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와 불교윤리 ]
현대사회와 불교윤리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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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 2024 년 1 월 [통권 제129호] / / 작성일24-01-05 13:16 / 조회1,741회 / 댓글0건본문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일반 대학원 수업 때 “불교에 계율은 있으나 윤리가 없다.”라고 말했다가 전통 강원 출신 스님들의 집단반발을 산 적이 있다. 특히 비구 스님들의 거부감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들은 계율이 곧 윤리와 도덕이라고 생각하는 듯했고, 더욱이 불교가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고 오해를 했던 것 같다.
시대가 불교윤리를 요청하다
계율과 달리 윤리는 굳이 비유하자면 계율의 근거를 다시 논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보는, 서양 철학적 입장임을 이해시키려고 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수업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동성애와 같은 다소 불편한 주제의 토론 수업에도 학인 스님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열띤 갑론을박을 주고받는다. 이제 불교도 세상의 일과 거리를 둘 수 없는 시대가 되었음을 실감하고 있다.
이른바 ‘불교 윤리(Buddhist Ethics)’의 학문적 역사는 고작 60여 년에 불과하다. 윈스톤 킹이 자신의 책 『열반을 희망하며(In the hope of Nibbana)』(1964)에서 불교와 윤리의 관계에 대해 상식적인 물음을 던진 것이 사실상 불교 윤리학의 출발이었다. 그 후 자야틸레케와 프레마시리, 하말라바 사다티사, 칼루하파나, 다미엔 키온, 피터 하비 등에 의해 학문적 명맥이 근근이 이어져 오다가 30년 전인 1994년에 다미엔 키온과 찰스 프레비쉬가 중심이 되어 온라인 《불교윤리저널(Journal of Buddhist Ethics)》이 창간되면서 조금씩 활기를 띠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불교 윤리에 대한 교학적 관심과 전문적인 연구자의 숫자는 다른 불교학 연구 분야보다 한참 못 미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는 불교가 사회규범이나 계율의 합리성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수행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알다시피 불교에서는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과 같은 윤리적 판단기준이 처음부터 분별지의 영역에 속하는 담론으로 여겨졌다. 반면에 열반과 같은 궁극적인 진리는 세속적 분별지를 넘어 초세간적인 무분별지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불교도 세상의 일에 귀를 기울이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때는 옳았을지 모르나 지금은 틀렸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종교가 세상을 가르칠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시대는 벌써 지났다. 시민들의 교육 수준과 생활 수준이 종교 영역의 간섭이나 지배를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 종교가 어떤 방식으로든 대답하지 않으면 종교의 역할과 기능이 의심받는 시대가 되고 말았음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처럼 역사의 흐름은 불교도 고유의 클래식 음악만 고집하지 말고, 보통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대중 친화적인 음악도 자주 들려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윤리학적인 사고가 발달하지 않았던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불교가 발생할 무렵인 기원전 5세기경의 인도 대륙은 고대 그리스와는 달리 개인의 행복이나 사회의 정의와 같은 인문학적 담론이 형성되기 어려운 사회구조였다. 흔히 말하는 봉건 전제군주국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불교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회경제적인 삶과 이를 안내, 관리, 통제하는 법률 시스템을 정면으로 거부했던 출가수행자 집단으로부터 태동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불교라는 종교는 도시의 전통이나 관습과는 거리를 둔 채 출가수행자의 길을 걸었던, 탁발승들의 종교적 목적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청정 비구와 비구니로 구성된 승가 공동체는 세상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는 도덕적 담론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시공간이다. 재가자의 재보시와 출가자의 법보시를 서로 교환하는 최소한의 경제활동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만 사부대중 집단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질서의 확립 및 계율의 위반에 상응하는 처벌은 불가피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율장은 승가 집단 내부의 문제 해결 방식과 절차를 담아 놓은 행위규범집이었지 일반사회의 공통적인 관심사까지 수용, 반영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계율의 확립과 준수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기 위한 일종의 도덕 교과서였던 셈이다. 그런 만큼 그것 자체가 곧 출가의 최종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불교가 형이상학적 깊이에 반해 윤리학적 사고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은 이런 종교적 성립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불교 윤리의 학문적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구의 윤리학적 흐름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어제의 ‘약속 및 관습 또는 규범’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행위에 대해 ‘옳거나 그르다(right or wrong)’고 판단하는 이른바 의무론과 오늘 선택하는 이 행위가 내일의 행위 목적에 비추어 과연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미리 계산해서 ‘좋거나 나쁘다(good or bad)’고 판단하는 목적론 혹은 결과주의적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외에도 도덕적 품성의 계발을 통해 인격적 완성을 도모하려는 전통적인 의미의 덕론도 있었다. 앞으로 논의할 불교의 윤리적 입장은 이런 세 가지 요소들을 균형감 있게 골고루 함축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 윤리는 승가의 행위규범인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보면 법칙론 내지는 의무론이고,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모든 행위를 ‘깨달음’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목적론이자 결과주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와 동시에 불교는 탐진치의 삼독심을 끊고 붓다와 같은 지혜와 자비를 갖춘 완성된 인격으로 거듭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덕론적 성격도 가진다.
다수의 불교 학자들은 붓다의 교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비슷한 목적지향적 윤리학에 가깝다고 결론짓기도 했다. 얼마 전부터는 불교가 지고지순至高至純의 목표인 열반을 얻기 위해 개인적 자비심의 실천을 강조하는 일종의 ‘성품 결과주의(character consequentialism)’라고 역설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불교 윤리의 학문적 특성을 어떻게 정의하든 21세기 불자들의 일차적 관심사는 세상의 일들과 관련된 윤리적 쟁점들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공유하고, 이를 직접 구현해 보자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이와 관련하여 영국의 불교 윤리학자인 다미엔 키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적 관점이 불교 윤리의 인식과 가장 가까운 서구적 사례라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입장은 현재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시각은 최근 들어 불교윤리는 공리주의적 결과론의 한 유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찰스 굿맨과 바브라 클레이톤 등으로부터 이론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두 사람은 불교 윤리가 필립 이반호에의 ‘성품 결과주의’와 훨씬 더 잘 호응한다고 지적한다.
성품 결과주의는 도덕적 성품의 함양이 윤리적 사고와 행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는 공리주의의 최신 버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금도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관심을 가지고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덕론보다 결과주의적으로 접근하는 이런 방법론이 일상적 의미의 실천에서 더 유용하다고 주장하는 쪽이다.
평소의 그런 생각은 얼마 전에 찰스 굿맨의 책을 직접 번역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이쯤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불교 윤리학의 다양한 측면들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가운데 각자가 직면한 상황에서 가능하면 좀 더 현실성 있는 불교 윤리적 해석과 함께 실천적 대안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에 대한 불교 윤리적 관심은 포교와 전법의 출발점이다
이런 논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불교가 교학의 탁월성뿐만 아니라 응용의 차원에서도 논의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오래된 미래의 지혜임을 재확인함으로써 불교 윤리의 적용 범위를 계속 확장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포교와 전법은 붓다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에 어떤 형태로든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불교 윤리학적 논의 자체가 모든 현실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전제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사실 우리들의 윤리적 갈등 상황은 서로 모순적인 복잡한 요소들로 겹겹이 얽혀 있다. 그런 만큼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적 지식을 과감하게 실제로 적용해 봄으로써 개인의 도덕적 실천 능력을 배양하고자 하는 노력이 요청될 것으로 보인다.
붓다의 가르침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훌륭한 가치체계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편의성과 실용성은 만족할 만큼 갖추지 못했다. 소위 온고溫故의 가치는 지신知新에 있고, 계왕繼往의 목적은 개래開來에 있지 않겠는가. 전통 교학이 ‘이전의 것을 따뜻하게 덥히거나 앞서간 것을 계속 잇는 것’에 빗댈 수 있다면, 불교 윤리는 ‘새로운 것을 알거나 앞으로 다가올 것을 미리 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앞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뒷말의 실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야 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세상은 2,500년 역사의 불교 전통을 향해 근본적인 취지보다는 실천적인 접근의 가치를 더욱 강조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연재를 계기로 전통불교의 풍부한 ‘콘텐츠’와 서양 윤리학의 체계적 ‘시스템’이 서로 상보相補하는 가운데 불교 윤리의 가치와 효용성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될 수 있기를 바란다. 붓다의 위대한 교설이 서양 윤리학의 방법론과 중도中道의 자리에서 만난 불교 윤리학이 체계적으로 성숙해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 호부터는 세상의 몇 가지 윤리적 쟁점들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간략하게 소개해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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