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50년 동안 바뀐 해인사의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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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4 년 7 월 [통권 제135호] / / 작성일24-07-05 10:06 / 조회2,157회 / 댓글0건본문
1971년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같이 해인사 백련암을 가려고 대구 서부정류장에서 합천 해인사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출발을 하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2년 전의 일이니, 길은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황톳길 2차선에 가까운 길이어서 차가 달리면 좌우로 먼지가 자욱이 깔리는 그런 시골 풍경이었습니다.
고령 읍내로 들어가기 위해 험한 고갯길을 넘어야 했는데, 대구 시내에서만 산 소납에겐 꽤나 험한 고갯길을 힘겹게 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사히 고갯길을 넘어 고령 읍내로 들어서서 차창 밖을 내다보는데, 역사 시간에 배운 그 유명한 고령 가야시대의 무덤들이 보여 한동안 그쪽으로 시선을 주기도 하였던 기억입니다.
길 없는 길 찾아 백련암을 오르다
그렇게 하여 해인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점심을 먹고 백련암 가는 길을 묻고 물어 가는데 동네에서 1km쯤 올라왔나 싶은데 비구니 스님들이 계신 국일암國一庵이라는 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에게 백련암 가는 길을 물으니 국일암으로 들어오라 하시더니 “지금 개울이 흘러 내려오는 길을 따라 걷다가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거든 그 길로 곧장 오르면 백련암이 나온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정말 길 없는 길을 찾아가게 생겼으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계곡물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차츰차츰 물가를 벗어나 산기슭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 뒤의 산기슭 길도 잘 다듬어진 길이 아니라 조릿대 대나무들을 밟고 지나가거나 큰 바위 등을 밟기도 하면서 적막한 산길을 걸어 올라가려니 금방이라도 호랑이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심을 누르며 비지땀을 흘리며 친구와 같이 올랐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백련암에 도착하니 친구가 찾아온 서울 법대 출신 스님이 “사람도 잘 다니지 않는 이 길을 어찌 찾아오려고 생각이나 했나?” 하면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30분 쉬고 나서 “큰스님께 먼저 인사드리고 나와서 우리 이야기 하자.” 하면서 성철 큰스님을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뵙는 성철 큰스님의 눈빛은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안광眼光을 뿜어내시며 마주 쳐다볼 수 없는 열기가 느껴져 얼굴을 푹 숙이고 말았던 기억입니다. 그다음의 자세한 이야기는 소납의 졸저인 『성철스님 시봉이야기』(장경각 발행, 2016)를 참조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백련암 오르는 길이 이제는 대구서 해인사까지 중간에 고속도로가 놓이고 4차선 지방도로와 2차선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어서 대구 서부정류장에서 해인사까지 한 시간 정도에 도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해인사 올라가다 국일암 입구로 찻길을 오르면 이제는 그 뒤로 백련암까지 중형차들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찻길이 잘 닦여져 있습니다.
백련암 마당에 텐트치고 아비라기도하던 시절
소납이 처음 백련암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을 때는 좌선실 50평, 원통전 20평, 영자당 6평, 천태전 6평, 서쪽 기도실 15평 5칸짜리 방이 모든 건물의 숫자였습니다. 행자 생활을 시작한 72년 그해 음력 2월 19일은 성철 방장 큰스님의 환갑이 되시는 해였습니다. 소납이 막 30세로 출가를 하였으니 큰스님께서는 소납에겐 30년의 대선배가 되시는 셈입니다.
맏상좌인 천제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1966년 가을에 문경 김용사에 계시던 성철스님께서 백련암으로 옮겨 주석하시게 되었습니다. 지난봄부터 내가 먼저 백련암으로 와서 주변 정리를 하였는데, 좌선실 주변만 덩그러니 집이 서 있고 그 뜰 아래는 바로 경사가 져서 저 밑 밭떼기까지 훤히 뚫려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기 불면석 끝부분을 기준으로 삼고 천태전 앞까지 자연석으로 마름모로 돌담을 쌓아 올리는 공사를 마치고 마당을 넓게 정리하여 큰스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라고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천제스님은 통영 안정사와 은봉암 사이에 초가삼간 토굴을 짓고 천제굴闡提窟이라 이름 짓고 6.25를 보낸 성철스님께 1953년에 출가를 하셨으니, 소납보다는 20년 빠르게 큰스님을 시봉하신 역사를 가진 맏사형님이십니다.
소납이 72년 1월에 출가하고 처음 맞이한 정초 아비라기도에 동참한 신도분들은 대략 20여 명으로 기억됩니다. 그 후 1년에 네 번 치르는 아비라기도 동참자 숫자가 조금씩 늘어갔습니다만 좌선실이 크게 좁게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81년 1월 10일에 큰스님께서 대한불교조계종 제6대 종정에 추대되십니다. 당시 “산은 산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라고 하는 선종 조사의 취임 법문으로 큰스님은 일세를 풍미하게 되십니다. 그 후로 아비라기도에 동참하는 신도 수가 늘게 되고 갈수록 더욱 그 속도가 빨라지더니 그때까지의 건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앞마당에 군용 텐트를 치고 담요를 두르고 공간을 마련한다고 분주를 떨어도 신도님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들어오는 문도 없는 시절에 1층은 공양간과 세면장, 2층은 기도 공간으로 하여 30평 건물을 짓고 정념당正念堂이라 현판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15평짜리 기와집이 있던 자리를 헐고 70평 규모의 콘크리트 건물을 지으니, 1층 50평은 기도실, 20평은 세면실을 지어 관음전觀音殿이라 이름 짓고, 2층은 25평의 목조법당을 지어 공간을 마련하여 적광전寂光殿이라 현판을 달았습니다. 그렇게 늘어나는 기도객을 위하여 건물을 지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가람의 위용을 갖춘 백련암
그렇게 세월이 흘러 하루는 퇴옹 종정 예하께서 “내 나이가 이제 팔십이 되어 가니 장경각 궤짝의 문들이 이리저리 틀어져 문을 열기가 힘들다. 장경각을 새로 지어 개가식으로 만들어 마음대로 책을 볼 수 있도록 도서관을 세워 보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장소를 정해 주십시오.” 말씀드리니 고심원이 들어선 지금의 자리를 정해 주셨습니다.
“불필스님, 저는 절집 건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니 종정예하께서 편하게 책을 보실 수 있고 또 차후에는 기념관이 될 수 있도록 애써 주십시오.”
이렇게 의논을 드리고 고심원 불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층은 일반대중실로 하고, 2층은 도서관으로 쓰도록 35평 규모로 외外 5포, 내內 7포집 법당형으로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심원 벽체를 다 바르고 막 문을 달려고 하는데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책 보실 주인공이 열반에 드셨으니 1층 안쪽에 임시 서고를 만들어 지금까지 장경각의 서책을 보관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17년 8월부터 2020년 9월까지 3년에 걸쳐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ABC사업단에서 ‘해인사 백련암 성철스님 소장 고문헌 조사’라는 프로젝트로 장경각 소장 서책 중에서 고문헌들을 조사하고 촬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조사한 결과를 『성철스님의 책』으로 발간하고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를 통해 누구든지 열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21년 가을에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30여 평의 새로운 장경각을 짓기 시작하여 2023년 11월에는 단청까지 마무리하게 되었고, 올해 8월에 항온 항습장치까지 완비하면 고심원 1층에 있는 고서들을 새 장경각으로 이운할 예정입니다.
새 장경각이 지어지면서 뜻하지 않게 백련암 전체 가람의 배치가 정리되었습니다. 소납으로선 백련암 생활 52년 만에 만나는 가슴 벅찬 풍경입니다. 적광전에서 시작하여 관음전, 천태전, 영자전, 고심원, 좌선실, 원통전, 정념당, 장경각으로 흐르는 건축선이 백련암의 위엄을 충분히 살려주고 있는 느낌입니다.
장경각을 짓고 1m 높이의 기와 담장으로 그 주변을 마감 지으니 장경각이 더욱 웅장하고 안정되게 보입니다. 장경각 뜰에 서서 서북쪽을 바라보니 그동안에는 볼 수 없었던 해인사 산세山勢가 정겹게 다가왔습니다.
여기까지의 기록이 원택이 출가 후 52년 동안의 백련암 생존기라면 다음은 1989년 11월부터 1993년 12월까지 만 4년 간의 해인사 총무국장 시절의 단편입니다.
해인승가대학 설립과 화장원 불사 이야기
성철 종정예하께서는 청담 큰스님과 함께 춘천에 있는 수녀회도 돌아보시며 승가대학 설립을 설계하시던 시절도 있어, 두 분이 함께 북한산 도선사에 실달학원悉達學園이라는 현판도 붙이시며 승가교육의 꿈을 가꾸어 가시던 때도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1967년 7월에 가야산 해인총림이 설립되고 초대 방장에 추대되신 뒤에도 광덕光德 큰스님에게 해인사 불교대학 설립을 부탁드리고 숙의하시면서 교육의 꿈을 계속 키워나가신 적도 있었지만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인 듯합니다.
세월이 흘러 1990년 봄에 해인사 승가대학 설립에 대해서 법전 주지스님과 의논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법전 주지스님이 하루는 총무국장인 저를 부르시더니 “방장 큰스님께서 승가대학 설립을 말씀하시는데 우선 승가대학교 부지를 어디로 할 것인지가 먼저 떠올라 풍수를 보는 이 두 사람을 따로따로 초청하여 터를 물색하였으니 같이 가 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 두 곳을 둘러보았는데 한 곳은 그렇고 오늘 가 보는 운동장 뒤편에서 위로 죽 뻗어 있는 곳이 길지吉地다. 점 찍어 둔 곳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언덕에 서서 앞으로 바라보니 남산 제일봉이 우뚝 솟아 있고 뒤로 돌아보니 가야산 상봉까지 툭 터져 보이는 풍경이 일품이었습니다. “정말 주지스님께서 터를 잘 잡아주셨으니 종정예하께서도 흔연해하시겠습니다.”라고 말씀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바람보다 빠르게 사중에 소문이 나서 승가대학 설립에 대한 찬반 양론이 일어났습니다. “승가대학교가 영원히 존속하여 유지되면 좋겠지만 만일에 중간에 폐교라도 되면 학교의 모든 재산은 해인사가 아닌 대학을 관리하는 교육부로 귀속된다고 합니다. 지금 서울 개운사에 중앙승가대학교가 설립되었는데 뒤늦게 해인사에서 승가대학을 설립하는 것은 사찰 재산 보호 차원에서 재고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운사 중앙승가대학교 관계자 스님들과 학생들 사이에서도 반대의 기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디귿자 형태의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짓는 설계도까지 마련했으나 취소하고, 팔만대장경 판전版殿 1동의 크기로 목조건물을 지어 좁은 강원 공간을 넓혀서 좋은 공간에서 공부를 하자는 안으로 합의되어 건물이 완성되고, 중앙칸에는 불상을 모시고 좌우로 교실을 2칸씩 두는 것으로 하여 1991년 가을에 준공하고, 방장 큰스님께서 화장원華藏院이라 이름하여 주셨습니다. 이제야 말씀드리는 후일담이지만, 당시 들어간 건축비 5억 원은 성철 종정예하의 신도분이 단독으로 시주를 해주셨습니다.
강원스님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건물의 장점과 단점을 잘 소화해 가면서 생활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강원 학인들이 줄어들면서 넓은 공간이 잘 쓰이질 못하고 빈 교실이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템플스테이 선림원, 모든 이들의 불심을 키우는 곳
그 후 향적스님께서 주지(2015~2019)로 오시면서 화장원 뒤편 언덕에 선림원이라 하여 50여 평에 가까운 대중선방을 새로 짓게 되고, 화장원 시설에 앞뒤로 마루를 깔고 바깥에 유리창문을 달고 건물을 크게 수리하여 1인실에서 4인실까지 침대 시설을 갖추어 템플스테이 시설로 바꾸어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화장원 건립 의사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단단한 불심佛心을 키우는 공간을 세운다는 원력으로 지어졌고, 해인사 선림원 템플스테이가 전국적으로 최고의 시설과 환경을 갖춘 곳으로 잘 운영되고 있다고 하니 마음이 흐뭇합니다.
그런데 소납이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자연 환경의 변화입니다. 지금 선림원 앞마당에 서면 30년 전에는 앞쪽이 훤히 트여 광활하게 보이던 남산 제일봉도, 뒤쪽으로는 가야산 상봉까지 탁 트여 보이던 광활한 운치도 주변의 나무들이 성장하여 가려져 버린 게 정말 유감입니다.
바람이 훈훈해지면서 눈부시게 짙푸른 가야산 녹음 사이로 홍류동 물소리는 찬 기운을 더하는데, 새 장경각 마당에 서서 저 멀리 내다보니 소납이 백련암으로 출가하여 해인총림 스님으로 반평생을 살아오면서 백련암은 물론 해인사, 그리고 산내 암자들의 변모가 한 폭의 그림처럼 흘러갑니다. 부디 더운 여름날, 각각의 암자에 잘 마련된 수행정진하는 곳에서 여름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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