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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크게 그러함은 항상 그러함이고 항상 그러함은 그냥 그대로 그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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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4 년 3 월 [통권 제131호]  /     /  작성일24-03-04 09:56  /   조회1,77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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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41 | 만덕산 백련사 ⑤

 

서양에서는 지식과 기술의 혁명이 빠르게 전개·확산되면서 1760년경에서 1820년경 사이에 영국에서는 방적기 발명, 증기 혁명, 철강 산업 등을 기반으로 한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 일어나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게 된다. 19세기 말에는 미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철강, 화학, 자동차, 전기 등의 기술 혁신이 혁명적으로 발생하여 제2차 산업혁명이 전개된다. 

 

19세기 산업혁명과 조선의 정체

 

우리가 잘 아는 화가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그림이 등장하여 사실주의寫實主義(Realism)가 풍미하던 때가 1850년 이후부터이고, 1860년대부터는 클로드 모네(Oscar Claude Monet, 1840~1926)가 문을 연 인상주의印象主義(Impressionism)그림이 회화사를 새로 써나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세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이 시절 등장하였다. 모두 지식과 기술이 가져온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변화이고 개벽開闢이었다.

 

사진 1. 해탈문.

 

조선에서 우리가 물고 뜯고 싸우며 서로 죽이는 사이에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다. 1883년에 처음으로 미국방문단을 꾸린 보빙사報聘使 일행이 미국에서 본 것은 바로 이런 산업혁명의 모습이었다. 1884년 피끓는 청년 지사들이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나라를 바꾸어 보려고 했지만, 결국 민비세력에 의해 되치기를 당하여 실패하고 역적으로 몰려 죽거나 화를 입었다. 역사는 기억한다.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한 몸 던진 젊은 그들을. 이름하여 33세의 김옥균金玉均(1851~1894), 28세의 홍영식洪英植(1856~1884), 25세의 서광범徐光範(1859~1897), 23세의 박영효朴泳孝(1861~1939), 20세의 서재필徐載弼(1864~1951)이다.

 

고종과 민비세력들은 김옥균 선생을 상해에서 자객을 보내 암살한 것도 모자라 다시 조선으로 운반해 온 시신을 양화진 모래사장에서 다시 토막을 내고 목을 잘라 걸어두는 만행을 저질렀다. 죽은 자를 다시 반역죄로 처단하는 것은 명백히 불법이었지만 눈도 깜짝하지 않고 이런 짓을 했다. 고종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자기 좋은 것만 하며 국고를 탕진하고 있었다. 군주제에서는 무지하고 무능한 자가 왕으로 앉아 있는 것은 최악이다. 그런 고종은 결국 1910년 전쟁도 해보지 않은 채 일본에게 나라를 내주고 일본 정부가 주는 작위爵位와 거액의 돈을 받고 연명하는 길을 걸어가게 되지만 이것도 나중에 보게 되는 장면이다.

 

혜장화상의 뛰어남은 중국 학단에도 알려져 1811년에 우리나라 사신이 연경燕京에 갔을 때 완원阮元(1764~1849) 선생과 옹방강翁方綱 선생(1733~1818)의 아들 옹수곤翁樹崑(1786~1815)이 대둔사에 주석하고 있는 혜장화상이 유불에 통달한 해동의 고승이라는 말을 듣고 옹방강의 『복초재시집復初齋詩集』 1부部를 주었다.

 

그러나 사신이 돌아와 보니 이미 혜장화상은 입적한 다음이라 1812년에 그의 적전제자인 수룡색성袖龍賾性(1777~?) 화상과 기어자굉騎魚慈宏 화상이 주석하고 있는 대둔사로 보냈다. 오늘날 대흥사에 옹방강의 시집이 있는 사연이다. 이는 25세 청년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이 연경으로 가서 1810년 옹방강 선생을 만난 일이 있은 지 2년 뒤의 일이다.

 

백련사 도량의 현재와 당우

 

현존하는 당우로는 일주문一柱門, 해탈문解脫門, 만경루萬景樓, 대웅보전大雄寶殿, 시왕전十王殿, 천불전千佛殿, 나한전羅漢殿, 칠성각, 육화당六和堂,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주차장에서 사역으로 들어서는 곳에 일주문이 근래에 들어 세워졌다. 

 

사진 2. 이돈흥 글씨, 해탈문 현판.

 

서예가 이돈흥李敦興(1947~2020) 선생이 예서체隸書體를 바탕으로 해서楷書와 전서篆書의 획을 자유로이 결합하여 쓴 「만덕산백련사萬德山白蓮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면 짙은 동백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붉은 동백꽃이 피면 숲속에 작은 연등이 수없이 달려 있는 듯하고, 꽃이 떨어지면 붉은 비단을 깔아놓은 극락세계인 듯하다. 연지蓮池가 숨어 있는 숲속으로 난 길을 걸어가면 근래에 세운 해탈문을 만난다. 「해탈문解脫門」의 현판도 이돈흥 선생이 썼다.

 

그런데 여기에 서 있는 문을 해탈문으로 명명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의문이다. 가람배치의 방식으로 보면, 해탈문은 붓다가 있는 공간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문이기 때문에 대웅보전을 만나게 되는 마지막 당우인 만경루를 문과 누의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 보고 만경루의 아래 통로 위에 해탈문의 현판을 걸어 누와 문을 겸하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진 3. 이광사 글씨, 만경루 현판.

 

아니면 「만경루」 현판을 만경루 앞쪽 처마 아래에 걸고 「해탈문」 현판을 만경루 뒤쪽에 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면 일주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문은 해탈문이 아니라 천왕문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일주문~천왕문~만경루, 해탈문~불전으로 체계적인 배치가 이루어진다.

 

해탈문을 지나 근래 정비한 석축 사이로 난 계단으로 올라가면 중층으로 된 웅장한 만경루에 다다른다. 1층 기둥 아래를 지나 계단으로 올라 대웅보전의 앞마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만경루는 규모가 큰 누각인데, 강진만 일대의 앞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만경루에는 대웅보전을 마주 보는 쪽에 이광사 선생이 해서로 쓴 「만경루萬景樓」 현판이 걸려 있다.

 

사진 4. 이광사의 예서 글씨.

 

원교 선생은 이 글씨를 쓰면서 특이하게 붓을 흔들어 썼는데, 이러한 운필은 예서를 쓸 때에 구사를 하던 것이기도 하다. 현판의 크기에 맞추어 크게 해서체로 글씨를 쓰려면 큰 붓이 필요한데, 큰 붓을 구할 수 없을 때 작은 붓으로 큰 공간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획을 흔들어 쓰는 운필을 할 수는 있다고 보인다. 원교 선생이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운필을 그렇게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만경루와 대웅보전 사이의 공간은 좁은데 이 가운데 탑이나 석등은 없다.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다포식의 화려한 건물이다. 네 개의 추녀마다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가운데 문의 두 기둥은 끝에 생동감이 넘치는 용머리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대웅보전 안에는 삼세불 즉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불의 좌상이 1762년에 조성되어 봉안되어 있다. 1700년대에 제작된 후불탱화와 삼장탱화는 오랜 백련사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사진 5. 대웅보전과 만경루.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현판은 원교 이광사 선생이 붓을 흔드는 운필법으로 해서체로 썼다. 현판은 두 개의 나무판으로 나뉘어져 걸려 있는데, 원래는 여러 개의 작은 목판을 합쳐 하나로 만들고 현판의 갓을 만들어 걸었던 것인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현판의 갓이 떨어져 나가면서 판도 쪼개져 그것을 지금과 같이 두 개로 따로 나누어 걸어 놓은 것 같다. 지금이라도 원래의 현판 모습대로 수리하여 제대로 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대웅보전의 옆문으로 들어가면 문 양쪽 기둥 쪽에 각각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원래는 절문에 걸려 있던 것인데 어느 때인가 절문이 없어지고 2장의 목판으로 만들어진 현판도 훼손되어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을 대웅보전 안에 걸어둔 것 같다. 「백련사白蓮社」라고 된 판의 협서脇書에는, 이 글씨는 신라의 김생 글씨인데 이를 수리하여 칠을 하였으니 만년토록 보전되리라고 되어 있으나, 김생 글씨와는 전혀 딴 판이다.

 

사진 6. 대웅보전.

 

다산 선생도 글씨의 수준이나 만덕사라고 불리던 신라시대에 산 김생이 고려 때의 ‘백련사白蓮社’라는 사명寺名을 미리 썼다고 하는 것 등으로 볼 때 이를 김생의 글씨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하였다.

 

아무튼 이 두 조각의 현판은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세로로 「만덕산백련사」로 되게 합쳐 하나의 현판으로 수리하여 보존해야 할 것이다. 요즘에는 절문을 거대하게 세우기 때문에 가로로 길게 현판을 제작하여 걸지만 옛날에는 절문이 작아서 사명의 현판을 세로로 써서 건 경우가 많았다. 송광사, 선암사, 보림사 등의 현판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백련사는 최근에 들어 일주문과 해탈문을 세우고 석축을 쌓아 만경루로 가는 길을 정비하고 대웅보전 뒤로 다시 석축을 쌓아 여러 전각들을 새로 세웠다. 과거와 같이 고졸한 분위기는 사라졌지만 가람의 형태는 잘 정비되었다.

 

사진 7. 이광사 글씨, 대웅보전의 현판.

 

백련사의 동쪽 언덕에는 보조탑普照塔이 있는데, 이는 지눌화상의 것이 아니고 정오丁午국사 무외無畏화상의 사리탑이다. 정오국사도 호를 불일보조佛日普照라고 하여 지눌화상과 혼동하기 쉽다. 요세화상이 백련사에 보현도량을 연 때는 이미 지눌화상이 입적한 후이기 때문에 지눌화상이 백련사에 주석한 사실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다산선생도 지적하였다.

 

사진 8. 문 옆에 걸린 만덕산 백련사 현판.

 

여연스님과 사형사제간이 된 사연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오는 길은 양옆으로 키 작은 산 대나무들이 서 있고 간간이 야생 차나무도 있다. 그야말로 대나무 잎에 영근 이슬이 죽로竹露이고, 이 차나무 잎으로 만든 차는 죽로차竹露茶이리라. 어느 해인가 여연스님이 떨어진 동백이 넓은 비탈을 온통 뒤덮고 있으니 산에 붉은 양탄자가 깔린 것과 같다며 어서 와서 나무 그늘에서 차 한잔 하자고 하시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여연스님은 일찍이 우리 차에 관심을 가지고 다솔사多率寺를 출입하며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1904~1979) 선생에게서 다도茶道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효당 선생이 다호를 ‘효서曉誓’, 법명을 ‘여연’이라 지으시고 옆에 동석한 청사晴斯 안광석安光碩(1917~2004)선생이 뛰어난 서법으로 이를 써주신 일이 있었다고 한 사연을 여연화상으로부터 들었다.

 

사진 9. 송광사의 현판.
사진 10. 선암사의 현판.
사진 11. 보림사의 현판. 

 

그래서 대연거사大然居士로도 호를 쓰시던 청사선생이 나에게도 호를 이사異斯, 당호를 거연居然이라고 지어 주셨으니 그야말로 늦게 그 인연을 확인하게 된 셈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여연스님과 나는 사형사제舍兄舍弟를 하기로 하였다. 불법의 인연인지 다도의 인연인지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어느 날 나는 ‘대연의 여연이고 여연의 거연이라’, 이 어찌된 법연인가 하며 ‘大然之如然, 如然之居然’이라는 글을 대련對聯으로 써서 여연화상께 드렸다. 크게 그러함은 항상 그러함이고, 항상 그러함은 그냥 그대로 그러함에 있는 것이리라.

 

사진 12. 안광석 글씨, 효서여연.

 

여연화상은 올해 그간의 논의들을 모두 검토하고 새로 번역한 초의草衣(1786~1866) 선사의 『동다송東茶頌』을 간행하였다. 작비재昨非齋라는 당호堂號의 작은 거처를 마련하고 여전히 차밭을 가꾸고 차를 만들며 차 모임을 계속하고 계신다. 도연명이 속세의 관직을 그만두고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와 쓴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그렇다. 많은 오류와 판단의 착오를 거치고 비로소 제자리에 돌아왔을 때, 눈에 들어오는 말은 ‘지난 날 살아온 것에는 그릇된 것이 많고, 이를 깨달은 지금이야말로 바로 된 것(今是昨非)’이리라. 혜원선사와 서로 무언無言의 미소微笑로 나누던 도연명이 「귀거래사」에서 써 놓은 마지막 부분이다.

 

사진 13. 정종섭 글씨, 「귀거래사첩」 (부분).

 

아, 이제 마무리를 할 때이로다.

이 몸이 세상에 기대어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가고 머무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무엇 때문에 초조해하고 어디를 가려고 하는가!

부귀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고,

신선이 사는 곳을 찾기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로다.

좋은 날에는 홀로 거닐어보기도 하며,

때로는 지팡이 세워두고 밭고랑 김을 매기도 한다.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어보기도 하고,

맑은 시냇가에 앉아 시를 읊어보기도 한다.

잠시 조물주의 수레를 탔다가 마침내 돌아가면 될 일이니,

천명대로 살면 될 뿐 더 의심하고 망설일 필요가 없도다.

 

이의호 已矣乎 

우형우내복기시 寓形宇內復幾時 

갈불위심임거류 曷不委心任去留

호위호황황욕하지 胡爲乎遑遑欲何之

부귀비오원 富貴非吾願

제향불가기 帝鄕不可期

회양진이고왕 懷良辰以孤往

혹식장이운자 或植杖而耘耔

등동고이서소 登東皐以舒嘯

임청류이부시 臨淸流而賦詩

요승화이귀진 聊乘化以歸盡

낙부천명복해의 樂夫天命復奚疑

 

‘차 한 잔 하시게(喫茶去)!’ 

여연화상이 법제하여 보내 주신 작비차昨非茶 한 봉지가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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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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