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의 장인을 찾아서]
꽃살문, 극락세계의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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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리 / 2023 년 6 월 [통권 제122호] / / 작성일23-06-05 11:39 / 조회4,033회 / 댓글2건본문
소목장 창호 보유자 김순기
문은 새로운 공간으로 진입하는 서두이다. 문으로 닫혀진 공간은 아직 알 수 없는 미지未知이고, 문을 열고 첫발을 디뎌 안쪽으로 진입함으로 비로소 낯선 공간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문은 내부를 감추거나 보안의 역할을 하지만, 반대로 새로운 공간으로 입장하는 첫 걸음의 시작과 소통의 역할을 하기도 하다.
문, 꽃살문의 의미
문은 이쪽과 저쪽을 엮는 연결고리이다. 사찰 공간에서 문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쪽은 사바의 고통을 안고 사는 중생의 공간이고, 저쪽은 극락정토極樂淨土의 부처님의 공간이다. 그 때문인가 법당문을 열기 전이면 언제나 긴장감이 흐른다.
사진 2. 빗모란 꽃살문.
어떤 모습의 부처님이 기다리고 계실지도 궁금하고, 잠시 일상의 고단함은 문밖에 세워두고 마음의 정화를 맞을 설렘이 공존하게 된다.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순간 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극락의 세계로 진입하는 문은 법당을 상서롭고 숭엄한 공간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최상의 장엄과 화사함으로 꾸며진다. 꽃으로 가득 채운 꽃살문이야말로 극락으로 들어가는 문이기에 최고로 여겨졌다. 사찰의 꽃살문에 쓰인 꽃은 부처님께 올리는 여섯 공양물 중 하나이다. 육법공양물은 향香, 화化, 등燈, 차茶, 과果, 미米를 말하는데, 이 중 꽃은 정신적인 것으로서, 향이 법신法身을, 등이 화신化身을 상징하고, 꽃은 보신報身을 상징한다. 그래서 법당 문을 장식하고 있는 꽃들은 부처님 지혜의 상相이 될 수 있고, 부처님을 향한 중생들의 존경과 신심이 담긴 공양화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우리 사찰의 꽃살문
꽃살문의 화사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청·적·황·백·흑 등 오방색을 기본으로 단청을 한다. 색을 입은 꽃들은 더 찬란해지고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다. 그렇다고 모든 꽃살문에 채색을 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단청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오랜 시간 비바람과 햇살을 맞으며 색이 바래고 벗겨져 나무의 본래색이 드러나기도 한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살문은 일정한 크기의 꽃을 일률적으로 배치하여 대칭적 반복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꽃살문과 달리 꽃의 종류와 모양, 크기에 변화를 주어 다채로운 조형미가 매력적이다. 채색을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아름답다. 모란과 연꽃이 수줍은 봉우리로, 화려하게 만개한 꽃으로 자태를 뽐낸다. 단청 없이 나무 자체에 고아하게 수놓아진 꽃들만으로도 충분히 우아하고 화려하다.
범어사梵魚寺 독성전은 입구의 틀을 하나의 통재를 사용해서 반원형으로 만들고 모란과 동자를 조각하여 꾸민 장식수법이 독특한데 입체적인 꽃살문에 파스텔풍의 단청을 하였다. 오랜 세월 속에서 꽃살문 단청이 퇴색되어 본래 나무의 빛이 드러나자 다시 재단청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통도사 적멸보궁, 신흥사 극락보전, 동화사 대웅전, 마곡사 대광보전, 남장사 극락보전, 정수사 대웅전, 선암사 원통전, 기림사 대적광전, 운문사 비로전, 불갑사 대웅전 등 우리가 찾아보고 자세히 들여다볼 아름다운 꽃살문들이 전국에 포진해 있다.
꽃을 새기는 김순기 소목장
꽃살문은 소목장이 제작한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14호 소목장 김순기 선생의 작업장인 수원의 창호공방을 찾았다. 공방이 있는 동네도,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공방도 오래되고 안정된 모습이다. 원로인 김순기 소목장은 오래되고 비바람을 이겨낸 소나무 같다. 고목껍질 같은 손등과 부상으로 모자란 수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1940년 안성에서 태어나 14세의 어린 나이부터 나무를 자르고, 깎고, 옮기고, 다루는 일을 지금까지 한결같이 걸어왔으니, 그 안에 한 세월의 사연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의 소목장 인생을 잠시 들어보자. 그렇게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넉넉지 않은 집안의 장남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기는 어려웠다. 식구들을 위해 밥벌이 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타지에서 남 아래 잔심부름하며 시작한 목공일이 춥고 서러운 날들도 많았지만 그렇게 고단함을 이겨내며 12년을 보내게 된다. 당시 기술을 배울 때는 도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도면이 있다고 한들 따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낮에 실컷 혼나고 밤에 이를 갈며 혼자 만들어 봐야 겨우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 쉽지 않은 나날이었다.
그는 1987년 26세에 드디어 목공소를 차려서 독립하게 된다. 지금의 북수동 성당 뒤 초가의 8평 남짓한 작업장이었다. 나이로는 어리지만 이미 오랜 기간 나무 작업에 익숙해졌고 기술도 좋아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때이다. 나무 한 수레, 기본 연장 두 벌로 초라한 시작이었다. 그러나 수원에서 유명했던 소목장 이규선 선생에게 10년 동안 배운 기술이 그에게는 든든한 밑바탕이었고, 무엇보다 문을 제작하는 일은 그에게 신명이었기에 독립적인 공간이 생긴 것만으로도 한없이 기쁘고 행복한 일이었다.
그가 제작하는 창호는 문양별로 완자창卍字窓, 세살문, 빗살문, 꽃살문 등이다. 고급 문일수록 창살 수가 많은데, 흠 하나에 0.1mm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아 제작에 공이 많이 들어간다고 한다. 창호의 최고는 역시 꽃살문이다. 이 창살은 멀리서 보면 사선의 격자무늬 같지만, 자세히 보면 벌집처럼 육각무늬라고 한다. 멀리서 보면 반복되는 단순한 패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정교하게 조각하여 짜맞추는 고급기술이 필요한 분야이다.
꽃살문의 완성된 꽃무늬 하나를 만들려면 여러 조각을 깎아 결합해야 한다. 모양대로 깎아 간단하게 붙이는 게 아니라 사개물림과 엇갈리게 물리는 방법으로 문살을 만들어 결합한다. 각각이 분리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하나여야 하기에 과학과 수학 계산이 절묘하게 딱 들어맞아야 한다.
경복궁, 광화문, 화성행궁, 남한산성 등 국가 중요 문화재는 물론 양평 이항로 생가, 여주 명성황후 생가, 이승만·최규하·조병옥 등 유명한 인물들의 집에는 그가 만든 문이 달려 있다. 1969년 용인 성불사를 시작으로 상원사, 월정사, 용주사, 월상사, 용화사, 칠장사, 광덕사, 반야사, 관음사 등 많은 사찰에서 그가 제작한 문살을 만날 수 있다. 그간에 작업했던 기록을 모은 오래된 작업 노트 안에는 지금까지 그가 제작한 여러 곳의 다양한 창호 이야기가 역사처럼 남아 있다. 밴쿠버올림픽에서는 ‘한-캐나다공예특별전’에 창호 제작 장인으로는 유일하게 참가해 ‘꽃교살문’으로 한국의 미美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목수로서 한 일 중 가장 자랑스러운 일은 광화문 창호를 짠 것이랍니다. 서울 중심 역사적인 장소에 올려지는 것이라 더 신경이 쓰이기도 했고 뿌듯한 마음이 들었지요. 이렇게 좋은 일도 많았지만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겪을 때도 있었어요. 위험한 연장을 사용하다 보니 잔잔한 상처는 일상이고요, 화령전 보수공사 하다가 오른손 가락이 두개나 절단되는 사고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땐 정말 삶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죠. 일을 하는데 불편한 것도 그렇고 불구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참기 어려웠어요. 한참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방황하다 저보다 힘든 상황의 장애인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들이 나보다 더 험한 일을 꿋꿋하게 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반성하였지요. ‘나의 고난은 감당이 가능하겠구나. 더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하고요. 그렇게 일을 계속 이어오게 되었고, 지금은 마음도 편안하고 삶을 이해하는 나이가 된 것 같아요.”
가족을 위해 창호를 만들다
주름진 김순기 소목장의 표정이 편안해 보인다. 갑자기 보이고 싶은 곳이 있다며 자리를 옮긴다. 일만큼 가족과 가족의 공간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그는 본인의 집으로 필자를 이끈다. 분명히 밖에서 보면 평범한 양옥 건물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전혀 새로운 모습의 공간이다. 전통 한옥식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무늬의 창호들을 종류별로 볼 수 있다.
화장실 문은 사찰에서 주로 쓰는 꽃살문이고, 안방 문은 임금님의 공간인 강령전과 같은 문살이다. 소목장의 집은 실용성을 더한 창호박물관 같다. 꽃을 좋아하는 부인은 마당에 철따라 피는 꽃나무를 가꾸고, 선생이 직접 만든 다양한 문살들은 꽃들의 담장이 되어 준다. 이 가족이 얼마나 오순도순 정답게 살아가고 있는지 집안의 분위기가 충분히 말해 준다.
그는 창호를 짜는 목수라는 데 누구보다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창호로 제일가는 사람은 나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만큼 성실한 노력으로 긴 세월 꾸준히 해 온 데서 오는 자신감일 것이다. 그의 창고에는 새로운 문으로 태어날 목재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좋은 목재는 성실하고 솜씨 좋은 장인의 손을 통해 아름다운 쓰임이 되는 문으로 거듭난다. 사람들은 그 문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맞이하게 되고 공간과의 소통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무심코 지나치면 보이지 않는다. 이제부터 아름다운 문양의 문살을 마주하게 된다면 자세히 들여다보자. 새겨진 하나하나의 모습이 다르고 그 안에 녹아 있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좋은 문객門客, 문을 사용하는 손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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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전정애님의 댓글
전정애 작성일
중현 김세리 선생님의 글은 언제나 따듯하고 맑다
꽃살문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글을 읽는 내내 꽃길을 걷는 기분이다.
내소사 대웅보전 빗 국화 꽃살문, 범어사 독성전 솟을 매화 꽃살문,
선암사 꽃살문, 대성사 꽃살문, 김순기 소목장댁 거실과 주방을 잇는 문 등이 마치 활짝 핀 꽃 같다.
그리고... 가슴이 찡해서 한참을 바라본 사진 속의 지팡이와 걸음 보조기 및 그 동안 작업했던 작업 노트에서 김순기 소목장 창호 보유자의 애환과 예술혼이 느껴진다.
중현 김세리 선생님의 글엔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해 주는 꽃살문 같은 아름다움이 있어 참 좋다. 이번 글은 더 그렇다.
김연화님의 댓글
김연화 작성일
극락의 세계로 진입하는 문은 법당을 상서롭고 숭엄한 공간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최상의 장엄과 화사함으로 꾸며진다~~화려하게 하는지만 알고 의미 몰랐는데 ~~
또 하나 깨우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