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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거울 같은 부처의 지혜가 드러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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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3 년 6 월 [통권 제122호]  /     /  작성일23-06-05 12:20  /   조회1,45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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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가 거울에게 묻는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백설공주입니다.” 거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녀 소유의 거울이었지만 “당신이 가장 예쁩니다.”는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마법의 거울

 

불교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거울은 마녀의 겉과 속을 함께 비추고 있다. 거울에 비친 마녀의 겉모습은 생멸의 바람을 정면으로 맞아 빛이 바랜 외모다. 그런데 그와 함께 비친 마녀의 속은 변함없이 빛나는 흰 눈과도 같은 청정한 아름다움이다. 그러니까 이 거울은 상대적 아름다움 대신 우리 모두가 본래 갖춘 청정한 본성을 가리켜 “제일 예쁘다”고 솔직하게 밝힌 것이다.

 

사진 1. 명견고현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중국 관아의 재판정.

 

중국 진시황의 궁전에도 마법 거울이 있었다. 가로 4척, 세로 5척,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대략 작은 전신거울쯤 되는 크기였다. 이 거울은 두 가지의 측면에서 비춤의 본질을 발휘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는 거꾸로 비추기다. 사람이 거울에 다가가면 거울은 거꾸로 된 영상을 보여주었다. 상하가 뒤바뀐 영상! 그렇게 상하좌우의 질서가 무효가 되는 시점에 서 있는 이 거울은 존재의 비절대성을 웅변한다. 왕후장상과 평민노비가 비절대적이고, 영웅호걸과 필부필부가 비절대적이다. 봉건제로 지칭되는 귀족과 호족정치의 견고한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중앙집권적 군현제가 대두하던 시대에 대한 절묘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정작 이 거울의 마법성은 다른 곳에 있었다. 사람들이 가슴을 문지르면서 이 거울 앞에 서면 그 내장 기관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두 번째 특징이다. 이것을 이용해 진시황은 신하들의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쓸개가 큰 사람이나 심장이 빨리 뛰는 사람을 적발하여 축출하거나 형벌에 처했다. 쓸개가 커서 대담한 사람은 반역자가 되기 쉽고, 심장이 빨리 뛰는 사람은 무엇인가 속이는 것이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쓸개가 작아 겁이 많은 사람은 심장이 빨리 뛸 것이고, 심장이 천천히 뛰는 사람은 쓸개가 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진시황의 황궁과 조정은 어마어마한 공포 분위기에 지배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황제의 뜻이 걸림 없이 구현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신하들의 마음을 읽는 신통을 과시했던 궁예의 관심법觀心法도 여기에서 착안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거울 같은 부처의 지혜

 

그런데 진시황의 마법 거울을 불교적으로 독해하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불교에도 이 마법 거울과 같은 지혜의 거울이 있다. 부처의 자리에 나타나는 거울, 즉 대원경지大圓鏡智가 그것이다. 이 거울은 진시황의 거울이 그랬던 것처럼 거꾸로 된 영상을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바를 거꾸러뜨린다. 사람들은 영원을 기약하지만 이 거울은 모든 존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생멸의 흐름에 떠밀려가고 있다는 것[無常]을 보여준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기를 기대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항상 불만족을 초래하는 현장이라는 것[苦]을 알게 한다. 자아를 절대적 실체라고 고집하지만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상대적 존재라는 점[無我]을 드러낸다. 이 거울 앞에서 우리는 자아에 대한 기대와 상상을 내려놓고 실상을 마주하게 된다.

 

또한 이 거울은 내면을 비추어 숨은 자아를 박멸한다. 사람들은 혹은 내면의 용기를 자랑하고, 혹은 마음의 섬세함을 자부한다. 그렇지만 이 거울은 그 고귀한 내면이라는 것 역시 자아를 증명하기 위한 또 하나의 집착일 뿐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자아를 형성하는 안팎의 비실체성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이 거울의 냉정한 비춤 앞에서 자아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마치 진시황의 용서 없는 칼날이 대담한 역적 후보, 세심한 간신 후보를 용서 없이 쳐냈던 것처럼!

 

다만 진시황의 거울은 분서갱유의 역사적 참극을 일으켰지만 이 지혜의 거울은 마음속의 난신적자들을 귀순시켜 천하태평의 시대를 복원한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 자리에서 지금의 이 인연을 정성껏 대접하는 천진한 살림이 시작된다. 목이 마르면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신다. 배가 고프면 땅을 갈아 배를 불린다. 하늘·땅과 한 몸이 되고 춘하추동과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우주와 한 몸으로 출렁이는 통일의 춤을 춘다. 불교적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있을 수 없다. 진리와 내가 둘이 아니고, 부처·조사와 한 마음이 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거울 같은 지혜를 대원경지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지만 두꺼운 의식의 먼지에 뒤덮여 있다. 이 의식의 먼지를 털어내는 것이 수행이다. 육조스님은 아예 그 ‘먼지가 일어난 일조차 없음[何處惹塵埃]’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수행을 한다는 생각까지 내려놓는 철저한 무심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떻든 이렇게 의식의 먼지가 사라져 티끌조차 남지 않았을 때 부처의 거울 같은 지혜, 즉 대원경지가 드러난다. 

 

보통 부처에게는 네 가지의 지혜가 있다고 말한다.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 성소작지成所作智가 그것이다. 이 중 특히 대원경지가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깨달음의 도래, 여래의 완전한 복귀를 알리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원래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는 보살의 지위에서 나타나 점차적으로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거친다. 그 성숙의 정도에 따라 하품(견도위), 중품(수도위), 상품(구경위)으로 급을 나누기도 한다. 점수적이다. 이에 비해 대원경지는 부처에게만 나타나는 지혜이다. 그것은 제8아뢰야식의 마지막 티끌이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완전하게[頓]’ 나타난다. 한번 나타나면 사라지는 일도 없고 더 고급으로 승화되는 일도 없다. 성철스님이 강조하는 돈오돈수의 특징이 완전하게 드러나는 경계이다. 『선문정로』에서 네 가지의 부처 지혜를 함께 다루지 않고 오직 대원경지만을 들어 깨달음의 차원을 설한 것은 그 때문이다. 

 

위산스님의 거울 같은 지혜 

 

사실 성철스님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원경지는 깨달음을 표현하는 선종의 관용어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설봉스님은 “나에게 옛 거울이 하나 있는데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를 비추고 중원 사람이 오면 중원 사람을 비춘다.”고 했다. 본래 갖춘 대원경지가 완전하게 드러난 경계의 묘사이다. 2006년 판 『선문정로』의 제목이 『옛 거울을 부수고 오너라』였는데, 이 ‘옛 거울’ 역시 설봉스님의 대원경지를 가리키는 말에서 따온 것이었다.

 

사진 2. 성철 스님의 책 『옛 거울을 부수고 오너라』(장경각, 2006)의 표지.

 

위산스님은 아예 대원경지가 선문의 종지라고 규정하기까지 하였다. 대원경지는 부처의 지위에 진입하면서 단번에, 그리고 완전하게 나타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위산스님의 규정은 돈오돈수를 선문의 종지로 삼는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이 문장을 기꺼이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위산스님 역시 제8아뢰야식의 근본무명을 완전히 탕진하여 구경각을 성취해야 참다운 견성이고 이것이 근본 종취임을 밝혔다. 대원경지란 주관적인 상생想生과 객관적인 상생相生 그리고 일체 망상의 근본이 되는 제8아뢰야식까지 완전히 제거한 것을 말한다. 이것이 33조사를 이어온 우리 종문의 종취이고 수행의 극과이다.”

 

위산스님은 선문의 『명심보감』 격인 『경책문』을 지었는데 한국 강원의 필수과목인 『치문』에도 이것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불교에 대한 위산스님의 영향력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또한 선종사에 회창멸불이라고 불리는 당무종의 불교 소멸 정책에 의해 불교가 거의 빈사 상태에 처했을 때 불법 중흥의 기치를 올린 것도 위산스님이었다. 스님의 활발한 교화는 그 제자인 앙산스님에 이르러 위앙종의 성립으로 완성된다. 위앙종의 가르침은 근엄함과 자세함을 특징으로 하는데, 무너진 선종을 내용적으로 복원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

 

어떻게 보아도 위산스님의 교화와 위앙종의 성립은 넓게는 불교, 좁게는 선종의 중흥을 알리는 표지였다. 우리는 위앙종의 완성자인 앙산스님이 선종의 제7조, 혹은 작은 석가[小釋迦]로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위산과 앙산 부자의 위앙종 건립이 깨달음의 왕국을 재건하는 사건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성철스님은 대원경지에 대한 위산스님의 선언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아 돈오돈수가 선문의 종지임을 거듭 주장한 것이다.

 

위산스님은 대원경지에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생각의 소멸이다. 집착으로 인한 내적 번뇌가 완전히 사라질 때 대원경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양의 소멸이다. 외적 경계에 의한 동요가 소멸할 때 대원경지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셋째는 미세한 흐름의 소멸이다. 제8아뢰야식의 장애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다. 원래 제8아뢰야식의 장애는 미세하여 감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미세한 흐름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작용이 미세하기 때문에 장애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번뇌의 강을 있게 하는 원천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천이 남아 있는 한 번뇌의 강물은 다시 범람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불교에서는 한 생각 가운데 90찰나가 있고, 한 찰나에 900번의 생멸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아뢰야식의 미세한 물방울들이 남아 있는 한 생멸과 윤회의 바퀴는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산스님은 대원경지의 세 가지 특징 중 특히 아뢰야식의 미세한 장애가 소멸했는지를 가지고 제자들의 공부를 점검했다. 선가 어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사진 3. 위산영우潙山靈祐(771~853) 선사. 

 

위산이 앙산에게 물었다. “너는 의식에 미세한 흐름이 일어나지 않은 지 몇 년쯤 되는가?” 앙산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스님에게 그것이 일어나지 않은 지는 몇 년이 되는지요?” 위산이 대답했다. “나는 그것이 일어나지 않은 지 벌써 7년이 되었구나.” 위산이 재차 물었다. “너는 어떠냐?” 앙산이 대답했다. “저는 한참 시끄럽습니다.” 

 

성철스님은 평소에 현묘한 선문답 대신 숙면시에 선정이 여전한지를 가지고 학인들을 점검하였다. 오늘날은 물론 당시에 있어서도 다들 그것을 숨 막히는 엄격한 조건이라고 했지만 위산스님에 비하면 그래도 너그러운 편이다. 성철스님이 점검한 숙면일여는 멸진정의 차원이다. 그것은 아직 미세한 흐름이 해소되지 않은 아뢰야식 차원의 선정이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이것이 통과지점이지 도착지가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던 것이다. 워낙 숙면일여의 멸진정에 도달한 사람이 드물어 그것을 점검 항목으로 삼기는 했지만 그 위험성을 강조하여 ‘제8마계’라는 용어를 거듭 사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조용한 무심에 매료되어 그 차원에 머문다면 ‘제8마계’의 ‘마구니’로 살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진 4. 앙산혜적仰山慧寂(803~887) 선사.

 

이에 비해 아뢰야식의 미세한 흐름을 시끄럽게 감지할 수 있었던 앙산스님은 금강유정의 선정 속에 있었다. 그것은 등각의 지위에서 부처의 지위에 진입하기 직전의 삼매였다. 그리고 그러한 앙산스님을 점검했던 위산스님은 아예 그 미세한 흐름이 일어나지 않는 차원을 직접 체험하고 제자들에게도 그 목적지를 직접 가리켜 보이는 입장에 있었다. 부처의 대원경지가 나타나 7년이 지나도록 사라지는 일이 없었다는 말이 가리키는 바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성철스님과 앙산스님, 그리고 위산스님은 각기 그 점검하는 지점은 달랐지만 대원경지를 마지막 도착지로 삼았다는 점에서 다름이 없다.

 

사진 5. 현대 위앙종의 조사 선화상인(1918∼1995).

 

성철스님은 숙면일여의 멸진정이 부산에서 서울을 가는 여정에서 보자면 삼랑진쯤에 해당한다고 규정하였다.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아직 긴 여정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금정유정의 통과지점이 남아 있고, 무엇보다도 미세한 흐름이 일어나지 않는 대원경지의 목적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공부는 머물지 않음을 가장 큰 미덕으로 삼는다. 이 공부뿐이겠는가? 모든 고귀한 공부에 임하는 수행자라면 오로지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다[任重而道遠]’는 자세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굳건한 동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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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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