는 이 없는 사람도 많으니 되지 않게 조금 물기 있게 밥을 하라고 했다네.
그래서 그다음엔 조금 묽게 밥을 했단 말이여. 그랬더니 젊은 스님들이 와서는 무슨 밥을 그렇게 죽밥을 했냐고 야단을 치더란 말이야.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님이 이제 공양주 하는 것도 내게는 한계가 왔다고 생각했다네. 그래서 이튿날 점심 공양 때는 밥을 세 가지로 지었어. 아주 질게 노인들도 편히 잡술 수 있게, 또 하나는 아주 고들고들, 그다음에 중간으로 지었어. 이 세 가지를 큰 방에다 놓고는 오늘은 내가 재주껏 밥을 세 가지로 지어서 올리니 입맛 닿는 대로 드시오. 하하, 이제 나는 갑니다. 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네.” 선방에는 노소가 함께 있어 밥 하나라도 제대로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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