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일본 양기파의 개산조 엔니벤넨
페이지 정보
원영상 / 2024 년 3 월 [통권 제131호] / / 작성일24-03-04 09:06 / 조회1,838회 / 댓글0건본문
일본선 이야기 3 |
임제종의 양대 파 중 하나인 황룡파는 에사이에 의해 일본에 유입되었다. 오늘날 건인사파가 계승하고 있다. 양기파는 엔니벤넨(圓爾弁圓, 1202〜1280, 이하 엔니)이 그 문을 열었다. 엔니는 양기방회-원오극근-파암조선-무준사범의 문하에 속한다. 양기파의 또 다른 갈래인 송원숭악의 계보도 일본으로 이어진다. 일본 임제종은 에사이 이후 파암파와 송원파의 선사들이 활동하게 된다. 엔니의 문류는 그의 시호를 따 쇼이치파聖一派를 이룬다. 본산은 엔니가 개산조가 된 교토 동복사東福寺다.
제주도에 표류하다 귀국
엔니는 지금의 시즈오카시 사람이다. 5세 때 『구사론』, 12세 때 『법화현의』, 16세 때 『마하지관』·『법화문구』 등을 독파했다고 한다. 『원형석서』에서는 어릴 때, 지관을 강설하는 자리에서 강사가 “사성제 밖에 따로 법성을 세운다.”는 구절에 말문이 막히자 이를 명석하게 풀이했다고 전한다. 18살에 천태종 원성사園城寺에서 출가하고 동대사東大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에사이의 제자인 건인사의 에초榮朝에게 교외별전의 선의 도리를 물었다. 에사이가 천태산 만년사에서 사사한 허암회창이 전한 <선문대계禪門大系>의 그림을 받고 관정도 받았다. 겐사이[見西] 아사리로부터는 밀교의 인印을 체득했다. 마침내 중국 유학을 결심하고 1235년 송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승려들이면 반드시 들리는 천동산, 아육왕산을 경유하여 항주의 정자사, 영은사에서 수학했다. 천축사의 선월백정으로부터 천태종의 상승지도를 받고, 덕녕퇴경으로부터 무준사범(불감선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스스로 찾아가 만난 불감은 한눈에 그가 바로 법기임을 알아보고 시자로 삼았다. 불감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는데, 불감은 엔니에게 다음과 같이 부촉했다.
“그대의 배움의 바다는 광대하고 아득하나, 항상 나의 죽비 아래에서는 일시에 말라 버린다. 훗날 본국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물방울 없는 곳에서 가로로 파란을 일으키고 더없이 빼어난 깃대를 세워 우리 도를 떨치고 드러내어, 모름지기 저 윗대의 조사들이 남긴 향기를 이어받아 영원히 미래 세상까지 이롭게 해야 한다.” - 『원형석서』 권 7.
헤어질 때는 <종파도>를 주면서 “이것이 법을 전하는 신표다.”라고 하였다. 그 내용은 위의 부처로부터 좌우에는 서쪽 인도의 스물여덟, 동토의 여섯, 그 아래에는 남악회양에서 불감까지 54세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일본의 엔니에게 법을 전한다는 뜻의 글이 적혀 있었다. 법의와 지팡이도 받았다. 1241년 출발,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일본으로 귀국했다.
『엔니유물구족목록圓爾遺物具足目錄』 등 여러 문헌에 의하면, 그가 중국에서 가져온 서적은 선종의 등사, 어록, 시문집은 물론, 경론, 천태장소, 유교 전적 등 천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엔니는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귀국 후에 불감과도 밀접한 교류를 이어갔다. 귀국한 다음 해인 1242년에 경산徑山의 대가람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하카타의 상인 사국명謝國明에게 부탁, 건축 재건을 위해 목재 천 본을 보내기도 했다.
왕실과 권력자의 초청을 받다
『원형석서』에서는 불감이 헤어질 때, ‘칙사만년숭복선사勑賜萬年崇福禪寺’라는 글자를 주면서 “그대가 최초로 머무는 사원에서 이것을 편액으로 삼으라.”고 했다고 한다. 엔니는 띠집에라도 의탁한다면 숭복을 걸겠지만 칙사 두 자는 어떻게 쓰겠느냐고 반문하자, 불감은 “너의 도량이라면 반드시 왕공들로부터 흠모와 존숭을 받을 것이다. 너는 그것을 갖고 가기만 하고 사양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엔니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단에[湛慧]가 후쿠오카에 정사를 세우고 엔니를 초정, 개당설법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 절의 이름을 숭복사로 했다. 단에는 불감선사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인물로 후에 엔니의 제자가 되었다. 엔니가 주석하던 하카타의 승천사承天寺와 이 숭복사에 대해 기존의 사찰에서 박해를 가하자 조정에서는 두 절을 관사로 삼았다. 이에 엔니는 불감이 써준 칙사 두 글자를 높이 내걸었다고 한다.
이처럼 엔니의 임제종은 국가와 밀접한 관련을 통해 성장하기 시작한다. 도겐[道元]의 조동종과는 전혀 다른 길이다. 도겐의 스승인 천동여정은 포교에 대해 국왕이나 대신들에게 접근하지 말고 취락성읍에 거주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후쿠이현의 깊은 산 속에 영평사를 개창한 것은 그 뜻을 받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중세의 선종 5산 10찰에는 조동종의 사찰은 한 곳도 소속되지 않았다. 임제종 사찰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불감이 주석했던 항주 경산은 당시 선종 5산의 제1찰로 오랫동안 지위를 누리며, 남송의 황제나 관료, 사대부들의 외호를 받아 불법을 전파했다. 그의 경험이 엔니에게도 일관된 포교 전략이 되도록 전한 것이다. 고대의 불법은 실제로 왕권이나 세도가들의 비호를 받아 성장한 것도 사실이다. 이는 고대 동아시아불교의 공통 분모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여러 왕이나 상왕, 권력가들은 엔니를 초청하여 강설을 듣거나 보살계를 받기도 했다. 『원형석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당시 권력자인 타이라노 토키요리[平時賴]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지금 각 지방에서 행하는 설법들은 다 다릅니다. 어떤 자는 “망녕된 마음이 인연에 따라 일어나서 생겨남과 사라짐이 있게 되었고, 참된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고 하고, 또 어떤 자는 “커다란 의심덩어리에 크낙한 깨달음이 있다.”고 하며, 또 다른 이는 “학자란 모름지기 일어나는 생각을 보아야 할 것이니, 그것을 회광반조라 한다.”고 하니, 어느 것이 이치에 가깝고 어느 것이 이치에서 먼지를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해 엔니는 “여기 어디에 멀다 가깝다 하는 말이 있습니까?”라고 답했다. 토키요리가 “어찌 방편이 없겠습니까?”라고 되묻자 “한 물건이라고 말하더라도 맞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수긍한 토키요리는 “부디 저의 외호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1260년 올암보녕이 일본에 왔을 때, 아마도 법거량을 한 모양이다. 토키요리는 엔니에게 “제가 올암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스승님의 겸추鉗鎚(쇠몽둥이)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편지를 써서 보냈다. 직지인심의 가르침을 다소 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1255년 당시의 세도가인 왕의 섭정 구조 미치이에[九條道家]는 교토의 동쪽에 거대한 가람을 창건하여 엔니를 초청, 개당설법을 맡겼다. 그를 주지로 한 선종사찰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동복사다. 현재의 동복사는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시대 건축의 정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엔니는 이후에도 주석하면서 중국과의 인적 교류를 이어갔다. 엔니의 제자들인 후몬普門, 에교慧曉, 에운慧雲, 준구[順空], 치칸[智侃] 등이 입송하여 수학했다. 선종 발상지에서의 수학은 쇼이치파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후몬은 남선사파를 이루어 또 다른 일가를 이루었다. 후에 『원형석서』를 편찬한 고칸 시렌과 『사석집沙石集』을 저술한 무주 이치엔[無住一圓] 같은 문필이 뛰어난 승려들이 배출되었다.
엔니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그는 『종경록』을 늘 강의했다. 그리고 유불선 삼교에 대해 정통했다. 선을 기반으로 했지만, 당시 여전한 종합불교 천태종의 영향력 아래 그는 염불, 계율, 밀교를 포용한 겸수선을 표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복사에는 순수선은 물론 천태승이나 율승 등도 모여 수행했다. 도겐처럼 지관타좌의 순수선을 강조, 현밀체제顯密體制에 대항하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학자 구로다 토시오[黒田俊雄]는 근·현대에 학계에서 강조되던, 중세 신불교 우위의 학설에 일대 타격을 가했다. 7, 8백여 년 전에 흥기한 신불교가 중세 초기부터 맹위를 떨쳤다는 환상을 지운 것이다. 『일본 중세의 국가와 종교』(1975)에서 중세에는 여전히 밀교를 주축으로 하는 구불교 교단이 국가와의 유착 속에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웠다. 즉, 밀교에 의한 진혼주술적인 신앙을 기반으로 보편적이고 절대적 종교의 세계관을 견지했다. 이를 현밀체제론顯密體制論이라고 한다. 엔니의 쇼이치파는 이러한 객관적인 환경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본다.
동복사 교단은 한때, 주지는 다른 파와의 교류를 하지 말고 자파만을 유지하도록 경계했다. 박학다식한 교의 설파와 뛰어난 변재를 가진 엔니에게 왕과 무사들의 귀의가 줄을 이었다. 그 덕분에 쇼이치파는 70여 곳의 관사를 지정받았다. 이 외에도 다른 지역으로 파송되거나 초빙을 받는 일이 잦아 교단의 명맥이 끊어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당시 왕이 주재한 교토나 막부가 있던 가마쿠라의 선림은 시방주지제十方住持制를 통해 유능한 인재를 종파를 가리지 않고 등용했기 때문이다.
일본 차와 우동의 시조로 추앙받다
열반을 앞둔 1280년 작은 병세가 있었다. 상왕이 관의를 보내 보살피게 하였다. 차도가 있어 대중은 기뻐했다. 그러나 엔니는 “서리 맞은 잎이 잠시 떨어지기를 멈추었을 뿐,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15일 후에 “본사 법당의 보화왕좌寶華王座에 올라가서 말후구를 설하고 대열반에 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날이 되자 제자 무덴無傳이 왔다. 엔니가 헤어진 지 20년이 되었다고 하자, 제자는 겨우 19년이라고 대답했다. 엔니는 “네가 아직 꽉 찬 수를 모르는구나!”라며 그날 밤에 열반하겠다고 했다. 시자에게 몇 시냐고 묻자, “아까 닭이 울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붓을 들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방편, 일흔아홉 해가 지났구나. 분명한 뜻을 알려고 했으나, 부처와 조사가 전하지 않았도다.(利生方便 七十九年 欲知端的 佛祖不伝)”(『원형석서』제7권)라고 쓴 뒤 붓을 던지고는 입적했다.
고칸 시렌은 기리는 말에서 에사이가 1190년대에 황룡일파를 이끈 것은 다만 길을 연 것일 뿐이며, 난계도륭이 도일하여 가르침을 펼쳤지만 임금의 도성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혜의 해가 비추는 도는 임금과 잘 어울렸고, 그 교화는 서울에 두루 미쳤다. 외부의 업신여김을 막고 올바른 종지를 세웠으며, 교학의 벼리를 정돈하고 선의 벼리를 높이 들었으니, 조사의 도가 때를 얻은 것이리라!”라고 맺고 있다.
그의 언설은 임제종의 양대 파 황룡파와 양기파 모두는 이렇게 해서 일본에 정착하게 된 것을 잘 보여준다. 이후 중국에서 양기파의 선승들이 도일하여 일가를 이루기도 하고, 엔니가 유학을 장려했듯이 일본의 선승들이 중국에서 수학하여 그 토대를 튼튼하게 구축했다. 17세기 명·청 시기에 은원융기隠元隆琦가 일본에 초빙받아 황벽종을 개창한 그 씨앗도 이미 이 시기에 심어진 것이다. 하나조노花園 왕이 하사한 시호 쇼이치국사는 일본 최초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일생이 갖는 무게가 컸음을 반증한다. 고려 국왕이 법설을 요구할 정도로 엔니는 한반도에도 잘 알려진 것 같다. 그의 법설은 『쇼이치국사어록』·『쇼이치국사법어』로 남아 있다.
엔니는 에사이가 그랬듯이 중국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차 덕분에 ‘시즈오카 차의 조祖’로 칭하기도 한다. 또한 우동 제조 때 밀분을 만들 수 있는 제분기계를 송으로부터 들여왔다고 하여 ‘우동의 조祖’로 부르기도 한다. 선문화의 수입은 단순히 수행체계로써의 일부분만이 아니라 삶의 전파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선문화가 생활문화에 뿌리 내린 일본불교 역사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옛거울古鏡’, 본래면목 그대로
유난히 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불면석佛面石 옆 단풍나무 잎새도 어느새 불그스레 물이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포행을 마치고 들어오니 책상 위에 2024년 10월호 『고경』(통권 …
원택스님 /
-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 속에 있다네
어렸을 때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시절에 화장실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거든요. 무덤 옆으로 지나갈 때는 대낮이라도 무서웠습니다. 산속에 있는 무덤 옆으로야 좀체 지나…
서종택 /
-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없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
성철스님 /
-
구루 린뽀체를 따라서 삼예사원으로
공땅라모를 넘어 설역고원雪域高原 강짼으로 현재 네팔과 티베트 땅을 가르는 고개 중에 ‘공땅라모(Gongtang Lamo, 孔唐拉姆)’라는 아주 높은 고개가 있다. ‘공땅’은 지명이니 ‘공땅…
김규현 /
-
법등을 활용하여 자등을 밝힌다
1. 『대승기신론』의 네 가지 믿음 [질문]스님, 제가 얼마 전 어느 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글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이렇게 여쭙니다. 그 스님께서 법문하신 내용 중에 일심一心, 이문二…
일행스님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