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불교는 지금]
일본 정토진종의 변용과 미국 토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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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근 / 2023 년 6 월 [통권 제122호] / / 작성일23-06-05 09:48 / 조회2,218회 / 댓글0건본문
세계불교는 지금 6 |미국 ⑥
하와이 정토교구 2대 교구장 이마무라 스님은 취임 이후 정토진종의 내실을 기하고 정착을 위한 노력을 하는 한편 국제불교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였다. 미국 신지학회 회장인 H.S. 올코트 대령이 1901년 2월 하와이를 방문하였을 때, 이마무라 스님은 올코트 대령의 강연회를 개최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최초로 미국 땅을 밟은 한국 스님
중국불교 지도자 태허스님이 1929년 4월 19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는데 이마무라 스님은 태허스님을 만나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또 그 해에 인도의 유명한 시인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하와이를 방문하였을 때 정토진종 별원에서 강연하였다. 1930년에는 ‘범태평양 불교청년대회(1930년 7월 21일~26일)’를 일본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하와이 별원 불교청년회가 주최하였다. 이 행사에 조선 출신의 도진호 스님을 비롯하여 일본, 미국, 인도의 청년불교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순천 출신으로 쌍계사가 본사인 도진호 스님은 최남선 씨가 집필한 『조선불교』의 내용을 중심으로 발표하였다. Honolulu Advertiser라는 신문에 이 불교청년대회에 관한 보도가 실려 있고, 도진호 스님의 사진도 나와 있다. 도진호 스님 외에 장구를 메고, 고깔모자를 쓴 ‘Yong Ha Chai’라는 또 한 스님(Buddhist Monk)의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는데, 그는 승무(Temple dance)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보도되었다.
도진호 스님과 용하스님은 미국에 온 첫 번째 스님이 되는 것이다. 이 행사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간 도진호 스님은 1931년 9월에 다시 하와이에 들어와서 살았지만 스님으로서 사찰을 만들고 포교활동을 한 기록은 없다는 것이 오랫동안 하와이에서 스님의 행적을 조사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결론이다.
도진호 스님의 하와이 생활에 관해서는 성원스님이 하와이대학교 교수 시절 많은 시간을 들여 조사하였다. 이에 앞서 1903년 하와이에서 시작한 한국인 미국이민 100주년을 맞이하여 여러 학자들도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남긴 도진호 스님의 행적을 조사하였다. 도진호스님은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사회활동과 독립활동을 활발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도진호 스님이 포교당을 운영하였다는 기록과 증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1932년 12월 8일자 조선에서 발행된 『금강저』 63쪽에 따르면 도진호 스님의 주장으로 하와이에 고려선사를 창건하여 포교활동을 하였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성원스님은 「미주 한국불교의 역사와 과제」라는 글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도진호 스님은 나중에 개신교로 개종하였고, 결혼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다. 말년에는 자녀들이 사는 로스엔젤레스로 가서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첫 번째로 미국 땅을 밟은 한국스님인 것은 맞지만 미주 한국 불교계에서는 1964년 유학차 미국으로 건너온 서경보 스님을 미주 한국불교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진주만 공격 후 정토진종의 변화
32년간 교구장으로 봉직한 이마무라 스님은 1932년 12월 65세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의 입적과 더불어 하와이 일본불교는 성장의 동력을 상실하고 퇴보하였다. 그리고 하와이의 일본 불교계에 큰 시련을 안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일본의 공격으로 하와이의 일본 불교계는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미국의 본토와 하와이에서 일본어 학교와 사찰들은 폐쇄되었다.
정토진종 본원사파 하와이 별원 기숙사는 군대 막사로 사용되었다. 하와이 별원의 스님들은 미국 FBI의 공격적 조사를 예상하고 일본어로 된 모든 기록들을 소각하였다. 하와이 일본계 가족들도 일본어로 된 모든 기록들을 소각하였다. 하와이의 일본사회는 극심한 반일본의 분위기 속에 노출되었다. 1941년 12월 8일 하와이에서 활동하는 불교 성직자와 신도, 일본어학교 교사 등 370명에 달하는 지도자급 인사들이 감금되었다.
이때 본원사파 하와이 교구장인 구치바 스님, 조동종 하와이 교구장인 젠쿄 코마가타 스님, 그리고 정토종 하와이 교구장인 쿄구조 쿠보카와 스님도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약 4년간의 전쟁을 거친 후 미국은 제2차 대전에서 승리하였다. 그 승리의 결과로 미국사회에서는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가 팽배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하와이를 비롯한 미국의 일본불교 포교당들도 1946년 재개되었다.
정토진종의 대대적인 정책 변화
다시 활동을 재개한 하와이 교구 정토진종 본원사파는 정책기조를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일본 본원사파 본부에서 파견한 교구장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고, 교구 소속의 스님을 교구장으로 선출하기로 하였다. 정책 결정권도 출가자 그룹에서 재가자 그룹으로 이양하여 민주화하였다. 코도 후지타니 스님이 교구장이 되었는데, 그는 일본인 2세 뉴톤 이시우라 스님을 하와이 별원의 영어부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시우라 스님의 지도력으로 많은 청년들이 일요 영어법회에 참석하였다. 일본식 또는 중국식 독경은 범어식 또는 영어식 독경으로 바뀌었다. 하와이 교구장을 역임한 코도 후지타니 스님의 아들인 요시아키 후지타니 스님이 1960년 영어부 책임자가 되었다. 후지타니 스님은 하와이 별원을 대표하여 종교 일치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하와이 별원의 신자들은 호놀룰루의 유태교, 유니테어리언unitarian, 성공회의 신자들과 더불어 1960년 추수감사절 예배를 공동으로 주최하였다. 하와이 교구는 1960년 초 기독교의 크리스마스와 부활절과 같이 부처님오신날을 하와이주 국경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하와이주 하원의원으로 하와이 정토진종 교구 신자인 잭 수와 그리고 주 상원의원으로 역시 하와이 교구 신자인 카주히사 아베가 부처님오신날인 4월 8일을 주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안을 하와이주의회에 상정하였다. 4만 명 이상이 서명하여 부처님오신날을 주 국경일로 지정해 달라고 주의회에 청원하였다. 하와이의 대표적인 노조들도 일본불교를 응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회는 부처님오신날을 주 국경일로 지정하지 않았다.
하와이의 다양한 민족적, 인종적, 그리고 문화적 배경 때문에 하와이 주민의 종교적 배경은 매우 다양하였다. 하와이 토속종교, 기독교의 신교와 구교, 힌두교, 유태교, 이슬람교, 신도, 그리고 중국과 일본불교가 하와이에 병존했다. 그 가운데 일본 이민자의 수가 하와이에 가장 많은 관계로 일본불교는 20세기 초반 하와이에서 가장 많은 신자수를 확보하고 있었다. 일본불교 중에서는 정토진종 본원사파의 신도수가 가장 많았다. 1930년경에는 170여 개에 달하는 일본불교 포교당들이 하와이 전역에 산재하였다.
현재 미주 한국 불교계 사찰수가 100개 정도인 것에 비추어보면 엄청난 숫자이다. 1889년 이래 2023년 현재까지 134년 동안 일본불교는 하와이 일본사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와이의 일본 종교계는 2세 교육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중에서 정토진종은 특히 큰 성과를 보았고, 지금도 큰 규모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일본불교의 성장은 엄청난 노력과 희생의 결과물로 얻어진 것이었다.
주류에 합류한 정토진종
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인들은 억류의 트라우마와 굴욕감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본계 미국인들은 미국 중류층의 소규모 민족종교 집단으로 부상했다. 자신감을 새롭게 다진 그들은 세속적인 영역의 정치적, 종교적 논쟁에서 그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일본 정토진종은 1980년대와 9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공립학교교과과정 논쟁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다문화교육에 대한 국가의 충실성을 시험한 것이기도 했다.
일본 정토진종의 법회연구위원회 역시 일본계 미국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친기독교·반불교적 편향을 보이는 미국 초등학교 교재에 대해 효과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일본 정토진종은 공립학교에서 창조론과 기도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강력한 ‘분리의 벽’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채택하였다. 또한 인종 및 종교 소수자에 의한 헌법소원이라는 오래된 전통에 합류하기도 했다.
1960년대부터 미국 본토에서 선禪을 중심으로 한 바람이 불면서 미국불교에서 주도권은 조동종으로 넘어갔다. 미국인들은 대부분 선수행 위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선방이 없으면 바로 나가버리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에서는 정토진종도 염불당 외에 선방을 만들었지만 이미 주도권은 조동종으로 넘어간 뒤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이민자 감소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펼친 정토진종에게는 신도 감소라는 문제로 나타났다.
정토진종이 직면한 문제와 미주 한국불교
미국의 50개 주에서 하와이는 섬이고 인구도 적지만 불교와는 인연 깊은 곳이다. 미국에서 인구 대비 불교인 숫자가 가장 많은 주는 하와이라고 할 수 있다. 인구 대비 사찰 숫자도 많다. 그리고 미연방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중에서 불교인은 극소수인데, 하와이에서는 일본 불교계 신자들이 상원의원에 선출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된 것은 일본 불교계 영향이 크다. 그러나 이제 하와이에서 일본 불교계는 신자 감소세로 돌아선 지 오래 되었다.
현재 미국불교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이다. 유럽계 백인 불교신자들과 아시아 불교국가 이민자들의 그룹이 그것이다. 미국에서 일본 불교계는 여타 아시아 불교 국가에 비해 60년 이상 먼저 시작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일본 경제가 부흥하면서 일본 이민자 감소가 시작되었다. 이민자 감소는 정토진종처럼 이민자를 주 대상으로 하는 종단에게는 큰 숙제거리가 되었다.
현재 미국 정토진종의 모든 교구가 안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는 신도수 감소, 성직자 수급문제, 주류사회에 대한 포교문제 등이다. 이 문제는 미주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정토진종은 미국에 있는 불교 그룹 중에서 창가학회와 더불어 가장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므로 정토진종이 직면한 문제를 각 교구에 맞게 개선하려는 노력과 성과를 미주 한국 불교계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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