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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조선 초기 국가 관리의 종파와 사원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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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4 년 5 월 [통권 제133호]  /     /  작성일24-05-04 23:05  /   조회22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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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신하들은 수도를 옮기고 제도를 정비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설계하였다.  

과거제를 정비하여 귀족들의 특권을 없앴고, 과전법을 실시하여 국가의 토지 관리를 강화하였다. 그런데 불교에 대해서는 곧바로 개혁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불교를 독실히 믿어서 신하들의 불교 개혁 요청을 번번이 묵살하였기 때문이다.

 

태종의 억불정책과 성민의 상소

 

조선 건국 후 불교 개혁은 태종 대부터 시작된다. 태종은 김제 금산사 주지와 진주 와룡사 주지가 사찰 여자 종과 간통한 사건을 빌미로 사원 노비를 대거 속공屬公하였다.(『태종실록』 5년, 1405년 11월 21일) 그러자 이듬해(1406) 2월 26일에 성민省敏을 비롯한 수백 명의 승려들이 신문고申聞鼓를 울려 불교탄압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조계종 승려 성민이 신문고를 쳤다. 승려들이 (정부에서) 절의 수를 줄이고 노비와 전지를 삭감하는 까닭으로, 날마다 정부에 호소하여 예전대로 회복하도록 요구하니, 정승 하륜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성민이 그 무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신문고를 쳐서 아뢰었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 『태종실록』 6년, 1406년 2월 26일

 

태종은 사원 노비를 속공했을 뿐만 아니라, 사원의 수를 줄이고 전지를 삭감하였다. 이에 성민 등이 신문고를 쳐서 항의하였으나, 태종의 불교 개혁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1406년(태종 6) 3월에 의정부에서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임금께 보고하기를, “일찍이 임금께서 고려 「밀기密記」에 기록되어 있는 비보裨補를 위한 사사寺社 및 지방 각 관청의 「답산기踏山記」의 사사 가운데 한양과 개경의 오교양종 각 1사, 지방의 목牧과 부府에 소속되어 있는 선종과 교종 각 1사, 군郡과 현縣에 소속되어 있는 선종과 교종 중 1사를 헤아려서 남기라고 하셨는데, 지금 의정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의논하였습니다. 한양과 개경의 각 사원에서 선종과 교종 각 1사에는 전田 200결·노비 100구·상주승 100명, 그 나머지 사원은 전 100결·노비 50구·상주승 50명을 지급하며, 각 도 계수관의 선종과 교종 중 1사에는 전 100결·노비 50구, 각 관청의 읍내 자복사資福寺에는 전 20결·노비 10구·상주승 10명, 읍 외 각 사원은 전 60결·노비 30구·상주승 30명을 지급하고자 합니다. … 조계종과 총지종은 합하여 70사를 남기고, 천태소자종과 천태법사종은 합하여 43사를 남기고, 화엄종과 도문종은 합하여 43사를 남기고, 자은종은 36사를 남기고, 중도종과 신인종은 합하여 30사를 남기고, 남산종과 시흥종은 각각 10사를 남기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또 말하였다.

 

사진 1. 양주 회암사지. 사진: 문화재청.

 

“회암사檜巖寺는 불도에 뜻이 있는 승려들이 모이는 곳으로 예외로 해야 할 것이니, 전지田地 1백 결과 노비 50구를 더 급여하라. 표훈사表訓寺와 유점사楡岾寺 또한 회암사의 예에 따라 원래부터 있던 전지와 노비는 예전 그대로 두고 줄이지 말라. 이미 정한 숫자 외의 사사도 잘 헤아려서 시지柴地 1~2결을 주어라.” 

- 『태종실록』 6년, 1406년 3월 27일

 

혁거, 사원에 대한 재정 지원 중단

 

태종은 고려로부터 전해오는 「밀기」와 「답산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원 가운데, 한양과 개경의 선종 1사·교종 1사, 지방 계수관 단위(오늘날의 광역시 및 도 단위)의 선종 1사·교종 1사, 군현 단위의 선종과 교종 중 1사를 남기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라고 의정부에 명하였다. 그러자 의정부에서는 한양과 개경의 사원은 차등 지원하고, 지방 계수관 단위와 군현 단위의 경우는 선종과 교종 중 1사만을 남기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조계종과 총지종 70사, 천태소자종과 천태법사종 43사, 화엄종과 도문종 43사, 자은종 36사, 중도종과 신인종 30사, 남산종과 시흥종 10사를 합하여 총242사를 남길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자 태종은 의정부의 안을 윤허하면서도 회암사, 표훈사, 유점사에 대해서 예외를 두고, 아울러 그 외의 사사에 대해서도 잘 헤아려서 시지를 지급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 인용문의 설명만으로는 남긴 사원과 남기지 않는 사원의 차이를 알 수 없다. 사원의 무엇을 남기고 또 어떤 사원을 남기지 않고 줄인다는 말인가. 그리고 남기지 않는 사원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이와 관련하여 그로부터 8개월 후인 1407년(태종 7) 12월의 기록이 주목된다. 

 

의정부에서 임금께 보고하기를, 지난해 사원을 혁거革去할 때에 삼한 이래의 대가람을 도리어 태거汰去한 예가 있고 망폐亡廢한 사원에 주지를 임명한 경우도 간혹 있었으니, 승도들이 어찌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산수가 수승한 큰 가람으로 하여금 망폐한 사원을 대신하도록 한다면 승도들이 거처할 곳을 얻게 될 것입니다. 

- 『태종실록』 7년, 1407년 12월 2일

 

위 인용문에서 ‘지난해 사원을 혁거할 때’라는 말은 1406년(태종 6) 3월 27일에 있었던 242사(+α)만을 남긴다고 한 내용을 말한다. 그러므로 당시 큰 사원인데도 242사에 포함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이미 망폐한 사원인데 포함되어 주지를 임명한 경우도 있었으므로, 일부 사원을 조정해야 한다고 보고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 인용문에서 ‘사원을 혁거’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근대 이후 학자들은 대체로 이 말의 의미를 ‘폐사廢寺’로 이해했다. 즉 242사(+α)를 제외한 나머지 사원을 없애 버린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후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천 개의 사원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혁거를 폐사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임이 틀림없다. 『태종실록』에서 ‘혁거’라고 한 것은 폐사의 의미가 아니라 정부의 재정 지원을 중단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국가의 정책은 사원에 대한 정부의 재정 지원을 줄이고 그만큼 백성에게 돌려주려는 국가의 의지가 담긴 정책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242사(+α)만 재정 지원을 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아니면 불교계의 하소연 덕분이었을까? 조정에서는 242사(+α) 이외의 사원을 추가로 지정한다.

 

조계종에 양주의 통도사, 송생의 쌍암사, 창녕의 연화사, 지평의 보리갑사, 의성의 빙산사, 영주의 정각사, 언양의 석남사, 의흥의 인각사, 장흥의 가지사, 낙안의 징광사, 곡성의 동리사, 감음의 영각사, 군위의 법주사, 기천의 정림사, 영암의 도갑사, 영춘의 덕천사, 남양의 홍법사, 인동의 가림사, 산음의 지곡사, 옥천의 지륵사, 탐진의 만덕사, 청양의 장곡사, 직산의 천흥사, 안성의 석남사이다.

 

천태종에 충주의 엄정사, 초계의 백암사, 태산의 흥룡사, 정산의 계봉사, 영평의 백운사, 광주의 청계사, 영해의 우장사, 대구의 용천사, 도강의 무위사, 운봉의 원수사, 대흥의 송림사, 문화의 구업사, 금산의 진흥사, 무안의 대굴사, 장사의 선운사, 제주의 장락사, 용구의 서봉사이다.

 

화엄종에 장흥의 금장사, 밀양의 엄광사, 원주의 법천사, 청주의 원흥사, 의창의 웅신사, 강화의 전향사, 양주의 성불사, 안변의 비사사, 순천의 향림사, 청도의 칠엽사, 신령의 공덕사이다.

 

사진 2. 익산 미륵사지. 사진: 문화재청.

 

자은종에 승령의 관음사, 양주의 신혈사, 개령의 사자사, 양근의 백암사, 남포의 성주사, 임주의 보광사, 의령의 웅인사, 하동의 양경사, 능성의 공림사, 봉주의 성불사, 여흥의 신이사, 김해의 감로사, 선주의 원흥사, 함양의 엄천사, 수원의 창성사, 진주의 법륜사, 광주의 진국사이다.

 

중신종에 임실의 진구사, 함흥의 군니사, 아주의 동림사, 청주의 보경사, 봉화의 태자사, 고성의 법천사, 배주의 견불사, 익주의 미륵사이다.

총남종에 강음의 천신사, 임진의 창화사, 삼척의 삼화사, 화순의 만연사, 나주의 보광사, 창평의 서봉사, 인제의 현고사, 계림의 천왕사이다.

시흥종에 연주의 오봉사, 연풍의 하거사, 고흥의 적조사이다. 

- 『태종실록』 7년, 1407년 12월 2일)

 

11개 종파가 선교 양종으로 축소

 

조계종 24사, 천태종 17사, 화엄종 11사, 자은종 17사, 중신종 8사, 시흥종 3사, 총남종 8사 등 88사의 명찰을 지정하였다. 그런데 1406년 3월에는 11개의 종파이던 것이 1407년 12월에는 7개의 종파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그 사이에 국가에서 공인한 불교 종파가 11개에서 7개로 축소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국가 공인의 불교 종파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는데, 세종 대에는 선종과 교종만이 남았다.

 

사진 3. 흥천사명 동종. 사진: 문화재청.

 

예조에서 임금께 아뢰었다. “불교의 도는 선禪과 교敎 양종兩宗뿐이었는데, 그 뒤에 정통과 방계가 전하면서 각기 업業으로 삼는 바로써 7종이 나누어졌습니다. … 청컨대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의 3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하고,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의 4종을 합쳐서 교종으로 하며, 서울과 지방에 승려들이 거처할 만한 곳을 가려서 36개 소의 사원만을 두어, 양종에 분속시키소서. … 이어 승록사僧錄司를 혁파하고, 서울에 있는 흥천사를 선종 도회소都會所로, 흥덕사를 교종 도회소都會所로 하며, 나이와 행동이 아울러 높은 자를 가려 뽑아 양종의 행수 장무行首掌務를 삼아서 승려들의 일을 살피게 하소서.” 

- 『세종실록』 6년, 1424년 4월 5일

 

세종은 예조의 건의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이로써 태종 대에 11개의 종파에서 7개 종파로 축소되고, 다시 세종 대에 선종과 교종의 2개 종파만이 국가 공인의 종파로 인정되었다. 게다가 고려시대 이래 사원과 승려의 사무를 보던 승록사를 폐지함으로써 중앙 정부의 불교 관청이 사라졌다. 대신에 도성 내에 흥천사와 흥덕사에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를 두어 예조에 종파의 업무를 보고하도록 하였을 뿐이다. 이때 선종과 교종에 각각 분속된 18사는 아래와 같다.

 

선종 18사 : 서울 흥천사, 개성 숭교사, 개성 연복사, 개성 관음굴, 서울 승가사, 양주 개경사, 양주 회암사, 서울 진관사, 고양 대자암, 공주 계룡사, 진주 단속사, 경주 기림사, 구례 화엄사, 태인 흥룡사, 고성 유점사, 원주 각림사, 은율 정곡사, 안변 석왕사교종 18사 : 서울 흥덕사, 개성 광문사, 개성 신암사, 개성 감로사, 해풍 연경사, 송림 영통사, 양주 장의사, 양주 소요사, 보은 속리사, 충주 보련사, 거창 견암사, 합천 해인사, 창평 서봉사, 전주 경복사, 회양 표훈사, 문화 월정사, 해주 신광사, 평양 영명사

 

얼마 후 여러 이유를 들어 선종의 화엄사는 순천 송광사로, 정곡사는 개성 흥교사로, 흥룡사는 금강산 장안사로 교체되었고, 교종의 서봉사는 금강산 정양사로, 경복사는 오대산 상원사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선종 18사에는 4,250결의 토지를 하사하고 1,970명의 승려가 머무는 것을 허락하고, 교종 18사에는 3,700결의 토지와 1,800명의 승려를 허락하였다. 

 

선종과 교종의 선교양종 체제는 연산군 말기에 갑자기 폐지되었다가 명종 대에 문정대비의 불교 중흥으로 다시 복구되었지만 문정대비 사후 또다시 폐지됨으로써 불교 전래 이후 국가 공인의 불교 종파는 근대기에 이르기까지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불교계는 임진왜란에서 활동했던 의승병의 조직적 기반 위에 자체적으로 임제종을 정통으로 표방하며 백성의 종교적 심성에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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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불교학과에서 석사학위, 사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 교수와 조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국립순천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역서로 『운봉선사심성론』, 『월봉집』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복각」,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등 다수가 있다.
su55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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