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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석 그늘 아래 ]
화두, 열반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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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타스님  /  2024 년 3 월 [통권 제131호]  /     /  작성일24-03-04 13:09  /   조회52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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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석 그늘 아래 3 | 원타스님 ①

 

본 내용은 2022년 해인사 백련암 참선 모임에 참여한 불자들을 대상으로 설법하신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인연은 몇천 년, 몇만 년 윤회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만남입니다. 공부하는 좋은 인연으로 만나게 되어 굉장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당나라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 스님께서는 『증도가』 법문에서 ‘기회생기회사幾回生幾回死’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이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했느냐? 몇 번 태어나고, 몇 번이나 죽었냐는 것입니다.

 

중생의 삶은 태어나고 죽는 것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태어나고 죽는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목적이고 화두 공부하는 제일 큰 이유입니다.

 

생사윤회를 끊는 것이 제일 과제

 

부처님께서 태자 시절에 6년 고행 끝에 부처가 되신 이유도 끝없이 태어나고 죽는 이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때문입니다. 중생의 삶은 계속 태어났다가 죽었다, 태어났다가 죽었다 하기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해서 오늘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중생의 삶은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는 것을 끝없이 되풀이합니다. 그 과정은 마치 자동차 바퀴나 수레바퀴처럼 계속 굴러간다고 해서 윤회라고 합니다. 이렇게 끝없이 윤회하는 고리를 어떻게 끊을 것인가가 불교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사진 1. 원타스님(해인총림 유나).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내가 배우고 보고 듣고 익힌 부분을 불교에서는 육식六識이라고 하는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말합니다. 대상을 눈으로 보면 어떤 사물이 보이고, 혀로 맛을 보면 어떤 맛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코로 냄새 맡고, 귀로 듣고 하는 것들이 합쳐져서 어떤 느낌이나 인식이 뇌에 저장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면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거나 하는 생각들이 저장되어있잖아요. 그렇게 저장된 것을 식識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무의식無意識 또는 함장식含藏識이라는 것이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부분을 모릅니다. 보통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보고 듣는 이 부분만 기억합니다. 그것도 오래되고 작은 일들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렇게 오래된 세월 동안에 쓴 것을 어떻게 기억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그런 것은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기억하는 것, 내가 알고 있는 부분만 사실이고, 그것만이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보고 듣지 못하고, 내가 이해 못 하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들이 그냥 단순히 사람으로만 반복해서 오늘날까지 왔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동물이라든지 식물이라든지 미생물이라든지 이런 것을 통해서 계속 반복적으로 윤회하며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이번 생에 잘못 살고 생각이 바르지 못하면 또 다음 생에는 짐승과 같이 좋지 못한 축생이나 미생물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선업善業을 짓고 좋은 업을 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사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고 다음 생도 준비해야 하고 또 다음 생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기본 바탕을 만들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사진 2. 백련암 좌선실 앞에서, 왼쪽부터 원타스님, 원해스님, 원행스님과 함께.

 

태어나고 죽는 것을 ‘생사生死’라 하기도 하고, ‘생멸生滅’이라 하기도 합니다. 무엇이든지 만들어졌다가 없어지고,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 생멸의 이치입니다. 화두라든지 부처님 가르침에 의해서 정진해서 확실히 알아버리면 다음에는 그런 부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언제 죽고 싶으면 언제 죽고, 언제 태어나고 싶으면 언제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스님은 평생을 두고 치료도 많이 받고 남의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버섯으로 태어나겠다는 분도 있습니다. 송이버섯이나 표고버섯처럼 큰 버섯으로 태어나 올라오고 또 올라와서 신세 진 것을 보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원을 세워서 그렇게 하다가 또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한동안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생사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자재해진다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에 대한 사무치는 간절함

 

문제는 삶과 죽음에 대한 부분을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하는가입니다. 이 생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 얼마만큼 가슴에 사무치느냐에 따라서 공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간절함이 있어야 공부에 진척도 있고, 생사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참선이 좋더라.”, “살아가는 데 마음이 좀 편하고 도움이 안 되겠나?” 하는 이런 생각으로 적당히 시간 내서 공부해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한 30분 앉아서 정진해야지, 연구를 좀 해 봐야지 그렇게 하면 한 만큼 조금 도움이 되긴 합니다.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도움이 좀 되긴 하겠지만 근원적인 해결은 안 됩니다.

 

사진 3. 사형 원택스님과 함께 은사 성철 큰스님을 모시고 나제통문을 답사한 날의 기념사진.

 

수행하는 분들 중에는 “내가 이렇게 수행을 했는데도 발전이 안 되고, 왜 이렇게 안 되지?” 하고 반문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의 성과를 낼 수 있을 만큼만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자작자수自作自受라고 하고,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하지요. 내가 지은 만큼 내가 받고, 내가 한 만큼 내가 받습니다. 내가 그만큼만 했으니까 그만큼의 성과를 얻는 것입니다. 

 

성철스님은 8년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셨지요. 그분은 의자에 일체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이 두 가지 방법밖에 안 했다고 합니다. 워낙 성격이 강직하고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좀 독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람이라면 목석도 아니고 누구나 졸리는 법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쉬고 싶고, 기대고 싶은 것이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새 차일 때는 아무 탈이 없는데 2~3년 쯤 타고 나면 자꾸 수리해야 되고, 그러다가 10년이나 20년이 지나면 폐차해야 합니다. 사람도 똑같습니다. 부처님도 청년 때는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하여 수행하셨습니다. 진흙 속에 들어가 목만 내놓고 있기도 하고, 가시덩굴 속에 들어가 오만 곳이 찔려 피를 흘리기도 하셨지요.

 

사진 4. 봉암사 주지로서 봉암사 수좌 적명스님과 총무원장 지관스님(오른쪽)을 모시고 이동하는 모습.

 

성철스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이상의 초인적 수행을 하셨습니다. 좀 쉽게 말하면 독하게 수행하고 정진하셨습니다. 그렇게 수행하셨으니 그분은 한 만큼 효과를 거둔 거라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 적당히 이러면 좋다 저러면 좋다거나, 어디 가서 참선하면 몸도 좀 편안해진다는 생각으로 해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나아가 자식이라든지 뭐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정진이나 기도하겠다는 생각으로는 곤란합니다. 그런 자세로 임해서는 수행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수행은 내가 얼마만큼 노력했는가에 따라 좌우되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얼마만큼 투자할 수 있느냐 그것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생사 문제에 대해 얼마만큼 집중하고 문제 의식을 가지느냐 하는 것이 수행에서 참으로 중요합니다.

 

번뇌가 사라진 적멸이 최고의 행복

 

 『열반경』에서 부처님은 제행무상諸行無常하니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생멸멸이生滅滅已하면 적멸위락寂滅慰樂이라 말씀했지요. 이 세상의 일들은 다 변합니다. 사람은 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순리입니다. 나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닙니다. 나무는 500년이나 천년에 걸쳐 오래 살지만 그런 나무도 언젠가 죽습니다. 잡초도 며칠 사는 것이 있고, 몇 달 사는 것이 있지만 사라지는 때가 있습니다. 모든 생물과 미생물들도 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현실에서 무상은 슬픈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습니다. 금방 옆에 있던 이웃이나 형제, 친지나 친구들이 어느 순간 병으로 눈도 한 번 못 마주치고, 말도 한마디 못 나눠보고 그냥 사라져 한 줌 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중생의 현실이 무상입니다. 이처럼 무상이라고 하면 바로 슬픔과 등식이 되기도 합니다.

 

무상의 이치를 사람에 대해 말할 때는 생로병사라는 말을 주로 많이 쓰고, 물건을 두고 말할 때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는 말을 씁니다. 무엇이 생성되었으면 한참 유지되다가 슬슬 부서지고 고장이 납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마치 자동차처럼 폐차되고, 마침내 완전히 분해되어 사라지는데 그것을 공空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 이런 생각이 생겨나 한참 유지가 됩니다. 그러다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가 나중에는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런 것을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생로병사라든지 성주괴공이라든지 생주이멸이라든지 그 표현은 다르지만 그런 말들이 담고 있는 의미는 모두 무상의 이치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가 생겨나고, 유지되고,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이 곧 ‘시생멸법是生滅法’입니다. 나고 사라지는 법칙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생멸멸이生滅滅已 즉, 그와 같은 무상의 변화가 다 사라진 상태가 바로 적멸위락寂滅爲樂입니다. 나고 죽는 무상의 번거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고요해진 상태가 참다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열반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스님들이 돌아가셨을 때 열반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열반의 참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끊어져 최고로 편안한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그 어떤 동요도 없는 이런 마음 상태가 열반입니다. 일례로 물 한 그릇 떠 놓았을 때 바람이 일면 물이 약간 찰랑거리기도 합니다. 일체 그런 것 없어 바닥까지, 수심이 아무리 깊어도 속이 훤히 보이는 그런 맑고 깨끗한 상태가 되었을 때 그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번뇌 망상이 완전히 사라진 최고의 마음 상태가 열반입니다. 거울로 비유하자면 거울 표면의 먼지가 완전히 닦여져서 어떤 대상이든지 거울 앞에 갖다 대기만 하면 그대로 비춰 보이는 그런 상태입니다.

 

화두, 열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

 

끝없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 아득한 생사의 고리를 완전히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경지야말로 수행자가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그런 상태로 도달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바로 화두 참선입니다. 제일 빨리 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입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이런저런 여러 가지 수행 방법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수식관數息觀이라든지 명상이라든지 여러가지 수행법들이 쭉 전승돼 왔습니다. 화두 참선 수행법은, 물론 아함을 비롯한 경전에 부처님께서 직접 화두라는 말을 사용하신 부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부처님께서 질문하고 제자들이 대답하는 모습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 대목들이 화두하는 수행법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어떤 물체를 관상觀相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그런 방법도 있습니다. 이런 수행법이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인도와 같이 모든 것을 걸식, 즉 수행자들이 탁발로 얻어먹고 정진만 하고 살 수 있는 형편이라면 그런 전통들이 유지되고 괜찮은 수행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이나 우리나라 등으로 불법이 전해오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산악 지역이 많고 풍토가 인도와 완전히 다르고, 사람들은 기존 종교나 관습에 젖어 있었습니다. 자연히 불교가 들어와도 기존의 방식대로 살아가기도 어렵고, 기존의 공부 방법으로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언구言句를 의심하는 화두 수행법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사진 5. 성철 큰스님의 삼서근 화두.

 

다른 수행을 하시는 분들과 이야기 하다 보면 “부처님은 처음부터 화두를 말씀하지 않으셨고, 화두 수행은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인도 전통대로라면 백련암 같은 산중에 살아도 가야면 등 사람이 많은 사는 곳으로 내려가 밥을 빌고 이래 살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한국의 사찰은 산중에 위치한 연유로 마을로 가는 길이 험하고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그런 이유로 절에서 밥을 해 먹고, 농사도 짓고 이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천천히 걷고, 내 몸에서 일어나는 상태를 살피는 관법觀法 즉, 위빠사나라든지 사마타라든지 이런 수행법은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화두 참선이라는 방법은 앉으나 서나 활동하나 무엇을 하든지 간에 언구를 의심하기만 하면 되는 수행법입니다. 그 의심이 깊어지면 나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정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봉암사에 있을 때 대구에서 현직 고검장으로 활동하던 어떤 분이 찾아왔습니다. 여름휴가 때 일주일씩 휴가를 내서 인도, 미얀마, 태국 이런 곳에 가서 그곳 수행센터에서 하는 수행을 따라 해 보았다고 합니다. 가서 직접 해 보니 자신이 일상에서 하는 일과 병행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이후에 화두 참선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을 하니까 굉장히 효과적이고 좋더라고 말했습니다. 이후부터 자신은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법을 자신의 공부법으로 채택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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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타스님
1973년 늦가을에 해인사 백련암 성철스님 문하로 출가하여 1975년 고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득도하였다.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종립선원 봉암사 주지를 역임하였고, 현재는 해인총림 유나와 해인사 산내 암자 청량사의 감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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