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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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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아  /  2018 년 11 월 [통권 제6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2,24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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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가 『중론』에서 ‘대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대승의 시대를 열고 확립한 논사로 평가받는 이유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하였다. 또한 존재론적인 실재론을 비판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기존의 반야계 공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인식론적인 실재론을 비판하고 언어적인 측면에서 공사상을 확립함으로써 중관학파의 개창자가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고찰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대승과 중관학파의 출발점이자 설계자인 용수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용수의 삶과 개성을 살펴볼 수 있는 가장 권위 있는 전기는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이다. 이 전기는 유일하게 독립적인 한 권의 경전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른 전기들, 예를 들면 티베트 전승이나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보다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역사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전설에 가깝다. 용수의 사후 150여 년이 지난 4세기경 중국의 구마라집에 의해 한역, 혹은 편집된 것이므로 그 사이 중관사상을 드러내는 신화나 전설이 추가됐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병령사 석굴 조각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한 사상가의 생애를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 사람들은 사상가의 언어가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 그 사상을 더 잘 이해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종교의 영역에서 그 궁극의 진리가 구현되는 곳은 바로 그 인간의 삶이다. 예컨대 한 수행자의 경지는 그의 삶을 통해서만 증명된다. 그러므로 용수의 삶을 통해 우리는 그가 말하는 대승이나 중도의 실질적인 의미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1. 용수는 ‘엄마 젖을 갓 뗐을 나이에 한 번 듣는 것만으로 방대한 분량의 베다성전을 모두 암기하고 이해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총명함으로 성인이 되어서는 천문학, 지리학, 점성학 등 인도의 정통학문에 완전히 통달하게 되었다.’(주1)로 표시된 용수의 전기관련 내용은 『용수보살전』과 이에 관한 각종 번역서들을 참조하여 용수의 삶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런데 용수가 어려서부터 온갖 지식의 습득에 매진 한 것은 진리의 추구보다는 학문의 즐거움이 더 큰 몫을 차지했던 듯하다. 『용수보살전』에는 용수가 이 세상의 모든 이치에 통달하자 더 이상 즐거움을 찾을 수 없게 되어 친한 친구 세 명과 인생 최고의 쾌락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가 나온다. ‘용수와 세 명의 친구들은 술사術師에게 몸이 안보이게 하는 은신약隱身藥 만드는 법을 배운 후 그 약을 먹고 왕궁에 드나들며 원하는 대로 모든 후궁을 범했다. 그러자 백일정도 후에 임신한 후궁들이 생겼고 왕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이 한 지혜로운 신하의 묘안에 따라 후궁들의 처소 주변에 가는 흙을 뿌려 두자 예상대로 발자국들이 나타났고 왕은 허공에 검을 휘두르게 하여 용수의 친구 세 명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다. 용수만이 숨을 멈추고 왕과 가까운 곳에 숨어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용수는 이를 계기로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그는 처음으로 욕망의 집착과 그 결과인 괴로움을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 이처럼 용수의 출가 동기는 붓다와 마찬가지로 괴로움에 대한 철저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었다.

 

2. ‘용수는 궁궐을 무사히 탈출하자 산으로 들어가 출가하였다. 이후 기존의 경전, 계율서, 논서들과 히말라야 산의 늙은 비구에게 받은 대승경전들까지 모두 독송했지만 의미는 이해해도 완전히 체득할 수는 없었다. 용수는 별수 없이 더 많은 경전을 찾아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논쟁하며 상대의 주장을 논파했다. 그러나 어떤 외도가 ‘자신이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그대의 주장은 틀렸다. 왜냐하면 스승이 있는 자는 한 가지라도 스승에게 물어야 할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하자 대답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궁색해진 용수는 붓다의 가르침에도 끝까지 밝혀지지 않은 점이 있어 자신이 이치에 맞게 추리하고 부연하여 후학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때 바다 속 용궁 안에 있던 대룡Mhānāga보살이 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를 용궁으로 데리고 온다. 그리고는 일곱 가지 보물[七寶]로 된 창고를 열고 그 안에 있던 일곱 가지 보물로 된 상자를 열어 용수에게 수많은 대승경전을 주었다. 용수는 그것을 70일 동안 읽은 뒤 그 깊은 의미에 통달했다고 한다. 이후 대룡보살이 더 많은 경전을 주려고 했지만 용수는 거절하고 지상으로 돌아온다. 한 상자의 경전 안에도 방대한 분량의 경전 내용이 다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처음 불교를 접하기 시작한 용수의 모습이 마치 듣고 읽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성문승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다 섭렵하고 남김없이 이해하고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경전, 계율서, 논서들을 찾아 다녔을 것이다. 대승의 경전들조차 남김없이 분석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붓다의 가르침도 불완전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일으키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붓다조차도 이 세상의 모든 책들을 다 섭렵하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 바다 속의 용왕이 용수에게 자비심을 일으켜 대승의 진정한 의미를 스스로 깨우치도록 도움을 주었고 용수는 이를 통해 세상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다 읽고 들어서 이해하지 않았다고 해도 ‘모든 것을 아는 자’[一切知者],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설사 언어가 다르다 할지라도 자신의 가르침과 붓다의 가르침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즉 이해는 하지만 체득할 수 없었던 대승의 의미를 비로소 체득하게 된 것이다.

 

3. 지상으로 돌아온 용수는 마치 붓다가 깨닫고 난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법을 전하고 가르치는데 힘을 쏟는다. 『용수보살전』에는 그 한 예로 용수가 남인도의 어떤 왕을 교화하는 내용이 나온다. ‘용수는 그 나라의 호위대 장군이 되어 일반 사병과 똑 같이 무기를 짊어지고 행군하며 동료 같은 마음으로 군대를 통솔하였다. 그러자 위압적으로 하지 않아도 군인들은 그를 따랐다. 왕이 이를 알고 용수를 불러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묻자 용수는 “나는 모든 것을 아는 자[一切知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매우 놀라 ‘모든 것을 아는 자’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용수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왕이 먼저 질문 해줄 것을 요청했고 왕은 고심 끝에 “지금 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용수는 신들은 지금 아수라와 싸우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왕은 난감해졌다. 왜냐하면 그 말을 부정하려고 해도 증명할 방법이 없고 긍정하려고 해도 눈앞에 그 상황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자 용수는 그 증거로 처음에는 하늘에서 창과 방패 등의 무기가 떨어지게 하였고 그 다음에는 아수라들의 손가락, 발가락, 귀, 코 등이 떨어지게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공중을 깨끗하게 하여 신들과 아수라들이 양쪽에서 대적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왕과 바라문들은 결국 용수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왕이 난감해 한 이유는 비교적 분명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어떤 언어로도 이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경험상의 증인이 한 가지라도 있어야 했다. 용수는 그 증거를 바로 눈앞에 보여줌으로써 ‘지혜는 그 사람의 말과 언어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왕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것이다.

 

4. 용수의 마지막 또한 전설이 된 성직자에게 있을 법한 숙연함이 느껴진다. ‘용수는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하자 평소 그를 질투하고 싫어했던 아비달마 비구에게 “그대는 내가 오랫동안 이 세상에 머무르기를 원하는가” 하고 물었다. 그가 솔직히 원하지 않는다고 하자 용수는 조용한 방에 들어가 며칠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제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그 순간 매미가 허물[蟬脫]을 벗어버린 것처럼 없어지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인연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떠난 용수는 이후 남인도의 모든 나라에서 붓다처럼 숭상되고 존경받았다.

 

5. 『용수보살전』 등에 나타나는 용수의 삶이 이처럼 전설이 된 것은 그가 종교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기존의 실재론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명쾌하게 드러내는데 멈추었다면 그의 언어는 남되 그의 삶은 남지 않았을 것이다. 남았다고 해도 전설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설이 된 인물은 더 이상 역사속의 한 개인일 수 없다. 종교적인 그의 삶에 부응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이상향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설이 된 용수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1) ‘ ’로 표시된 용수의 전기관련 내용은 『용수보살전』과 이에 관한 각종 번역서들을 참조하여 용수의 삶을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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