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 길라잡이 ]
기도하고 명상하고 헌신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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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스님 / 2024 년 3 월 [통권 제131호] / / 작성일24-03-04 13:01 / 조회2,838회 / 댓글0건본문
부처님은 이 세상의 이치가 ‘연기緣起’임을 깨달으셨다. 수많은 존재가 있는 곳을 세상이라고 하니, 세상의 이치는 곧 존재의 이치이기도 하다. 존재는 항상 변화한다. 멈추어 있는 존재는 없다. 그래서 ‘무상無常’이라고 하며, 무상이기에 그것에 애착愛着하면 결국은 괴로울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왜 무상한 것에 애착을 갖는 걸까? 존재가 ‘무아無我’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변하고 바뀌고 있는데, 무엇을 가리켜 “이것은 나의 것, 이것은 나,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견해인 셈이다.
수행은 나의 본래 상태를 자각하는 일
우리는 잘못된 견해로써 마음을 쓰며 살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존재는 이치에 근거해서 있게 된 것이고, 그렇기에 본래는 이것저것에 끄달리며 살지 않아도 되는 ‘존재의 순수성純粹性’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어떤 실체성實體性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지금 내가 운영하고 있는 마음의 본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보고 자각自覺해야 한다.
부처님을 위시하여 역대 큰 스승들은 한결같이 이걸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본래 상태를 자각하기 위한 작업을 수행修行이라고 하며, 정진精進이라고 하며, 폭 넓게는 기도祈禱라고 한다. 보고 체득體得해야 하기에 이 작업은 몸과 마음을 기울여 직접 해야만 한다.
기도수행을 통해 현재의 물든 자기 자신을 물듦이 없는 상태로 개선해 가야 한다. 미진한 나를 성숙한 나로, 부족한 나를 충만한 나로, 끄달리는 나를 걸림 없는 자유인으로 바꾸어 가야 한다. 이렇게 될수록 나는 내 삶에서 당당한 주인으로 모든 인연 있는 것을 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작업이 쉽지가 않다. 시점을 알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되고 익혀 온 습기習氣를 현재의 나의 얕은 정신 수준으로는 다루기조차 버겁게 느껴진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도움을 주시는 분들을 만났다. 바로 근본 스승이신 부처님, 화신化身으로 나투신 권화權化 보살님들, 마음의 눈을 뜨신 역대 조사 스님들이 그 분들이시다. 이분들은 저마다 수많은 가르침과 방편을 베풀어 놓으셨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누구나 활용하여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해 놓으셨다. 나와 주변의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한 ‘근원적 가르침’과 그것을 통찰하기 위한 ‘기도와 명상’이 그것이다.
기도에는 서원誓願의 마음이 담긴다
여기서 ‘기도祈禱’라는 용어의 개념에 대해 평소 내가 지니고 있는 기도의 개념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고자 한다. 이는 예전에 어떤 분이 하신 말씀 때문에 정리해 본 것이다. 그분은 기도라는 말이 서양종교의 기도를 떠올리게 하여 수행을 말하는 불교에서 쓰기에는 적절치 않은 게 아니냐고 하셨다.
한자 사전을 보면, ‘기祈[빌다]’, ‘도禱[빌다]’, 두 글자 모두 ‘빌다’라는 의미입니다. 국어사전에서 ‘기도祈禱’를 찾아보면, ‘신이나 절대적 존재에게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빎’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몸소 직접적으로 닦는다는 수행修行을 중시하는 불자佛子의 입장에서는, 기도는 일종의 ‘비는 행위’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본다.
부처님이시여!
이제 제가 당신이 가리켜 준 대로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스승이시여!
제가 당신의 가르침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바르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저를 격려해 주시고, 때론 매섭게 경책警責도 내려주면서 제가 가는 길을 엄하게 증명證明해 주소서. 당신 앞에 나 자신을 숙이며 나의 이러한 서원을 당신에게 공양 올립니다.
기도하면서 내가 갖는 서원誓願의 마음을 표현해 보았다.
공부 수행의 기본이자 생명은 ‘서원’이다. 구복求福의 원願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참 가치’에 대한 눈뜸의 원願이다. 이러한 발원發願을 강력하게 일으키고, 어떠한 난관에서도 그것을 지키며 유지해 가야 한다. 그래서 ‘맹세할 서誓’ 자를 써서 ‘서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공부의 시작이자 공부의 맺음이 되는 이러한 ‘서원’을 일으키고 유지하고 실천하리라 마음먹는 것이 바로 ‘기도祈禱’이다. 단지 해 달라고 비는 게 아니라, 해 보겠다는 의지의 발현이고 실천이다. 나는 이렇게 정리하면서 기도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는 기도는 곧 믿음이고 수행이고 정진精進이다.
법을 보는 자, 곧 나를 보는 자
기도와 명상을 함으로써 내 삶을 저분들에게 다가가는 헌신의 삶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헌신은, 불보살님과 역대 스승들에 대한 헌신獻身이다. 이분들에게 헌신할수록 나 자신도 이분들처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분들이 그랬듯이 나도 이분들을 본받아서 마음의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대자유인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헌신’이고, 이렇게 할수록 내 자신이 새롭게 거듭나기에 이 헌신은 곧 나 자신에 대한 헌신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최선을 다해 나의 정신적 스승들에게 헌신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이분들에 대한 헌신일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는 “법法을 보는 자, 곧 나를 보는 자”라고 하셨다. 부처님을 포함한 정신적 스승들에 대한 헌신은 곧 그분들이 가르친 ‘법’에 대한 헌신이다.법을 체득하는 만큼 그분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된다. 그래서 헌신이란 법을 깨닫기 위해 애쓰는 열정적인 행위이다. 이런 헌신은 마침내 나 자신을 완성시켜 주어 비로소 저분들과 같은 경지가 되게 만들어 준다.
불보살님을 비롯한 정신적 스승들에 대한 헌신은 곧 법에 대한 헌신이기에, 이런 헌신이 되기 위해서는 늘 기도와 명상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기도와 명상을 하지 않고서는 법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와 명상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깊게 하느냐 하는 것은 결국 얼마나 저분들에게 헌신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고, 법을 체득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와 명상을 통한 헌신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헌신하는 대상의 폭이 넓어지게 된다.
처음에는 저분들에 대한 헌신으로 시작하였지만 점차 내 주위 분들에 대한 헌신으로도 이어지게 된다. 헌신의 대상이 거룩한 정신적 스승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주변의 모든 존재에게로 확대된다.
정신적 스승들이 가르쳐 준 법은 그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존재들에게도 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극한 헌신은 지극한 회향廻向으로 나타난다. 기도의 갈무리를 늘 회향으로 매듭짓는 이유이기도 하다. 늘 기도하고 명상하고 헌신하는 삶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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