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선암사 원주 시절 겪은 일과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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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 2023 년 8 월 [통권 제124호] / / 작성일23-08-04 21:29 / 조회2,368회 / 댓글0건본문
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12 |인환스님 ⑧
부산 백양산 선암사에서 마주보는 산이 가야예요. 그 산비탈에 성냥곽 같은 포로수용소가 있었어요. 지금 동의대학교가 있는 곳입니다. 거기 포로들이 좌우로 갈라졌어요. 남한으로 전향하겠다는 사람과 북한에 충성하겠다는 사람들의 갈등이요. 폭력이 난무하고 죽이는 일도 있었다고 해요.
출가자가 된 반공포로
이들 중 남한을 선호하는 포로들을 반공포로라고 했어요. 그 가운데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 예불하고 그랬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스님이었던 거예요. 그 스님은 전쟁에 동원되었다가 고만 포로가 됐어요. 스님은 황해도 출신인데, 석암스님도 거기 출신이에요.
석암스님은 황해도 구월산에 있는 월정사로 출가해서 한공漢公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어요. 석암스님은 남쪽으로 피난 와서 부산 선암사에 계셨는데, 같은 스승 밑에 있었던 동생(사제)이 고만 군대에 끌려갔다가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온 거예요. 포로수용소 안에서 불교를 믿는 이들이 모여 마주보는 선암사를 향해 합장 예배했어요. 선암사 범종 소리가 거기까지 들렸대요.
어느 날 가야포로수용소에 있던 7명이 새벽에 풀려나와 곧장 선암사로 올라온 거예요.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안 막는 선암사는 이들을 모두 행자로 받아들였어요. 그 행자들을 원주인 내가 관리했어요.
석암스님 사제의 법명이 경운입니다. 경운스님은 후에 기장군 장안읍 척판암擲板庵에 오래 주석하셨어요. 원효스님이 판자를 던져 중국 태화사의 대중들을 구했다는 전설이 있잖아요. 척판암은 절터가 아주 작지만 경운스님이 가서 오랫동안 정진을 잘해서 신도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스님이 폐가 나빠져 병이 들었어요. 절에는 스님을 잘 모시던 보살님이 계셨는데, 이 분의 딸이 비구니였어요. 어느 때 모친 만나러 왔다가 경운스님을 간병했어요. 그러다 고만 두 분이 결혼하게 됐네요.
스님은 창녕의 영산에 살았는데 머리를 깎은 스님의 모습으로 세속에서 살았어요. 그 비구니는 보살이 되어 승복 바느질로 생활했어요. 그 후에 둘은 문경 봉암사鳳巖寺가 있는 희양산曦陽山 은티라는 곳에서 살았어요. 이 노장님은 속가에 있으면서도 정진을 꾸준히 해서 선에 대한 안목이 상당히 높았어요. 이를 아는 수좌들이 일부러 찾아가서 법문도 하고 선문답도 하고 그랬어요.
얌전하던 설봉스님과 곡차
▶ 원주스님 소임을 살 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없으신가요?
스님들은 술이라 하지 않고 곡차라고 말해요. 곡차에 얽힌 두 가지 얘기입니다. 제가 선암사 원주소임을 1953년 동안거부터 맡았습니다. 어느 날 한 노장님이 뚱뚱하고 허우대 좋은 몸집에 커다란 걸망을 짊어지고 절에 왔어요. 이 분은 동산스님 계시는 범어사 청풍당 선방에 오래 계셨는데 거기서 괴짜로 유명한 분이에요. 법명이 생각 안 납니다.
의병대장이라는 별명이 있었어요. 출가하기 전 동학혁명에 가담해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대요. 당시의 무용담을 얘기하곤 했는데 발길질하면서 이리 치고 저리 차면서 했대요. 그런데 선암사에 온 지 열흘 만에 배에 복수가 차서 그만 돌아가셨어요. 범어사 청풍당에서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선암사의 석암스님이 노장님들을 잘 모신다는 얘길 듣고 온 건가 봅니다.
시신을 염하는 것도 원주 소임이라서 입관할 때 꿀렁꿀렁하는 소리가 들려요. 절 근처 화장터에서 나무로 화장하는데 30시간이 넘게 걸립니다. 선방 스님들이 계속 지키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황화담이라는 스님이 계셨는데 70세였어요. 이 분이 곡차를 그렇게나 좋아하는 한량이에요. 그 스님은 “곡차 댓 병만 놔주시면, 그거 양식 삼아 내가 성의껏 한잠 안 자고 화장을 잘 해드리겠다.”고 해요. 다음날 내려가 보니까 주변 정리를 잘해 놓고 뼈만 추스르면 되겠더라고요.
곡차에 관해서 설봉스님에 얽힌 스토리가 기억에 남아요. 설봉학몽雪峯鶴夢 스님은 선지식으로 이름난 분이에요. 스님이 선암사에 오셨을 때 69세가 넘었어요. 마른 체구에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얗습니다. 말수가 없는데 존경할 만한 노장님이지요. 선에 대한 경지가 높아서 『선문촬요禪門撮要』에 우리말 토를 달아서 범어사 판으로 책을 냈어요.
정진하는 수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됐어요. 설봉스님이 오자 석암스님이 독방을 내어 드리고, 대중들과는 달리 자유롭게 해 드렸어요. 수좌들은 자유 시간마다 『선문촬요』를 들고 설봉스님께 찾아가 질문하거나 선에 대한 법문도 들었어요. 평소에는 아무 말씀도 없고 조용하게, 참 그렇게 고고해 보였어요. 주로 당신 방에 계셨어요.
한 달쯤 지났을까, 어느 날 갑자기 설봉스님이 사라졌어요.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나는 당황해서 찾아보려고 했지요. 그런데 스님을 잘 아는 다른 분이 “찾으려 애쓰지 마시오. 이제 얼마 있으면 또 제 발로 돌아올 겁니다.” 그래요. 그런가 보다 하고 한 닷새쯤 지났는데 동네 사람이 와서는 어떤 스님이 동네 입구에 취해서 쓰러져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젊은 수좌들과 급히 내려갔더니 설봉스님이 인사불성으로 만취해서 길가에 세상모르고 누워 계시더군요. 평소에는 말 없고 점잖은데 술만 취하면 소리를 지르고 속에 있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술 깨고 나면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하더군요. 그 후에도 같은 일을 대여섯 번 겪었어요.
이즉돈오理則頓悟와 사비돈제事非頓除
▶ 설봉스님께서 현토하신 『선문촬요』는 어떤 책인가요?
『서장書狀』에 이런 말이 있어요. ‘이즉돈오理則頓悟’라, 이치로는 모든 걸 확 깨달아 분명해져. 그런데 ‘승오병소乘悟幷消’, 딱 깨달은 그때 이제까지 걸려 있던 여러 가지 의심, 의문들이 확 해소가 된다는 겁니다. 눈이 열려요. 그런데 ‘사비돈제事非頓除’라, 생활 가운데 여러 가지 업습業習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깨달았다고 해서 한꺼번에 샥~ 하고 사라지지 않아요.
무슨 얘기냐 하면 찌개를 불에 올려 바글바글 끓으면 불을 끄고 그걸 옮겨놓지요. 이제 불은 없지만 여열이 있어서 상당 시간 부글부글 끓다가 차차 식는 거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그동안에 여러 가지 업을 짓고 살다가 발심해서 참선수행을 하면, 이치로는 탁! 하고 모든 공한 이치를 깨달아요. 지혜의 눈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들을 환하게 보는 마음의 눈이 열린단 말이지요. 그러나 이제까지 이 마음과 몸으로 익혀 온 업습은 부글부글 끊는 냄비와 같아서 당장에 확 멈추지 않아요. 이것을 사비돈제라고 해요. 말하자면 깨달은 뒤에도 ‘오후보림悟後保任’이라고 하는데, 그 경지를 밥할 때 뜸들이듯 순수하게 향상해 나갑니다. 그러면 차차 깨달은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바르게 살 때 다시는 그런 쓸데없는 업을 짓지 않게 된다는 말이지요.
장 보러 오가는 길에 한 공부
▶ 석암스님께서 평소에 율을 가르쳐 주셨습니까?
49재를 지내기 위해 원주는 시장을 봐옵니다. 주로 서면의 부전시장을 가지만 큰 장을 볼 때는 범일동 장을 가거나 멀리 국제시장에도 갑니다. 그날도 평소와 같이 지갑을 빈 걸망에 넣고 국제시장으로 향했어요. 필요한 물건을 사고 지갑을 꺼내려는데 글쎄 없어졌어요. 2중으로 된 광목 걸망이 예리한 칼로 찢어져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전차 안에서 쓰리(소매치기)가 붙었던 거지요. 뭐 겉보기에도 얼빵해 보이는 젊은 중이 걸망을 졌으니까요. 내일이 49재인데 하늘이 노랗더군요.
마침 선암사 조실인 향곡스님의 작은 토굴이 범일동에도 하나 있었어요. 금모사金毛寺라는 절입니다. 향곡스님 절은 기장 바닷가의 묘관음사이지만 마침 여기에 계시더라고요. 찾아가서 말씀드리니 스님은 “허허, 좀 조심하지 않고.” 딱 그 말씀뿐이에요. 이렇다 저렇다 말씀 없이 돈을 주셨습니다. 물건들을 사고 이튿날 재를 제대로 치뤘어요.
내가 원주 맡았을 때 제일 많이 공부하고 알차게 한 것이 장보러 오갈 때입니다. 장을 많이 볼 때는 석암스님과 같이 갑니다. 자주 같이 다녔어요. 아침에 둘이 빈 걸망 짊어지고 장에 가면 부산 서면의 신도들의 인사가 대단합니다. 여기저기서 “스님 오셨습니까?” 인사가 이어져요. 우리는 북통같은 걸망을 짊어지고 나란히 발을 맞춰 다시 절로 향합니다. 이때 살아 있는 공부를 합니다.
절에서는 노장님한테 따로 무슨 얘기 들을 기회가 거의 없어요. 그런데 장에 오가는 서너 시간 동안 스님께서 참선하는 얘기, 정진은 어떻게 하는지 많은 말씀을 하십니다. 노장님은 율사님이니까 계율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해주십니다. 절집 신참내기인 저에게는 아주 대단하고 큰 공부였어요. 선문에 ‘화반탁출和盤托出’이라는 말이 있어요. 음식을 내줄 때 음식만 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담은 그릇까지도 준다는 말입니다.
이후에도 석암스님께 배웠는데, 『범망경』, 「초발심자경문」, 「사미율의」, 『율장』, 『사분율』, 『오분율』, 『마하승기율』 등을 모두 배웠습니다. 제가 평생 공부하는 데 석암스님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요. 경을 보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스님 방에 쫓아가서 여쭈면 친절하게 일러주시고요. 그렇게 공부의 기초를 익혔어요. 그 후에 강원에서 공부하고, 학교도 가고, 외국에도 가고 해도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몇 시간씩은 꼭 참선하고, 지금까지도 쭉 하고 있는데 그때 그 영향입니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 석암스님 만나서 그렇게 훈도를 받은 거, 지금도 너무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법에 대처승은 없다
1955년입니다. 여름 안거 결제하기 열흘 전인데 종단에서 사발통문沙鉢通文이 왔어요. 당시 종단에 정화불사로 야단이 일어났어요. 이제 정화불사를 위해 수좌들도 힘을 모아야 하니까 모두 서울 조계사 법당에 모여 일치단결해서 정화운동을 추진하자는 취지예요. 석암스님이 선암사 대중들을 모아놓고 회의 주재를 했어요. “그동안 수좌들이 소수 세력으로 이 선방, 저 선방 왔다 갔다 하면서 여러 가지 서러운 꼴을 겪었다. 우리 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들도 결국은 종단이 바로 서고 안정되어야 그 속에서 정진을 제대로 할 수가 있다. 그래서 모두 동참해서 힘을 합쳐 이번에는 조계사에서 여름 결제를 하는 마음으로 정화불사에 동참하자.” 이렇게 결의했어요.
▶ 스님도 정화운동에 직접 참여하셨습니까?
당시 조계사 큰법당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었고, 그 오른쪽에 한옥이 있었어요, 거기에 동산스님이 계셨고, 건물 옆 빈터에 대형 천막을 두 개 쳐서 후원으로 삼아 공양을 준비했어요. 스님들은 안국동 선학원과 그 가까이에 있던 대비원이라는 비구니 절, 그리고 종로3가 대각사 등 여러 곳에서 잤어요. 매일 오전 조계사 법당에 모여, 지금도 눈앞에 선하네요. 모두들 “불법 가운데 대처승 없다.”라는 구호를 외쳤어요. 누군가 외치면 따라서 손을 들고 같이 구호를 외치고 그랬어요.
정화운동을 앞에서 이끈 분이 청담스님, 효봉스님, 동산스님, 금오스님 이런 분들이고, 그 다음에 중간에서 맹렬하게 운동을 이끈 분이 구산스님, 지허스님 등이지요. 그 다음에 행동대원 격으로 지영스님, 그때 별명이 오케이스님이에요. 그 다음에 경호스님, 그리고 또 연설을 잘 하시는 스님들, 이렇게 7~8명이 앞장섰어요. 조계사에 모인 인원이 적을 때는 4백 명, 많을 때는 6백 명이었어요.
나는 선암사에서 함께 올라간 또래 스님들과 후원에서 봉사를 시작했어요. 무척 더운 날인데도 후원 마당에 큰 솥을 걸었어요. 어른이 세 사람쯤 들어가도 넉넉할 만한 큰 무쇠솥이 세 개, 아침 9시 되면 큰 그릇에 한 가마니씩 쌀을 붓고 수돗물을 틀어 쌀 씻는 장면이 정말 가관이었어요.
8월 15일 무렵 이선근 문교부 장관이 직접 조계사를 찾아왔어요. 그가 대중들 앞에서 말하기를 “독신 비구승들이 하고 있는 정화운동이 옳은 방향이다. 불교가 전통을 찾으려면 이제까지 해 왔듯이 가족들을 가진 대처 스님들은 절에서 물러나고 독신 수행승들이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했어요. 약 3개월 동안 제일 더운 여름에 호박을 장 봐 와서 썰고, 다음에 그걸 장을 풀어서 된장국 끓이고, 이런 일을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석 달 동안 했어요. 그때 전국에서 모인 큰 스님네들, 이름 있는 스님네들 얼굴을 다 뵐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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