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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인도불교 부흥을 꿈꾸며 인도 포교를 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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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3 년 10 월 [통권 제126호]  /     /  작성일23-10-05 09:21  /   조회2,23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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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33 | 후지이 니치다츠

 

후지이 니치다츠藤井日達(1885~1985)는 일련종 승려로 만주 랴오양[구 만주지역]에 일본산 묘법사日本山妙法寺(이하 일본산)라는 종교교단을 설립한 인물이다. 이후 인도로 건너가 간디를 접견하고 그의 불교부흥과 비폭력주의에 공감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아시아 침략에 협력하고 인도와 버마[현 미얀마]에서 첩보원으로 활동하는 등 명암이 명확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후지이 니치다츠의 전 생애를 걸친 활동 중, 초기 활동에 해당하는 인도 체험과 서천西天[인도]포교, 간디와의 교류를 소개하겠다. 

 

사진 1. 후지이 니치다츠藤井日達(1885~1985).

 

서천개교

 

서천개교西天開敎는 후지이 니치다츠가 창건한 일본산日本山 종단이 해외에서 하던 포교활동을 이르는 용어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서천’은 인도를 의미하며, 니치다츠가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니다. 일련종 창시자인 니치렌日蓮(1222~1282)이 『동효팔번초諌曉八幡抄』에서 “일본의 불법이 인도에서 널리 퍼질 것이다.”라고 언급하면서 이때 사용한 용어가 서천개교이다. 즉, 니치다츠는 종조인 니치렌의 가르침에 따라 인도진출을 시도했다. 

 

1930년, 니치다츠 일행은 인도 포교를 위해 출항했다. 여정은 코베에서 출항해 바로 인도로 향하지 않고 중국을 거쳤다. 만주-봉천-천진-대련을 순례하면서 자신이 세운 일본산日本山의 각 도량을 방문해서 입불식을 거행했다. 이후 홍콩-싱가폴을 거쳐 버마로 입항해 랑군 지역의 사찰들을 방문하고, 그 지역 승려들과 교류를 도모했다. 1년 후 1931년, 니치다츠는 인도 콜카타kolkata에 도착했다. 니치다츠의 대표적 인도 활동은 불교부흥을 위해 각 불교 유적지를 방문하고, 반영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던 간디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인도 포교를 위해 일본산 도량을 설립했다.

니치다츠의 불교유적지 순례는 룸비니, 라즈기르[왕사성], 사르나트, 쿠시나가라를 방문한 후, 당시의 감흥을 「불적순례」, 『서천개교일지』, 『나의 서천개교』 등을 통해 소개했다.

 

사진 2. 후지이 니치다츠가 세운 일본산 묘법사 세계평화탑(만주, 1917).

 

“운 좋게 일본국에 태어난 인연은 영광이다. 일등국민의 허명을 입고 언어 불통과 지리가 불편한 곳에 오면, 곤란해지고 불적참배의 정원淨願이 경색된다. 이곳에 통로를 열어 일본의 불교신도를 부르고 그들이 불편함 없이 불적참배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면 일본의 미래와 인도의 미래, 동양민족의 결합, 그리고 1300년의 일본의 문명을 개발시킨 불교에 보은할 수 있다. (이것을) 일본이 해야 한다. 말하자면 (일본의) 의무이고 책무이다. 이것은 간단히 영업, 관광의 문제가 아니라 멀리 동양의 100년 후의 문제를 해결하는 비장의 열쇠이다. 일인협회日印協會를 시작으로 우편선, 상선 등의 사람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불적순례」 『후지이 니치다츠 전집』(1994) 중에서-

 

니치다츠가 생각하는 인도의 불교부흥은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전체의 흥륭을 가늠할 열쇠였다. 일본은 아시아를 위해 인도불교를 부흥시킬 중요한 책무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 니치다츠가 선택한 것은 일본불교의 도량 설립이었다.

 

사진 3. 후지이 니치다츠 자전집. 『나의 비폭력』(1992).

 

일본산의 첫 번째 도량은 콜카타에서 시작했다. 이들 종단은 북을 두드리며 경전을 외면서 가두행렬을 했는데, 주민으로부터 시끄럽다는 항의가 컸다. 결국,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제지를 당하고 콜카타에서의 포교활동은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니치다츠 일행이 이동한 곳이 봄베이[뭄바이]였다. 이곳은 니치다츠를 따르는 일본산 신도가 일본 면화 인도지점장으로 봄베이 사무소에 부임한 곳이었다. 1932년, 니치다츠는 이러한 인연을 기반으로 봄베이에 첫 번째 도량을 열었다. 3년 후, 다시 콜카타에 도량을 세웠고, 1936년에는 라즈기르에 도량을 세워 인도인 신도들을 늘려나갔다. 이 일본산의 교세확장은 향후 니치다츠의 전쟁협력의 교두보가 되었다.

 

간디와의 만남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니치다츠가 간디를 처음 언급한 것은 『십설법辻說法』에서이다. 『십설법』에서의 간디는 민족운동 지도자나 인도의 성자가 아닌, 근대문명을 비판한 『힌두 스와라지』의 저자로서 언급되었다. 니치다츠는 불교발상지인 인도가 왜 영국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컸다. 이 점에 대해 그는 간디의 언급을 『십설법』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사진 4. 후지이 니치다츠와 마하트마 간디(1933).

 

“인도는 석가의 나라이다. 종교국인데 무엇 때문에 망했는지 질문하는 이들이 있다. 인도의 지식인인 간디가 쓴 글을 읽으면, 의문이 해소된다. 인도가 망한 것은 인도인이 게을러서도, 무종교국이 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인도인이 돈에 눈이 멀어서 영국과의 무역에서 이익을 탐하기 위해서 영국의 지배인이 되거나 앞잡이가 되어서 돈에 몸을 판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인도가 망한 것은 영국인이 아닌 인도인 때문이다.”

 

니치다츠는 간디의 저서 『힌두 스와라지』를 통해 인도인과 간디를 이해했다. 나아가 물질문명에 심취해 가는 일본인을 향해서도 경고를 했다. 이는 서양의 물질문명과 동양의 정신문화로 양분화시킨 당시의 통속적 아시아 인식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수도 있다.

 

간디와 니치다츠의 만남은 간디가 예라브다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당시(1933) 이루어졌다. 니치다츠는 불적순례를 위해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그의 제자를 통해 간디와의 만남을 요청했다. 간디와의 만남은 약 20여 분 정도에 불과했는데, 이 짧은 만남에는 몇 가지 일화가 전하고 있다.

 

사진 5. 물레를 돌리는 마하트마 간디.

 

니치다츠 일행이 일본 과자를 선물로 전했을 때 간디는 “일본이 상품으로 인도를 정복할 목적인가?”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일행은 자신들이 승려라고 소개하며 간디의 우려를 해소했는데, 간디는 이들 만남에서 자본주의에 근간을 둔 식민주의적 지배체제에 대한 경계를 확실히 드러내었다. 아울러 니치다츠가 세운 종단에 관심을 표명함과 동시에, 니치다츠가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범어나 빨리어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니치다츠의 제자인 오기츠 타다오興津忠男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간디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이들 만남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간디는 자신이 쓴 「일본의 협위脅威」라는 논설에서, “우리의 자부심에 충격을 준 것은 두 가지 교훈이 있다. 우리가 영국제품을 불매운동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제품의 효과가 컸다는 점이다. 인도인들에게 스와라지 정신을 주입하는 국민회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공장주들이 경쟁을 대비하지 않는 이상 일본의 승리는 당연하다.”라고 일본 제품의 압도적 경쟁력에 대한 충격을 그대로 드러내놓았다.

 

간디는 일본 제품의 경쟁력 중 하나는 낮은 노동임금에 있다고 봤다. 일본의 섬유산업이 조직화되고 독창적 기술력과 근면한 노동자를 긍정적 측면으로 평가한 반면, 노동자의 급료가 인도보다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간디에 비해 니치다츠는 보다 단순명료하다. 그는 이 만남을 “나는 시종일관 합장을 하며 이 만남을 감사했다. 대화를 통해 무엇을 얻겠다는 기대보다 간디를 만난다는 기대가 컸다. 나는 어떤 의견을 묻겠다는 생각도, 무엇을 이해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사진 6. 일본 면화사업. 버마공장에서 면 선별작업을 하는 모습(1917년경).

 

오히려 양측의 측근들이 이 만남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인도 면화사업자인 잠날랄 카니람 바자즈Jamnalal Kaniram Bajaj와 동양면화 봄베이 지점장 사사쿠라 테이이치로笹倉貞一朗가 함께 배석했다. 당시 목면 생산지인 인도 내륙에서는 인도 면화 불매정책이 펼쳐져 일본 면화사업에 큰 타격을 주고 있었다. 간디의 ‘일본은 인도를 정복할 목적인가’라는 질문은 인도 시장에 일본제품의 유입을 염려하는 당시의 정세를 바탕으로 나온 말이다.

 

간디와의 만남 이후, 니치다츠는 간디에게 자신이 인도에 온 목적을 간단히 정리한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불교를 통해 교육받은 일본 민족이 오늘날 폐망한 인도 불적을 장엄하고, 불법을 부촉하여 인도인들에게 전달하기를 원하는 인도 도항의 목적을 피력했다. 간디는 니치다츠의 인도불교 부흥에 대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답신했다. “부처가 새로운 종교를 연 것이 아니라 힌두교에게 새로운 방향성을 주었다. 부처의 가르침은 힌두교에 포함되었고, 그 정신은 인도에서 보존되고 있다. 오히려 불교를 수용한 국가들이 그 가르침을 곡해하고 있다.”라고 반론했다.

 

이후의 몇 통의 편지에는 니치다츠의 달라진 시각이 드러난다. 일본군의 아시아 전략에 대한 간디의 찬성을 요구하거나 남경대학살사건, 중일전쟁의 정당성 등을 기술했다. 더해서 간디의 비폭력주의와 일본에 비협조적인 인도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았다. 이러한 니치다츠의 달라진 입장은 당시 전쟁에 협력하며 포교를 했던 일련종의 스탠스를 그대로 답습한 결과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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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현재 아시아 종교문화 교류에 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ikemire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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