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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禪, 禪과 시]
얼굴 좀 펴게나 올빼미여, 이건 봄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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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4 년 4 월 [통권 제132호]  /     /  작성일24-04-05 10:19  /   조회1,08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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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언제나 좋은 것입니다. 예전처럼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지만, 마음속 깊이 잔잔한 기쁨이 물결칩니다. 숙소는 64층인데, 내려다보는 야경이 아름답습니다. 이 정도 높이면 대체로 솔개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조감도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독수리, 기러기, 고니, 앨버트로스는 비행기 높이까지 올라갑니다. 9,000 미터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구름도 발아래로 보이고 산맥이나 평야, 바다만 보일 뿐 생명체는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64층의 경치만 하더라도 인간의 눈에는 아찔합니다. 음,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으니 저 아래 인간 세상이 하잘것없어 보입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합니다. 

 

몽고비란

 

대략 천년이나 전쯤, 일흔에 가까운 노부인이 쓴 「몽고비란夢跨飛鸞」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꿈속에 난새를 타고 하늘 높이 올랐다가

이 몸도 세상도 초라한 움막이란 걸 처음 알았네 

한바탕 꿈에서 깨어나 돌아오니

산새 울음소리 봄비 끝에 들리네(주1)

 

이 시는 『서장書狀』(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1999)이란 책에 미주尾注로 실려 있습니다. 『서장』에는 대혜종고(1089∼1163)가 42명의 사대부에게 보낸 62편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성에게 보낸 편지는 딱 한 편뿐입니다. 그 여성이 바로 이 시를 지은 진국태 부인입니다. 대혜종고는 상좌인 도겸이 전해 준 진국태 부인의 게송을 읽고, 며칠 동안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정도로 기뻤다고 편지에서 말합니다. 무엇이 대혜종고를 그렇게 감동하게 한 것일까요?

 

사진 1. 몽고비란夢跨飛鸞: 64층에서 내려다보는 인천 송도.

 

깨달음은 순수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과 미혹을 제거함으로써 얻게 되는 최고의 행복감을 말합니다. 「몽고비란」은 자신과 이 세상이 초라한 움막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수 경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대혜종고는 이 순수 경험을 깨달음이라고 인증한 것입니다.

특히 ‘산새 울음소리 봄비 끝에 들리네’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세계를 직접 체험하는 사람의 생생한 기쁨이 전해집니다.

 

자연의 소리, 인간의 소리

 

이제 우리 나이에는 젊은이들처럼 돌아다니는 여행은 하기 어렵습니다. 빠르게 돌아다니면 호흡이 가빠져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감동은 얻기 어렵습니다. 호흡이 편안해야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센트럴파크는 경제자유구역 송도 국제도시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도심지에 이런 공원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공원 가운데로 바닷물을 끌어들여서 수로를 만들었습니다. 인공 수로에는 수상 택시, 보트가 떠다닙니다. 수로의 물이 너무 맑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사진 2. 송도 센트럴파크를 흐르는 바닷물 수로.

 

공원이 굉장히 넓어서 여의도 공원의 2배 넓이입니다. 넓은 초원에 사슴도 방사하고 있습니다. 사슴은 주로 아침저녁으로 먹이를 찾아다니고 낮에는 경치를 바라보며 휴식합니다. 맑은 눈망울이 마치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합니다.

 

나무도 많고 새도 많습니다. 특히 새들이 사람 겁을 내지 않고 몇 발자국 이내로 스스럼없이 접근합니다. 직박구리를 손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본 것은 처음입니다. 성깔 사나운 새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예쁘군요. 산비둘기도 사람을 경계하는 새인데 태연하게 나뭇가지에 앉아 날아가지 않습니다. 통통하게 살이 쪘군요. 도심지에 서식하는 집비둘기와 달리 아름답고 산새다운 품격이 있습니다.

 

새들은 저마다 걷는 모습이 다릅니다. 비둘기는 두 다리를 번갈아 내디디며 여유 있게 걸어 다닙니다. 참새는 두 다리를 모으고 깡충깡충 뛰어다닙니다. 까마귀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뱁새(붉은머리오목눈이) 수십 마리가 덤불 속으로 몰려다닙니다. 사람이 나타나면 재빨리 달아나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보기는 어려운 새입니다. 모처럼 가까이에서 보니 뱁새도 참 아름다운 새로군요. 

 

사진 3. 하찮은 뱁새의 아름다운 자태.

 

새들은 계속 노래 부릅니다. 나무들은 계속 꽃을 피웁니다. 바람은 계속 불고 강물은 계속 흐릅니다. 전 세계가 현란하고 다채롭게 찬미합니다. 다만 인간들만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새들의 노래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뺨으로 바람을 느낄 여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참새 소리

 

약 1,200년 전의 일입니다. 황폐한 마을과 부서진 절에서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면서도 참새 소리에 귀를 기울인 승려가 있습니다. 흔히 ‘조주’라고 불리는 조주종심(778~897)은 80세가 되어서 겨우 조그만 절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40년 후 죽을 때 나이가 무려 120세였습니다. 그가 60대이던 시절에 당나라 무종이 단행한 회창의 폐불(845~847)은 중국 전역에서 불교를 철저하게 파괴하였습니다. 

 

파괴된 유명 사원은 4,600여 개소, 무명 사원은 4만여 개, 환속한 승려와 비구니는 26만 5백 명, 몰수된 전답은 수천만 경頃, 사원 소속의 노비 15만 명이 평민으로 돌아갔습니다.(주2)

 

이 처참한 시대에 부서진 암자를 떠돌며 궁핍한 삶을 살던 조주는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황량한 마을, 부서진 암자, 형언하기 어렵네

아침 죽 속에 쌀알이라곤 전혀 없으니

하염없이 창틈 사이 먼지만 바라보네

오직 참새 지저귀는 소리뿐, 인적은 없어

홀로 앉아 낙엽 지는 소리를 듣네

수행자는 애증을 끊는다고 누가 말했나

생각하노라면 나도 몰래 눈물 흐르네(주3)

 

마을은 황폐해졌고 암자는 부서졌으며 죽을 끓일 쌀도 제대로 없었습니다. 생활은 물론 종교도 문학도 현장이 빚어내는 산물입니다. 도탄에 빠진 백성의 삶과 폐불로 인한 사찰의 황폐화에 직면했을 때 승려들에게 요구된 것은 진정성이었습니다.

 

그의 시는 인간 영혼에서 저절로 솟아 나오는 눈물을 불교적 질감과 감촉으로 노래합니다. 부서진 암자에서 굶주린 삶을 살아내면서도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낙엽 지는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눈물 속에서도 인생무상을 담담하게 노래합니다. 조주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초개인적인 시대 정신을 노래한 것입니다.

 

얼굴 좀 펴게나 올빼미여, 이건 봄비가 아닌가

 

1814년, 평생 타향을 떠돌던 한 사나이가 오랜 싸움 끝에 아버지의 유산 일부를 상속하고 고향인 나가노현으로 돌아옵니다. 그의 이름은 고바야시 잇사, 나이는 52세입니다. 치아가 하나도 없이 다 빠져버린 늙은 잇사는 귀향하고 석 달 후 28세의 신부와 결혼합니다. 객지를 떠돌던 고달픈 생활을 청산하고 젊은 아내와 함께 새롭게 출발하며 자신의 불우한 인생을 찰싹 때리는 듯한 감촉의 시를 씁니다.

 

얼굴 좀 펴게나

올빼미여,

이건 봄비가 아닌가(주4)

 

이 시의 앞 마에쿠前句에는 ‘비둘기가 말하기를’이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비둘기가 올빼미에게 하는 말입니다. 말놀이 같기도 하고 가벼운 농담 같기도 하지만 읽으면 저절로 잔잔한 미소가 떠오릅니다. 

 

사진 4. 얼굴 좀 펴게나 올빼미여, 이건 봄비가 아닌가.

 

평생 가난에 찌든 얼굴을 펴 보고자 하는 잇사의 각오를 비둘기는 무심한 듯 가벼운 말투로 툭, 던지고 날아갑니다. 이 가벼움이 잇사의 시에 깊이를 더해 줍니다. 잇사가 노래하는 비둘기와 올빼미의 세계는 인간들 세상보다 더 따뜻하고 친절합니다. 거기에는 인간으로부터 해방된 신선함이 있습니다. 잇사의 깨달음은 무슨 대단한 깨달음이 아니라 평범한 것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한없이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마치 아무것도 아닌 듯 가벼운 말투로 툭 하고 던지는 잇사의 시에는 모든 것을 가벼운 웃음으로 날려 버리면서 자기를 해방하는 경쾌함이 있습니다.

더 많은 새가 더 많은 장소에서 쉴 새 없이 지저귑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울어도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나 역시 오랜 세월 나와는 아무 상관 없이 수많은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그 새들을 알지 못했고, 새들 또한 나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늙어도 봄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봄이 와도 새싹 하나 밀어내지 못하고 꽃잎 한 장 피우지 못하겠지만, 늙은 이 몸에도 꽃 피울 마음만은 아직 남았습니다.

 

<각주>

(주1) 대혜스님, 『禪 스승의 편지』(法供養, 2002), 미주 71, “夢跨飛鸞上碧虛 始知身世一遽廬 歸來錯認邯鄲道 山鳥一聲春雨餘.”

(주2) 『舊唐書』, 「武宗本紀」.

(주3) 『趙州錄』, 十二時歌 平日寅, “荒村破院實難論 解齋粥米全無粒 空對閑窓與隙塵. 唯雀噪勿人親 獨坐時聞落葉頻 誰道出家僧愛斷 思量不覺淚沾巾.”

(주4) 小林一茶, 『七番日記』 : 梟よ面癖直せ春の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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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1976년 시). 전 대구시인협회 회장. 대구대학교 사범대 겸임교수, 전 영신중학교 교장.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저서로 『보물찾기』(시와시학사, 2000), 『납작바위』(시와반시사, 2012), 『글쓰기 노트』(집현전, 2018) 등이 있다.
jtsu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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