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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 이야기]
임제종 ⑤ - 임제삼구와 삼현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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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3 년 6 월 [통권 제122호]  /     /  작성일23-06-05 11:56  /   조회5,24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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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종의 종주宗主인 의현의 선사상은 종전으로 추앙받는 『육조단경』으로부터 마조-황벽의 선사상, 이른바 남종선南宗禪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위앙종 이후에는 더는 남종선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조사선으로 칭한다. 그것은 위앙종에서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을 분별하면서 여래선은 추구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논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중국에서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을 구분하면서 오직 ‘대승’만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매도하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라 하겠다. 

 

전기 조사선과 후기 조사선

 

그러나 소승에 속하는 오온五蘊·사제四諦와 십이연기十二緣起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다면 이른바 대승의 핵심인 반야般若를 중심으로 하는 보살도菩薩道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른바 ‘여래선’의 바탕이 없다면, ‘조사선’의 선리禪理는 결코 체오體悟할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승이나 여래선에 국한되어서는 또한 대승의 반야와 조사선을 이해할 수 없음도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사선과 여래선의 분판分辦에는 철저하게 ‘돈오頓悟’가 개입되어 있다. 그러한 까닭에 돈오를 지극히 강조한 『단경』이나 마조 등의 남종선도 후대에서는 조사선으로 편입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명확한 사상적 변화에 따라 『단경』 등의 남종선을 ‘전기 조사선’, 오가五家 분등分燈 이후를 ‘후기 조사선’으로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단경』에서는 “자성自性을 돈수頓修할 뿐으로 점차漸次는 없는 것이다.”(주1)라고 하여 ‘점차’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이른바 ‘돈오돈수頓悟頓修’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스스로 ‘돈오’할 수 없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에 따라 『단경』에서는 “각각 스스로 관심觀心하여 자신의 본성本性으로 ‘돈오’하게 하라! 만약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자는 모름지기 대선지식大善知識의 시도示道를 찾아서 견성見性하라!”(주2)라고 자상하게 일러주고 있다. 더욱이 “만약 (선지식의 지시를 만나) 스스로 깨달았다면 밖으로 (다시) 선지식을 구해 의존할 필요가 없다.”(주3)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사진 1. 성철스님의 일원상.

 

이러한 『단경』의 사상을 계승한 마조馬祖는 “만약 상근중생上根衆生이라면 홀연히 선지식의 지시指示를 만나 다시 계급階級과 지위地位를 거치지 않고서 본성을 돈오할 것이다.”(주4)라고 한다. 이로부터 마조는 『단경』에서 인정한 스스로 돈오함을 어느 정도 부정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상근중생’이어야 비로소 선지식의 지시를 만나 돈오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돈오가 지극히 어려움을 고려하여 한 말로 이해된다. 이렇게 철저하게 ‘돈오’를 강조하는 조사선에서는 당연히 선지식의 ‘지시’를 가장 중시하게 되었고, 그러한 까닭에 마조로부터 직접 대면을 통한 학인들을 접인接引하는 방법, 즉 제접법提接法이 다양하게 출현하게 되었다.

임제종 역시 다양한 제접법이 나타나는데, 무엇보다도 이른바 ‘임제삼구臨濟三句’로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임제삼구

 

『임제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만약 제일구第一句 가운데 얻음이 있다면 조사와 부처에게 스승이 될 수 있고, 만약 제이구第二句 가운데 얻음이 있다면 천인天人에게 스승이 될 수 있으며, 만약 제삼구第三句 가운데 얻음이 있다면 자신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주5)

 

이렇게 이른바 ‘임제삼구’를 제시하고 있는데, 당연히 이에 대한 질문이 나타난 것이다. 그에 따라 『임제어록』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승려가 바로 묻기를 “무엇이 제일구입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삼요三要에 주점朱點을 찍어 주인과 객을 헤아려 나누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무엇이 제이구입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묘해妙解가 어찌 무착無著의 질문을 용납하겠는가! 그러나 방편[漚和]으로 어찌 (번뇌의) 흐름을 끊은 근기根機를 저버리겠는가!”라고 하였다. “무엇이 제삼구입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무대 위의 놀아나는 꼭두각시를 보아라. 그를 당기고 늘어뜨리는 것은 모두 그 뒤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라고 하였다.(주6)

 

이로부터 의현이 제시하는 ‘삼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해석할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우선 제일구는 ‘삼요’에 완전히 계합契合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주점을 찍음[朱點側]’은 관부의 공문公文에서 중요한 대목에는 붉은 점을 찍는 관행을 의미하는데, 그만큼 삼요가 중요하다는 의미이고, 이 삼요의 핵심은 주主·빈賓을 헤아려 나누지 않음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다시 삼요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나는데, 『임제어록』에서는 이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이 삼요는 바로 이 구절 앞에서 언급한 ‘진불무형眞佛無形, 진도무체眞道無體, 진법무상眞法無相’을 의미한다고 추정할 수도 있고, 또 의현이 설한 삼현삼요三玄三要로부터 유추할 수도 있지만 삼현삼요와 관련된 설명은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하겠다.

 

우선 이 삼요는 바로 ‘무형·무체·무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단경』의 ‘무념·무상·무주’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조사선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곧 “분변하면 이미 얻지 못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주인과 객을 헤아려 나누는 것을 용납하지 않음”을 말하며, 그것은 곧 돈오를 의미한다. 따라서 가히 제일구에서 깨닫는다면 조사와 부처에게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제이구에 보이는 “묘해가 무착의 질문을 용납하겠는가!”라는 구절은 『신승전神僧傳』 등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무착이 문수보살[妙解]의 도량으로 알려진 오대산五臺山 참배를 위하여 오대산에 도착하여 문수보살의 화현化現이라는 노인을 만나 “이곳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주지住持합니까?”라고 물었다. 노인은 “용과 뱀이 섞여 있고, 범부와 성인이 함께 머문다.”라고 답하였다. 다시 “대중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라고 묻자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라고 답하였다.(주7)

 

여기에 등장하는 ‘용사혼잡龍蛇混雜 범성동거凡聖同居’와 ‘전삼삼 후삼삼’의 구절은 조사선에서 상당히 많이 언급되는 구절이다. 의현은 이 문답에서 무착이 문수보살인 묘해의 답변에 계합하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구화구사라漚和俱舍羅’ 즉 방편의 입장에서는 번뇌에 집착이 없는 ‘무착’을 결코 저버릴 수 없음이고, 그에 따라 ‘천인에게 스승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제이구는 여래선의 경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사진 2. 경봉스님의 일원상.

 

마지막 제삼구는 바로 외부의 경계에 따라 번뇌에 흔들리는 일반 중생들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겠다. 마치 꼭두각시와 같이 사람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상태로 이러한 경지는 “자신도 구원할 수 없음”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임제삼구는 보는 견해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제일구는 바로 조사선의 본연인 돈오를 확철하게 이룬 경지, 제이구는 방편적인 여래선 혹은 교학에서 추구하는 경지境智 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제삼구는 그대로 중생의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삼현삼요

 

『임제어록』에서는 이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한마디 말[一句語]에는 반드시 삼현문三玄門을 갖추어야 하고, 일현문一玄門은 반드시 삼요三要를 갖추어야 권權과 용用이 있다. 너희들 모두는 어떻게 깨닫겠는가?”(주8)

 

이를 삼현삼요라고 하는데, 『임제어록』에서는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있다. 그러나 『인천안목人天眼目』에서는 “삼현이란 현중현玄中玄, 체중현體中玄, 구중현句中玄이고, 삼요三要란 하나의 현玄 가운데 삼요를 갖춘 것으로, 하나의 할[一喝] 가운데로부터 삼현삼요를 체현體現하여 포섭한다.”(주9)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의현이 말한 삼현문을 ‘현중현, 체중현, 구중현’으로 보고 있다고 하겠다. 『인천안목』에서는 이를 상세히 분별하지 않지만, 『오가종지찬요五家宗旨纂要』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분별하고 있다.

 

첫째, 현중현. 조주趙州가 답한 ‘뜰 앞의 잣나무’의 화두와 같다. 이 말은 체體 위에서 또한 체에 머무르지 않고, 구句 가운데 있으면서 또한 구에 집착하지 않는다. 묘하고 현묘함이 다함이 없으니, 일을 기機에 두지 않는다. 마치 기러기가 드넓은 하늘을 지나면서 그림자가 차가운 물에 잠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또한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칭한다. …

 

둘째, 구중현. 마치 장공張公이 술을 마셨는데 이공李公이 취한 것과 같다. 앞이 33이고, 뒤가 33이다. 66은 36이요, 그 가운데 뜻으로 헤아릴 길이 없다. 비록 체體에서 발현된 것이지만 이 한 구절은 체에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

 

셋째, 체중현. 이것은 바로 최초의 한 구절[一句]이며, 진체眞體에서 발현되어 이 한 구절은 바로 체중현을 갖춘다. 언어로 인하여 이치를 드러내고, 그로써 현묘함[玄] 가운데 체體를 나타낸다. 비록 이 도리가 밝혀져도 이에 기용機用이 계위階位를 못 떠나기 때문이다.(주10)

 

이러한 설명에서 의현의 삼현삼요를 주로 언어의 공능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현중현, 체중현, 구중현’은 앞의 임제삼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그에 따라 현중현은 제일구에 배대할 수 있으며, 가장 높은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비록 심체心體로부터 나오지만, 결코 그 체와 구에 머물지 않으며, 마치 기러기가 그림자를 물 위에 드리우는 것과 같아 이를 용중현이라고도 칭한다고 한다.

 

둘째의 구중현은 언어가 심체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서 ‘체 가운데 현묘함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 체에 구속됨을 경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마치 여래선에서 여래의 궁극적인 경지를 체득하고자 애쓰는 것과 같다는 의미라 하겠고, 앞의 임제삼구 가운데 제이구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사진 3. 법정스님의 일원상.

 

셋째의 체중현은 일반적인 언어활동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모두 심체로부터 발현되어 참다운 진리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그에 철저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조사선의 입장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용이 계위를 못 떠남’이라고 단정하는 것이고, 이는 제삼구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상으로 간략하게 임제삼구와 삼현삼요를 살펴보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임제삼구와 삼현삼요에는 상당히 많은 의미의 메타포가 숨어 있어 그것을 모두 설명함이 가능하지 않다. 다만 여기에서는 의현이 설정한 가장 기본적인 의미만을 논했을 뿐이다. 이 임제삼구와 삼현삼요는 의현이 학인을 제접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세웠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의현은 이를 바탕으로 방할棒喝과 사료간四料簡, 사빈주四賓主 등의 제접법을 설시하고 있는데, 이에 이어서 그를 살펴보고자 한다.

 

<각주>

(주1)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42c), “自性頓修, 無有漸次.”

(주2) 앞의 책(大正藏48, 340c), “各自觀心, 令自本性頓悟! 若不能自悟者, 須覓大善知識示道見性!”

(주3) 앞의 책, “若自悟者, 不假外求善知識.”

(주4) 『江西馬祖道一禪師語錄』(卍續藏69, 2c), “若是上根衆生, 忽爾遇善知識指示, 言下領會, 更不歷於階級地位, 頓悟本性.”

(주5) [唐]慧然集,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大正藏47, 501c),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

(주6) 앞의 책, “僧便問: 如何是第一句? 師曰: 三要印開朱點側, 未容擬議主賓分. 曰: 如何是第二句? 師曰: 妙解豈容無著問! 漚和爭負截流機. 曰: 如何是第三句? 師曰: 看取棚頭弄傀儡, 抽牽都籍裏頭人.”

(주7) 『神僧傳』(大正藏50, 1007b), “著問: 此間佛法如何住持? 曰: 龍蛇混雜凡聖同居. 曰: 衆幾何? 曰: 前三三後三三.”

(주8) [唐]慧然集, 『鎮州臨濟慧照禪師語錄』(大正藏47, 497a), “一句語須具三玄門, 一玄門須具三要, 有權有用. 汝等諸人作麼生會?”

(주9) [宋]智昭集, 『人天眼目』 卷2(大正藏48, 311b), “三玄者, 玄中玄、體中玄、句中玄. 三要者, 一玄中具三要, 自是一喝中, 體攝三玄三要也.”

(주10) [淸]性統編, 『五家宗旨纂要』 卷1(『卍續藏』65, 257a), “第一玄中玄. 如趙州答庭柏話. 此語於體上又不住於體, 於句中又不著於句. 妙玄無盡, 事不投機. 如雁過長空, 影沈寒水. 故亦名用中玄. …… 第二句中玄. 如張公喫酒李公醉. 前三三後三三. 六六三十六. 其言無意路. 雖是體上發, 此一句不拘於體故. …… 第三體中玄. 此乃是最初一句, 發於真體, 此一句便具體中玄. 因言顯理, 以顯玄中之體. 雖明此理, 乃是機用不離位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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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부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 저서로 『중국불교거사들』, 『중국불교사상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조선불교통사』(공역), 『불교와 유학』, 『선학과 현학』, 『선과 노장』, 『분등선』, 『조사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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