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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중국선의 열도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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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4 년 1 월 [통권 제129호]  /     /  작성일24-01-05 09:44  /   조회1,76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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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선 이야기 1 

 원영상(원광대 교수)

  

종래에 일본선의 역사는 중세 초기에 정립된 에사이(栄西, 1141∼1251)의 임제종을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보았다. 순수선인 동시에 독립된 선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러한 인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의 문헌에는 에사이 이전에 선이 들어와 수행자들 사이에 확산되었으며, 비록 독립된 종파가 아닌 우종寓宗으로서 기능했을지라도 그 영향력은 매우 컸다고 보았다. 에사이의 활동기는 중국에서는 남송시대였다. 5가 7종이 만개했을 때였다. 당나라 이래 줄곧 중국과 활발한 교류가 이뤄진 것을 보면, 중국선의 여러 갈래가 이미 일본에 상륙하여 불교인들의 가슴을 사로잡은 것은 틀림없다.

 

능가선을 전한 일본선의 초조 도쇼道昭

 

이러한 문제 제기의 선두에는 후나오카 마코토船岡誠의 『일본선종의 성립』(1987)이 있다. 그는 선종의 전래에 대해 도쇼道昭(629∼700)와 도선道璿(702∼760)을 시작으로 고대 일본불교의 선사들을 조명하고 있다. 한보광은 『일본선의 역사』(2001)에서 기존 연구를 간단하게 정리하여 이 시기의 일본선사와 그 성격을 도쇼道昭의 능가선, 도선道璿의 북종선, 사이초最澄의 우두선, 의공義空(?∼?)의 남종선, 가쿠아覺阿(1143∼1182)의 임제종 양기파, 다이니치 노닌大日能忍(?∼1195)의 일본 달마종으로 보고 있다.

 

사진 1. 일본 최초의 사찰 비조사飛鳥寺. 

 

에사이는 물론 일본 조동종의 조사 도겐道元(1200∼1253)의 활동 토대는 이 전사前史에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본격적인 선종을 확립하고자 한 의지는 이처럼 선사先師들의 모범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고대와 중세의 기록에 의거, 고대 일본의 선사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도쇼는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등장한다. ‘쇼昭’는 ‘쇼照’로 나오지만 같은 인물이다. 그는 계행이 청정하고 인행忍行을 숭상했다고 한다. 구법 중 중국에서 현장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다. 현장은 같은 방에 머물도록 했다. 그가 서역으로 가던 중 굶주릴 때, 배를 주어 기력을 회복하게 한 사문이 바로 도쇼의 전신이라고 하며, “경론의 뜻이 매우 깊어 다 알 수 없다. 선을 배워 동쪽으로 전하는 날이 오리라.”라고 했다.

 

현장의 소개로 융화사隆化寺혜만惠滿의 선 지도를 받았다. 중세 임제종 승려인 코칸시렌虎關師鍊이 저술한 불교통사 『원형석서元亨釋書』(정천구 역주)에서는 혜만이 “돌아가신 승나僧那(혜가의 제자) 스승께서 말씀해 주셨네. 옛날에 달마선사께서 『능가경』을 2조 혜가스님께 주시면서 ‘내가 이 중국에 있는 경전을 살펴보니, 이 네 권만이 마음과 일치하더구나’라고 말하셨다 하더군.”이라고 전했다. 귀국 때에는 현장이 사리와 경론을 주며 불법을 잘 전해 주기를 부탁했다.

 

사진 2. 도쇼道昭 좌상. 일본 화엄종 원흥사元興寺 소장.

 

도쇼는 일본 최초의 사찰인 원흥사元興寺(飛鳥寺의 원 이름. 현재의 원흥사는 나라로 이전한 것)에 선원을 세워 제자들에게 선을 지도했다. 후에 민중을 위한 복지사업도 벌였다. 당시 민중교화는 금지되었기 때문에 국가는 그가 선원에 머물도록 했다. 3일 혹은 7일 동안의 입정에 들기도 했다. 어느 날, 방에 향기가 나서 들어가 보니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법상종의 개조인 현장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인해 일본 법상교학의 초전으로도 본다. 도쇼의 유언에 따라 일본 최초로 화장했다. 이로써 그는 능가선을 일본에 전한 일본선의 초조로 여겨지고 있다.

 

도선道璿의 북종선

 

북종선을 전한 것으로 알려진 도선은 당나라 계율종의 도선율사를 말한다. 일본에 본격적인 계율을 전파한 감진鑑眞에 앞서 736년에 인도 출신 보리선나菩提僊那, 베트남 출신 불철佛哲과 함께 도일했다. 정보定賓에게 계율을, 북종선의 2조인 보적普寂에게 선과 화엄을 배웠다. 이로 인해 그는 일본 화엄종의 초전으로도 본다. 천태학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나라의 대안사大安寺에 선원을 개설했다. 『사분률행사초四分律行事鈔』를 강의하고, 『범망경소梵網經疏』를 저술했다. 와카야마의 비소산比蘇山에서 참선하며 산악수험자山岳修驗者에게 영향을 주었다. 훗날 일본 천태종의 종조인 사이초의 스승이 된 교효行表가 제자가 되었다.

 

사진 3. 도선이 머문 나라의 대안사.

 

『원형석서』에서 도선은 교효에게 “나에게 심법이 있으니 여래선이라고 한다. 옛날 보리달마 삼장께서 천축에 와서 이 법을 혜가에게 전해 주어 승찬, 도신, 홍인, 신수를 거쳐 일곱 번째로 내 스승이신 보적에게 전해졌다. 내 스승은 처음에 숭산에서 선법을 주창하고 전하였는데, 도력으로 명성을 떨쳐 황제의 귀에까지 들렸다. 황제가 동도에 불러들여 화엄선원華嚴仙苑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화엄존자’라 불렀다. 나는 화엄존자를 따르며 심법을 얻었고, 그것을 그대에게 전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법의 요체를 상세히 풀이해 주었다고 한다.


사이초最澄의 우두선

 

교효의 영향을 받은 사이초는 804년 입당, 소위 4종상승四種相承으로 부르는 천태·밀교·선종·대승계를 전수받는다. 선은 천태산 선림사禪林寺의 수연脩然으로부터 우두선牛頭禪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귀국 후에 천태지의의 뜻을 따라 불교를 종합하고자 하는 의지를 발휘, 밀교마저 포용하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선을 또한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수행보다는 종합불교의 차원과 사종삼매의 관계 속에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진 3. 도선道璿이 머문 나라의 대안사大安寺.

 

지금까지와는 달리 본격적으로 선 자체만을 일본에 전한 사람은 중국 승려인 의공이다. 진언종의 조사 쿠카이空海가 중국 유학에서 귀국, 황태후에게 중국 선사를 모시기를 청하여 에가쿠恵萼가 파견되어 847년 도일이 이뤄졌다. 당시 회창의 법난으로 승려의 거취가 어렵게 된 이유도 있었다. 그는 마조도일의 제자로 제안齊安 국사의 제자다. 진언종의 근본도량인 교토 동사東寺의 서원書院에 있다가 새롭게 건립한 단림사檀林寺에서 선을 전했다. 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계율 파괴의 현실에 실망하여 7년 뒤에 귀국해 버렸다. 후일 에가쿠가 중국에 가서 그 사적을 기록한 「일본국수전선종기日本國首傳禪宗記」라는 비문을 받아와 교토의 나성문羅城門 옆에 세웠다.

 

가쿠아覺阿와 임제종

 

순수선에 대한 수학 의지는 가쿠아가 나올 때까지 세월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1171년 입송하여 원오극근의 제자인 항주 영은사寧隱寺의 불해혜원佛海慧遠의 지도를 받았다. 『원형석서』에는 가쿠아의 깨달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혜원에게 “선사께서 덕이 높고 의리에 밝으시다는 말을 바람결에 듣고서 감히 이 방장을 찾아왔으니, 아무쪼록 심인心印을 전해 주시어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또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하고 또 형상을 떠나고 언어를 여윈다고는 하지만 말을 빌려서 요체를 보여 주십시오.”라며 가르침을 청했다. 혜원은 “중생들은 허망한 견해를 짓나니, 부처를 보고 세계를 보는도다.”라고 했다.

 

가쿠아는 글로써 “무명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깁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혜원이 한 대 때렸다. 가쿠아는 즉시 혜원에게 의문을 풀어 달라고 했다. 그해 가을, 남경으로 가는 길에 장로강長蘆江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혜원이 가르쳐 준 종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다섯 게송을 지었는데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참을 구하고 거짓을 없애는 일은 본래 오묘한 것이 아니었고, 바로 거짓에서 참을 밝히는 것 모두 그릇되도다. 웃음을 참는 영산의 늙은 송곳이여, 부서진 나무 구기를 남쪽으로 내던져라.”

그는 임제종 양기파를 전수했다. 귀국 후에 천태종의 본산인 비예산比叡山에 머물렀으나 대를 잇는 제자는 없었다. 다카쿠라왕高倉王이 궁중에 초빙, 선의 요지를 물었을 때, 피리를 꺼내 불었으나 왕은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다이니치 노닌大日能忍의 달마종

 

에사이 이전 실질적인 최초의 선종 개창자는 다이니치 노닌이다. 스승의 지도 없이 삼보사三寶寺를 세워 선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에 대해 비난하는 자들이 있어 제자인 쇼벤勝辨과 렌추鍊中를 육왕산의 불조덕광佛照德光에게 보냈다. 노닌의 깨달음이 담긴 게송을 읽고 덕광은 임제종 대혜파의 전법 인가장과 법의, 그리고 찬讚이 쓰인 달마상을 건넸다. 정통성을 인정받아 일본 달마종을 개창했다. 법을 이은 가쿠안覺晏의 제자 가운데 고운 에조孤雲懷獎는 도겐道元의 제자가 되어 그가 개창한 영평사永平寺 제2조가 되었다. 에조는 옆에서 들은 도겐의 법어를 『정법안장수문기正法眼蔵随聞記』에 기록했다.

 

달마종은 당시 기성 종단이었던 천태종의 탄압으로 포교를 금지당했다. 『원형석서』 ‘에사이편’에서는 사자상승이 없는 노닌이 거짓으로 선종을 전파하는 바람에 에사이의 선종과 혼동되어 관리들과 서민들이 에사이를 내쳤다고 한다. 두 사람이 변론을 펴서 문답하는 중에 노닌은 입을 다물고 물러나 에사이의 도력이 높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실제로 에사이는 『흥선호국론興禪護國論』에서 노닌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노닌은 덕광으로부터 받은 『위산경책潙山警策』을 출판했다. 이는 일본 최초로 개판된 선적이다. 달마종은 비록 조동종에 흡수되었지만, 조동선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대에 중국선은 승려들에 의해 끊이지 않고 전파되었다. 그들에 관한 기록이 단편적이고 저술들 또한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어 독자적인 선풍이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위에서 드러난 선승들 말고도 민간에는 선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래되고 있다. 9세기 초 케카이景戒가 기록한 불교설화집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에는 선사들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예를 들어 백제로부터 도래한 선사 홍제弘濟는 사찰 건립에 힘을 쏟았다. 어느 날 위험에 처한 큰 거북을 도왔는데 그 거북이 은혜를 갚았다고 한다.

 

 

사진 5. 불교설화집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강담사講談社).

 

민중들의 처지를 돌보는 선사들은 주로 치병, 적선, 주술, 멸죄, 복지 등의 행위를 통해 민간 포교에 앞장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지되었던 고대 민간포교 현장에서 활동하는 선사들이 민중들에 의해 특별한 능력자들로 받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는 그러한 승려들을 선사로 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번뇌를 끊고 깨달음에 든 자라는 고유한 인식에 앞서 선사야말로 현세이익을 줄 수 있는 존재로 받들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궁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속일본기』에는 간병선사를 의사로서 지역에 파견하기도 하며, 궁중에 중용하는 기사가 나온다. 나아가 지계와 간병에 뛰어난 10인의 간병선사제도를 두기까지 한다. 이들은 나이구부 십선사內供奉十禪師(궁중 도량에서 일하는 10명의 선사)라고 불렀다. 산림에서 수행하는 청정한 승려들이 궁중에서 불법을 매개로 치병까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실제로 고대의 승려들은 의승醫僧 또는 승의僧醫로서 활약하고 있음을 여러 문헌에서 알 수 있다. 선사에 대한 이미지는 중국 선종의 대두 이래 다양한 방식으로 민간 혹은 권력층에 전달되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 이처럼 치병과 간병에 선사들이 활용되고 있다는 점은 불법의 효용이 영과 육 모든 면을 치유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과 사회가 점점 깊이 병들어 가는 상황에서 숙고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아무튼 일본 고대의 선은 비록 발상지인 중국과는 시차가 느껴지지만, 불법의 근원인 깨달음을 향한 열망이 일본에도 예외 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선이 매우 보편적인 불법의 수행 체계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고대 선사들의 노력이 불법의 토착화가 이뤄지는 중세 선종의 만개로 이어지고 있음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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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원불교 교무, 법명 익선. 일본 교토 불교대학 석사, 문학박사. 한국불교학회 전부회장, 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 원광대학교 일본어교육과 조교수. 저서로 『아시아불교 전통의 계승과 전환』(공저), 『佛教大学国際学術研究叢書: 仏教と社会』(공저)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일본불교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그 교훈」 등이 있다. 현재 일본불교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wonyos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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