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의 장인을 찾아서]
생전예수재, 살아생전 나에게 보내는 명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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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리 / 2023 년 7 월 [통권 제123호] / / 작성일23-07-04 10:52 / 조회3,016회 / 댓글1건본문
봉은사 생전예수재 원명스님
예술적 가치를 지닌 불교문화의 유산은 오래된 사찰의 건축, 석조, 회화, 공예 등의 다양한 분야의 유형문화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종교미술로 불교의 교리와 신앙을 기초로 불교적인 소재를 시각화, 조형화 한 것이다.
반면 보다 입체적이고 실천적인 무형의 문화유산으로 의례를 들 수 있는데, 불교의 대표적인 3대 재의식 의례로 영산재靈山齋, 수륙재水陸齋 그리고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가 있다. 재의식齋儀式은 그 장엄한 규모에서 한국 불교의 오랜 역사성과 전통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대규모의 재의식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 행하는 의식이지만 이를 통해 죽은 자를 위로하고 나아가 종교가 지향하는 철학과 사상, 상징성을 구현하는 의미가 있다.
봉은사와 생전예수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은 한국종합전시장, 무역센터 등이 자리하고 있어 강남의 심장이라고 할 만큼 국제적인 첨단도시이다. 세련된 디자인의 고층빌딩들은 미래를 지향하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요즘 한참 이슈가 되고 있는 인공지능인 AI나 비트코인(bitcoin), 블록체인(Block Chain) 등의 용어들과도 잘 어울리는 곳이다.
반면 이 도시에는 천년고찰이라 불리는 오랜 역사의 봉은사奉恩寺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언뜻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공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봉은사는 신라시대의 고승 연회국사緣會國師가 794년(원성왕 10)에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創建하였으니 그 역사가 유구하다. 신라에서 시작되어 고려, 조선의 역사 문화가 함께 숨 쉬고 있다.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판전版殿’에는 추사 김정희의 현판이 걸려 있어 대학자이자 서예가 만년의 불교적 심성이 판전 안에 담담하게 새겨져 있다. 대웅전 안에 모셔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은 보물 제1819호로 17세기 중후반 불교조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며, 이밖에 신중도神衆圖, 삼세불도三世佛圖,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감로도甘露圖, 괘불도掛佛圖, 목십육나한상木十六羅漢像, 목사천왕상木四天王像, 선불당選佛堂 등 역사와 예술을 담은 다양한 유형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
사실 봉은사의 대표문화재는 생전예수재를 꼽을 수 있는데, 불자와 수행자가 함께하는 살아 숨 쉬는 실천의 무형문화재다. 살아 있는 동안[生前]에 자신의 업業을 미리 닦는[預修] 의례이자 수행인 생전예수재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수행과 회향, 보시 등을 통해 공덕을 쌓는 의식이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으니 그 역사도 오래되었다.
‘예수預修’란 자신의 공덕을 미리 닦는다는 의미이다. ‘재齋’는 사바세계에 태어난 이상 누구나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되므로, 고인이 된 사람을 위해서 명복을 빌어 극락세계로 인도하거나 다음 생을 맞이할 때 더 나은 삶이 될 수 있도록 공덕을 쌓아 주는 예식이다.
윤달閏月에 행해지는 ‘생전예수재’는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재와 구분되는 차별성을 가진다. 고인이 된 타인을 위해 재의식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재의식이라는 점이다. 쉽게 풀이하자면 살아생전에 자기 자신의 명복을 빌어 덕업을 쌓는 예식인 것이다.
윤달에 열리는 생전예수재
윤달은 태음력太陰曆에서 일 년 열두 달 외에 불어난 어느 한 달을 말하며, 평년보다 한 달이 더 있다고 해 ‘공달[閏月]’, ‘덤 달’, ‘남은 달’이라 부른다. 윤달을 무탈한 달로 여겨 “사람의 목숨을 관장하는 신神의 눈을 가려 노여움을 살 만한 일을 해도 아무런 장애나 거리낌이 없다.”라고 여겼다. 그래서 윤달에 중요하거나 꺼려 왔던 일을 치렀다. 수의壽衣를 짓거나 조상의 묘를 이장하기도 하고 이사를 가거나 혼례를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부처님께 불공을 올리기도 하였다.
윤달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봉은사의 예수재에 관련한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세속의 관념에는 윤달에는 장가가고 시집가기 좋다고 하고, 또 죽은 자에게 입히는 수의를 만들기에도 좋다고 하는 등 모든 일에 꺼리는 것이 없다.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현재 위치는 강남구 삼성동)에서는 매양 윤달을 만나면 서울 장안의 여인들이 다투어 와서 불공을 드리며, 부처님 앞에 돈을 놓는다. 그리하여 그 윤달이 다 가도록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극락세계로 간다고 하여 사방의 노파들이 분주히 달려와 다투어 모인다. 서울과 지방의 대부분의 절에서 이런 풍속을 볼 수 있다.”
윤달에 봉은사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불공에 대해 비교적 사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장안의 여인들이며 노파들이 봉은사로 몰려와 불공과 보시를 올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들은 과연 구복求福을 바라는 마음으로만 봉은사에 찾아갔을까? 그 이면에 또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생전예수재 전승
봉은사에서는 사라져 가는 불교 무형유산의 보존과 전승을 위해 2004년과 2006년, 2012년과 2014년에 예수재를 지냈고 현재의 주지 원명스님의 부임과 함께 큰 변화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전까지는 윤달이 있는 해에만 간소하게 치러져 왔던 예수재를 구성과 절차, 내용에 있어 보다 심층, 체계적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신중작법, 괘불이운, 조전점안, 운수단, 사자단, 상단, 중단, 고사단, 마구단, 함합소, 회향 봉송까지 전통의례 원형을 그대로 계승한 형태로 설행되었다. 서울시 중요무형문화재 추진을 계획하고 2017년 6월 24일 <사단법인 생전예수재보존회>를 설립, 주지 원명스님을 회장으로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스님과 특수교육기관인 불교어산작법학교(학장 법안스님)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스님들이 함께 참여하여 『생전예수재 연구』를 발간하는 등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힘썼다.
영산재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수륙재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전승되고 있으니 생전예수재에 대한 관심과 전승은 좀 늦은 감이 있다. 이후 3차례의 생전예수재 관련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생전예수재 의례집 『예수시왕생칠재의찬문』을 발간하는 등 지속해서 전통의례 연구를 진행하며 불교의례의 가치를 알리는 데 앞장섰다. 이에 2019년 4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 10월 봉은사는 생전예수재 보유단체로 지정되었다. <사단법인 생전예수재보존회>는 원형의 온전한 복원과 전승에 주력하며 학술적인 가치 연구, 생전예수재 의례집의 수집과 간행에 힘쓰고 있다. 물론 앞으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봉은사 생전예수재의 구심점인 주지 원명스님의 역할이 크다. 수행자와 불자가 함께하는 49일간의 수행과 대의례의 주관은 쉽지 않은 일이다. 참가자들이 하나의 마음이 되어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해탈을 추구하는 데 있어 나침반의 역할이자 지혜의 눈이 되어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봉은사 생전예수재는 회향까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의 육바라밀에 맞춰 49일간 봉행하게 되는데, 이 기간은 나와 타인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는 숙려기간이기도 하다. 정진·선정·지혜는 자신을 위한 자리自利의 생활로서, 지혜를 추구하는 상구보리上求菩提의 생활이며, 보시·지계·인욕은 타인을 위한 이타利他의 생활인 자비의 실천으로, 보통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생활이다.
“부처님께서 선업을 쌓아서 보다 나은 내생을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생전예수재’를 통한 공덕 쌓기와 참회와 수행은 의미가 깊습니다. 49일 동안 육바라밀의 수행덕목에 집중하여 나 자신을 통찰하고, 특히 이타적인 정신을 생활화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봉은사의 생전예수재의 본질은 생활 속 실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경우 의례에 중심이 맞추어져 있다면, 봉은사 생전예수재는 의례는 물론 실질적인 육바라밀 실행과 생활화의 연장선까지 연결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가장 불교적인 수행실천을 강조하는 의례라 할 수 있다. 생전예수제의 동참자는 대략 오천여 명에 이른다. 가족 단위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아 상당수에 이르고 49일의 기간을 함께 수행하는 것이다. 물론 기간 동안 봉은사에 직접 찾아 기도에 동참하거나 생전예수재 봉행을 참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면 각자의 가정 안에서 매일 『금강경』을 독송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참가자들은 매일 천 원씩 모은다. 성실하게 모은 각자의 보시금은 회향 때 가지고 와서 모두 모으면 목돈의 기금이 마련된다. 이 기금은 나라에 재해가 있을 때나 힘든 사정이 생겼을 때 돕는 일에 사용된다. 작은 물결이 모여 큰 물결을 이루어 세상에 빛이 되는 실질적인 보시를 하게 되는 것이다. 참여자들은 해마다 계속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생전예수재를 통해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타인을 돕고, 가족이 화목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니 사람들이 더 찾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명스님께서는 생전예수제를 통해 세상이 한 걸음 더 나아지고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의례이기 전에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 참는 마음을 기르는 시간이며, 열심히 정진하여 결과적으로 지혜를 담는 시간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생전예수재가 불교의 행사이기는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도 문은 항상 열려 있다고 한다. 사회를 건강하게 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과정의 의례이기에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동참하여도 좋다고 하니 도심 안에서 너무 힘들고 지친 누구라도 함께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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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전정애님의 댓글
전정애 작성일
생전예수재에 직접 참여한 적은 없지만 중현 김세리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마치 눈 앞에서 본 듯 정리가 됩니다.
살아 생전에 자신의 명복을 빌어 덕업을 쌓는 예식이자 수행인 생전예수재와 관련된 글을 읽으니 봉은사 생전예수재에 꼭 참석해 보고 싶습니다.
더불어 정진, 선정, 지혜 , 보시, 지계, 인욕의 육바라밀을 실천하여
순간순간의 삶을 맑혀가리라 서원해봅니다.
월간 고경과 의미있고 가치있는 글을 써 주신 중현 김세리 선생님께
마음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