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와 사상]
부처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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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4 년 1 월 [통권 제129호] / / 작성일24-01-05 13:20 / 조회1,805회 / 댓글0건본문
비교종교학자의 불교 이야기 1 |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 명예교수)
연재를 다시 시작하면서
지난 1년 간 ‘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라는 큰 제목을 가지고 글을 쓰라는 부탁을 받고 1년치를 다 채워서 이제 끝나는 것으로 알고 작별 인사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편집인으로부터 계속 연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민하다가 ‘비교종교학자의 불교 이야기’라는 큰 제목을 가지고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비교종교학자의 입장에서 불교를 역사적으로 살펴 가면서 이웃 종교들, 특히 기독교와 상통하는 점, 서로 배울 점 등을 부각해서 종교 일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을 썼으면 합니다.
부처님의 탄생
오늘은 우선 부처님의 탄생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불자라면 다 아시는 이야기이지만 다시 간단히 기술하고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상이한 자료 때문에 하나로 통일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대로 이야기해 보면, 부처님은 기원전 6세기 히말라야 산 밑자락, 지금의 네팔과 인도 변경 부근에 있던 카필라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샤카釋迦족에 속하는 슈토다나[淨飯] 왕이었고 어머니는 아름다운 마야摩耶 부인이었습니다. 부부는 결혼 후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부인이 45세쯤 된 어느 날 꿈을 꾸는데, 흰 코끼리가 코로 흰 연꽃을 들고 나타나 마야부인의 주위를 몇 바퀴 돈 다음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이었습니다. 그 후 부인은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해산일이 가까워오자 그 당시의 관습대로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로 하고 친정으로 향했습니다. 가마를 타고 가는 도중 룸비니라고 하는 동산에 이르렀을 때 산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무우수無憂樹 나뭇가지를 잡으려고 오른손을 드는 순간 아기가 왼쪽 옆구리에서 나왔습니다.
아기는 나오자마자 북쪽을 향해 길게 일곱 발자국을 걸어가서 오른손으로 하늘을,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사자와 같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하늘 위와 땅 아래에 나 홀로 존귀하도다[天上天下唯我獨尊].”라는 탄생게를 외쳤습니다.
여기까지는 불자들이 모두 잘 아시는 이야기겠지요. 이제 예수님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경우
예수님의 탄생도 성경 4복음서에 약간씩 다르게 나와 있어 통일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에 따르면 지금의 팔레스타인인 옛 유대 땅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마리아라고 하는 젊은 처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요셉과 약혼 관계에 있었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도 전에 마리아가 아기를 배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약혼자를 배려해서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는데, 그때 천사가 그의 꿈에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받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고 하고, 이어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따라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에 모두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구조사에 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북쪽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는데, 한국 잇수로 따져 330리나 되는 고향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아기 예수를 낳았다는 것이 이른바 동정녀 출생 이야기입니다.
몇 가지 다른 경우들
첫째, 부처님이나 예수님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위대한 분들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출생이 특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나 그리스, 중국의 영웅들의 탄생 설화는 물론 우리에게 가까운 우리 역사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예로 우선 박혁거세를 들 수 있습니다.
지금의 경주 지방에 있던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모여 나라를 세우자고 결의하고 덕 있는 사람을 임금으로 모시기로 했습니다. 촌장 중 한 분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흰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다가가자 말은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고 그 자리에 큰 알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 알을 건드리자 거기에서 건강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그가 혁거세.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고 하여 박혁거세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혁거세가 태어난 날 닭처럼 생긴 용, 계룡鷄龍이 우물가에 나타나 그 옆구리로부터 여자아이를 나았습니다. 이름을 알영이라 했는데, 혁거세와 알영은 자라나 부부가 되고, 혁거세는 서라벌(신라)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 외에 신라 4대 왕 석탈해도, 김씨의 시조 김알지도 모두 알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둘째, 또 다른 예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입니다. 하늘의 신 해모수가 하백의 세 딸 중 가장 아름다운 유화를 꼬여 그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 일로 하백은 유화를 집에서 쫓아냅니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헤매던 유화를 동부여의 금와왕이 그의 궁궐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런데 유화가 궁궐 방안에만 머물렀는데도 햇빛이 계속 그녀를 따라다니며 그녀를 비추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덜컥 임신하게 되었는데 해산을 하고 보니 큰 알이었습니다. 금와왕은 이를 불길하게 여겨 없애려고 온갖 방법을 다 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드디어 그 알에서 한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습니다. 아이는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혼자서 걸어 다니고 일찍부터 힘이 세고 총명하였습니다.
탄생 설화의 속내
이런 이야기들을 문자 그대로 믿어서 나름대로 신앙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대로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종교사적으로 우리에게 말해 주려는 더 깊은 뜻이 무엇일까? 그 ‘속내’를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첫째, 이런 기적적인 탄생 이야기는 위의 박혁거세나 주몽의 이야기에서 보듯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경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이야기 하나 때문에 불교나 기독교가 특별하다거나 우월하다고 주장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둘째,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런 정신적, 정치적 영웅들이 이렇게 특별한 방법으로 탄생했기 때문에 위대하게 되었다고 보기보다는 이런 이들이 그만큼 위대하기에 그들의 탄생도 보통 이상이어야 한다고 본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런 기이한 일이 생긴다고 믿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를 일거에 배격할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그런 정신적, 정치적 영웅들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대하게 보였던가, 그들의 가르침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느껴졌던가를 가름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순전히 역사적이나 생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무조건 그대로 믿으라고 하는 것을 문자주의(literalism)라고 하는데, 오늘날 젊은이들이나 지성인들에게 이런 문자주의를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에서도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여 문자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바울이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는 ‘속내’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자주의를 경계하는 이들이 많지만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비평가 및 문학이론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캐나다의 노드럽 프라이(Northrop Frye, 1912∼1991) 한 분만을 소개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의미 깊은 말을 남겼습니다.
“성경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연일 뿐이다. [역사적 사실을] 보고한다는 것은 성경 저자들에게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들은 신화나 은유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해준 것이다. 그들이 쓴 것은 상상력(vison)의 원천이 되는 것이지 교리의 근거가 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셋째, 부처님이 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과 예수님이 말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아我’와 예수님의 ‘내가’가 무슨 뜻일까 하는 것입니다. 분명 이는 육체적이나 역사적인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의 ‘나’는 우리 모두 속에 스며 있는 ‘우주적 나(cosmic I)’, ‘우리 본연의 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부처님의 선언과 예수님의 선포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나가면서
제가 평소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불경이든 성경이든 모든 경전은 결국 변혁(transformation)을 위한 것이지 정보(information)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전은 철지난 과학책이나 역사책이 아닙니다. 경전에서 오늘을 위한 메시지를 얻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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