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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단지 참선을 잘하기 위한 방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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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스님  /  2024 년 4 월 [통권 제132호]  /     /  작성일24-04-05 14:21  /   조회1,06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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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참선이란 수행법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수행법 중에 “오직 참선만이 가장 수승한 수행법이요, 나머지 다른 수행법들은 참선을 잘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행법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화두를 들고 밤낮으로 씨름해야 하는 간화선법 수행자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생각일 수 있다. 자신이 하는 수행 방법에 대한 강한 믿음이나 의지 없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수행법에 내던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수행 방법에 강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자부심으로 인해 다른 수행법을 업신여기거나 가볍게 생각한다면 그 역시 최상승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의 마음가짐이라 할 수 없다. 자신의 자부심은 외롭게 자기 길을 갈 때 어떠한 난관에도 굴함이 없이 꿋꿋하게 나아가는 데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것과 비교해서 우열을 논하는 데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

 

능엄주와 절은 화두 참선의 보조수단인가? 

 

주변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자주 듣곤 한다.

1) 기도는 단지 업장을 소멸하기 위해, 또는 참선을 잘하기 위한 보조적인 방편일 뿐이다.

2) 능엄주를 할 때에도 화두를 들려고 애를 쓴다.

 

먼저 첫 번째 경우를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최후의 관문을 통과하려면 결국 참선, 즉 화두를 깨치지 않고서는 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근기가 낮고 업장이 두텁다 보니 여러 가지 장애가 있게 되므로 능엄주와 같은 진언眞言과 절로써 업장을 소멸시키고 장애를 거두어 낼 필요가 있다고 한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스스로 참선, 즉 화두를 드는 것만 가지고는 업장 소멸이 제대로 될 수 없다고 여기는 격이 된다.

 

사진 1. 이 뭣고, 김호석 작품, 1994년.

 

선방에 다닐 때 구참久參 스님들로부터 “좌복에 앉아 맹렬히 화두와 씨름하는 것만큼 더 좋은 업장 소멸의 방법은 없다.”는 말을 지주 들었다. 이런 내용은 비단 구참 스님들에게서뿐만 아니라 옛 스님들의 어록에서도 본 기억이 있다.

 

참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완성된 수행법이다. 화두 의심이 맹렬히 커 가면 커 갈수록 내 의식의 산만함은 가라앉고 집중도는 더욱더 커 갈 수밖에 없다. 평소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분열되어 있던 나의 의식이 화두라는 하나의 의심 축으로 똘똘 뭉쳐지게 된다.

 

내 마음 상태가 화두라는 의심덩어리로 똘똘 뭉쳐 있게 되면 무엇을 하든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화두라는 의심덩어리 속에서 하는 셈이다. 밥을 먹든, 길을 가든, 경을 읽든, 주력을 하든,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의심덩어리 속에서 용해되어 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그렇게 지어 나가서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기까지는 그저 화두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려고 부단히 애쓰고 애써야 할 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화두 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 되는 사람들이 드문 것 또한 현실이다. 그래서 스스로들 근기가 낮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안 되는 화두 공부보다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도입하는 것이 기도법의 하나인 ‘주력呪力과 절’이다.

 

이런 입장에서 하는 경우라면 능엄주와 절은 하나의 보조적인 방법이 된다. 참선하는 분들이 스스로 참선을 잘하기 위하여 빌려 온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빌려 온 주력이라는 기도법을 온전한 하나의 수행법이 아닌 부분적인 수행법 정도로 여기는 것은, “기도는 왜 해야 하는가?”라는 기도의 목적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도는 자기라는 존재의 본래 상태를 보는 현실적 행위

 

기도는 왜 하는 것인가? 기도는 하나의 완성된 수행법이다. 우리는 기도라는 행위를 통해서 산만한 정신의식을 고요히 하고, 맑게 하여 결국 나라고 인지하는 ‘자신의 본래 상태’를 여실히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생각의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기에 기도를 함에도 가장 중요한 것이 ‘집중과 몰입에 의한 관찰’이라고 누누이 강조해 왔다. 참선에서 화두라는 의심덩어리에 강한 집중이 필요하듯이, 기도에서도 자신이 하는 기도 방법으로 강한 집중과 몰입에 의한 성찰은 필수이다.

 

이런 성찰이 있는 기도일 때, 단지 복福을 갈구하는 게 아닌 실제적인 자기 닦음의 수행이 된다. 심정心情만 갖고 하는 행위가 아니라 분명한 발원發願으로써 몸을 움직여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경우를 실참실수實參實修라고 하는데, 기도 역시 이런 마음과 자세로써 할 때 나 자신에게 실질적인 긍정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능엄주 같은 주력과 절 수행은 이런 긍정적 변화를 있게 해주는 그 자체로 온전한 수행법이다. 다만 경우에 따라 참선하는 사람이 마장魔障을 덜어내기 위한 조도법助道法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사실 업장을 소멸시키기 위한 수행이 따로 있을 수는 없다. 왜 그럴까? 모든 수행은 결국 자신의 변화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에고에 물들어 있는 나의 상태에서 말끔히 정화된 상태로의 변화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참선이든 기도든 마찬가지다.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기도나 참선 같은 수행을 통해서 내가 바뀌면 바뀌는 만큼 나로 인해 생겨난 갖가지 업장들도 변화되고 바뀔 것이다. 업장 소멸이라는 것도 그 업장을 있게 만든 장본인인 나 자신의 변화 없이는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참선만이 아니라 기도를 주된 수행법으로 삼고 있는 불자들도 내면의 정화를 통해 자기완성을 도모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면, 하고 있는 기도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기도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기도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엄정한 자기 점검이 있어야 한다. 단지 참선을 잘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그 자체만으로도 나의 정화와 완성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면, 자신이 하고 있는 능엄주와 절하는 기도법에 당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참선을 위주로 하는 분들도 절과 능엄주는 마장을 줄여서 화두 공부를 원활하게 하고자 하는 조도법으로 하는 것임을 알고, 공연히 기도 수행만으로는 ‘될 수 없다’는 식의 한 수 아래로 낮추어 보는 허물은 짓지 말아야 한다.

 

어떤 기도를 하든 온전한 몰입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두 번째인 “능엄주를 하면서도 화두를 들어야 하는가?”의 경우를 살펴보자.

간화선의 경우 행行·주住·좌坐·와臥·어語·묵黙·동動·정靜 중에 항상 화두를 놓치지 않고 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을 쉽게 표현하자면 일상생활 속에서 무엇을 하든 간에 항상 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길을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을 때도 항상 화두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능엄주와 아비라기도를 하면서 화두를 들려고 애쓴다고 하는 분들이 있다. 제각기 집중을 요구하는 참선과 기도라는 두 가지 수행법을 어떻게 동시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나의 의식을 ‘능엄주 하는 나’와 ‘화두 참구하는 나’로 일부러 분열시키면서 화두 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진 2. 성철 큰스님 마삼근 친필과 원암스님이 쓰신 대불정능엄신주.

 

일상생활에서의 단순한 행위들, 예컨대 밥을 먹거나 길을 걷는 행위는 굳이 내 의식이 집중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행위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들은 화두를 챙기면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기도의 경우는 다르다. 위의 첫 번째 경우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기도라는 행위도 고도의 집중과 몰입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평소에 이런저런 망상으로 산만해져 있는 나의 의식(마음)을 능엄주를 통해서 온전히 하나로 몰아갈 수 있어야 한다.

 

기도의 행위에도 나의 온정신이 모아져야 한다. “의식의 적당 부분만 기도 행위에 할애하고 나머지는 화두를 챙기면 되지.”라는 방식은 그 자체로 기도라는 것을 성의껏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왜 굳이 능엄주를 하면서 화두를 들려고 하는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화두를 들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데, 능엄주에 집중하려는 상황에서 일부러 또 다른 집중 상황을 만들어 가면서 화두를 들려고 애를 쓰는 게 온당한 것일까? 

 

능엄주 할 때는 그저 능엄주에, 그리고 능엄주를 하는 나 자신에 몰두하여야 한다. 참선을 하면서 조도법으로 능엄주를 활용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능엄주를 하는 순간만큼은 내가 하는 능엄주에 몰두하여야 한다.

 

능엄주를 하면서 화두를 들려고 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의식(마음)만 분열되고 분주해지게 만드는 꼴이 된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화두만 하며 집중하려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많은 큰스님들이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하신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든 항상 ‘내가 하고 있는 것’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 없이 늘 자각하고 있으라는 말씀일 것이다. 이 점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성철스님의 법문을 듣다 보면 “법문을 들으면서도 화두가 들려야 한다.”는 말씀이 있다. 이는 화두에 의도적으로 의심을 하지 않아도 의심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상태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런 진의심眞疑心이 일어나는 상태가 되면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의심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그 의심 속에서 모든 행위가 일어난다. 화두에 의심을 일으켜서 어서 이런 진의심의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직 진의심의 상태가 아닌 단계에서는 자칫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즉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의식의 분산만 초래하는 상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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