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묘엄스님 ⑧ 전통강원과 현대학문을 두루 섭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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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적(최동순) / 2024 년 8 월 [통권 제136호] / / 작성일24-08-05 10:04 / 조회760회 / 댓글0건본문
▶ 운허스님과 경봉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으셨지요?
내가 1953년 동학사에서 운허스님한테 본격적으로 강원교육을 받고, 나중에 전강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경봉스님한테 『화엄경』을 한 삼분의 일 배웠습니다. 경봉스님이 “전강을 통도사서 받을 것이다.” 이랬어요. 그러다가 “운허스님이 통도사에서 정착을 하셨다.”고 하셔서 짐을 싸 가지고 그리로 갔거든요. 왜 그러냐면 운허스님한테 경을 배우면, 무토박이 토를 달아서 읽도록 문리文理가 나게끔 해주시거든요.
강원 수학하고 전강을 받다
그 뜻은 이렇게 되기 때문에 이것을 “내 소리로 새기는 것”과 “과거 현재 미래의 토를 그렇게 했었다 하는 것은 과거 토”입니다. 또 “그렇게 하라 하는 것은 현재 토고”, “미래에 그게 되리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토, 그래서 객관적인 것을 많이 배우기 때문에 내가 동학사에서 통도사로 가려는 뜻을 알고 경봉 노스님이 동학사에서 미리 전강을 해주셨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문서로 전강을 했다는 쪽지도 안 주고 그냥 대중공양만 시키고 “오늘 전강을
했으니까 강사인 줄 알아라.” 이렇게 말로써 대중 가운데 공표만 했지 전강했다는 전강증도 안 주고 그랬습니다. 그랬기때문에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다행스러웠어요. 내가 그런 증거를 안 받았기 때문에 통도사에 가서 학인이 되기 쉬웠습니다.
동국대학교는 운문사 가기 전에 졸업을 마쳤습니다. 황성기 선생님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나를 동국대학교에 다니도록 주선을 해줬습니다. 그 부인이 여기 수원에 살고 있어요. 홍정식 교수님 그리고 이재창 씨는 나하고 동갑입니다. 조명기 씨, 김동화, 우정상, 홍정식 교수님에게 배웠습니다. 내가 재학하는 동안에 교육 붐이 일어나서 진학을 권유했고, 종단에서 학비를 지원하는 종비생宗費生 제도가 생겼어요.
그런데 내가 좀 건방스러워 가지고 괜히 학교에 들어왔다 싶더라고요. 그렇지만 또 그런 간판이 없어도 안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래야 내 속에 있는 말을 요 간판을 보고 와서 배우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졸업할 때까지 했습니다. 졸업하고 운문사에서 경전을 강의했습니다. 그때는 강사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가르쳤어요. 아침에 시작해서 10시까지 가르치고 또 오후에 또 가르치고, 그래서 전부 내 혼자서 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알게 된 도반이 하나 있어서 그이를 불러서 같이 가르쳤습니다.
운문사를 떠나 초막같이 작은 절 봉녕사로
▶ 수원 봉녕사에 오신 경위를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여기 수원에 온 것은 1971년도입니다. 운문사에서 학인들을 4년간 가르친 얘기부터 하겠습니다. 우리는 비구 대처 정화운동에 참여했다가 비구니가 첫 단계로 운문사로 들어갔거든요. 운문사에서 강단을 개설하고 생각해 보니까 제가 한 서른다섯이나 여섯, 이러니 젊지 않습니까? 내가 이 스님들을 가르치는 것은 부처님 뜻을 이어받아 가르치는 것이지만, 내 개인의 생각도 있지 않겠습니까? 중국의 조사님들이 부처님 당시와 같게 하지 않고 현지에 맞게 불법을 폈듯이. 그렇게 하려면 내가 “참선을 해서 깨친 바가 있어야 되겠다.” 싶어서 우리 사형님보고 “참선을 해야 하는데 맨날 글자만 헤아리다가는 안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동안 살고는 운문사를 나왔습니다.
운문사를 나와서 울산 죽림정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거기를 가니까 된장 단지 이만한 것 하고 쌀 한 자루만 받아서 1년간 살았습니다. 그 절은 경주 부근에 있는데 지금도 있습니다. 그 죽림정사에 있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거기에는 논밭도 없는데 우리 식구들 권속이 한 30명 됐거든요. 그 권속들을 죽림정사에 놔두고 나는 사형 묘전스님하고 서울에 올라왔어요. 그때 당시 청담스님이 총무원장 하실 때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곳에 절을 하나 달라고 그러니까 웃으시더라고요. 스님은 “나한테 절을 얻으러 오면 되느냐. 관할을 하는 총무부장이나 다른 분들한테 이야기를 하고, 또 ‘내가 너를 위해 절을 어디다 해준다’ 하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앞으로도 그런 예가 되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는 의논 상대를 총무부장 스님한테로 미루시더라고요. 그래서 그쪽으로 가서 의논을 하니까 다시 청담스님한테 가라 하더군요.
▶ 총무원의 총무부장이 혜성스님이셨습니까?
네. 혜성스님과 같이 경기도 일대를 돌았습니다. 그렇게 돌고 다시 여기에 오니까 칠성각이 절 같은 맛이 나더라고요. 칠성각 하나가 9평짜리였어요. 여기에 비구스님이 혼자 살고 계시는데 그 스님이 “마침 절을 내놓으려는 참인데 잘 왔다.”고 그러면서 “내일이라도 좋으니까 오라.”고 해요. 그래서 여기 봉녕사奉寧寺를 맡게 됐어요. 여기 오니까 법당도 없고, 대승사나 윤필암에 비해 정말 움막이고 초막 같더라고요. 봉선사奉先寺는 선왕의 능陵을 모셨기 때문에 봉선사라 했는데, 여기는 둘러봐도 능이 없어요. 그런데 어찌 봉녕사라고 했는가 하고 이제 시에도 알아보고 도에도 알아보고 하니까 그런 유래는 없어요. 그냥 성창사라 했다가 창성사라 하다가 봉녕사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시에 있더라고요.
그때 부산에 원만화 보살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왕자메리야스 사장의 어머니이신데 운문사 있을 때부터 사귄 분이지요. 그 원만화 보살이 우리를 찾다가 총무원에 가서 물어보니 여기에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분이 4월에 찾아왔어요. 여기는 문전옥답도 없고, 작은 암자라 보잘 것이 없었어요. 저속하게 표현하자면 거지 움막 같았어요. 그래서 보살이 와서 “문전옥답이 있어서 법당만 하나 지으면 좋겠네요.”라고 그래요.
그 보살이 “내가 화주를 해서 논을 사게끔 하겠다.” 하고는 논 임자를 불러서 “얼마냐?”고 물으니까 147만 원이라고 해요. 그때 보살님이 “내가 화주해서 오겠다.”고 해서 봉녕사 명의를 써서 드렸더니, 그 돈을 해 가지고 왔어요. 논 산다고 하면서 시주를 권선하다가 보니 좀 많이 걷어졌다고 그래요. 그걸 받아서 논을 샀습니다.
논을 사서 이태 농사를 짓는데, 사경 줘 버리면 우리가 먹을 게 없어요. 아홉 마지기인데 “이거를 매립을 하자.”고 그랬어요. 그때 쌀 한 되씩 가져와 불공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네 큰 산이 있는데 거기에 큰 길이 난다고 해요. 국가에 편입을 시키라 해서 그 산을 팔게 되는데, 그 흙을 버릴 때가 없다고 해요. 우리 보고 흙을 사라는 뜻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생각을 하니까 여길 메꾸면 되겠다 싶어서 “그 산 흙을 이 논에 다 갖다 부어 달라.”고 그랬어요. 그러니 “그럼 스님들은 뭐 먹고 살랍니까?”라고 물어요. “그건 나중 일이고 우선 갖다 부어서 이걸 매립을 해야 파리 모기가 없어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원만화 보살이 논 사라고 준 돈으로 논 아홉 마지기를 사고 남은 돈으로 “법당을 하나 지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때 수미사라고 교복 만들어서 학교에 대주는 보살이 봉녕사에 다녔어요. 그 남편이 서울대 건축과 졸업생이라서 건물 짓는 것은 잘 알지 싶어서 “우리가 법당을 짓고 싶은데 얼마나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가서 물어봐야 되겠다.”고 그러더니 나중에 와서 대답하길 “500만원만 주면 27평 짜리 대웅전을 지어주겠다.”고 그래요.
도량을 정비하고 대웅전을 지은 연기
▶ 봉녕사를 새롭게 중창重創 하셨군요?
그때 내가 화주를 했는데 여기저기를 다 찾아다녔어요. 내가 생전 안 가던 일가친척을 찾아다니면서 화주해서 600만원을 걷었습니다. 그래서 법당을 짓고 있는데, 어떤 신사분이 와서 공손히 절을 해요. 그래서 ‘불교를 믿는 분이구나’라고 생각했지요. 그네들이 지나다가 “봉녕사라는 팻말이 붙었길래 들어와 봤다.”고 그래요. “여기에 청담스님 따님이 있다는데 지금도 있습니까?” 그러더라고요. “내가 깁니다.” 그러니까 “아유, 그러냐!”고 반가워하더군요.
그 신사분이 “내가 진주 사람인데 여기 도지사(조병규)입니다.”라고 해요. 청담스님이 진주농고 선배라는 거예요. 그러더니 그분이 “뭐 도와드릴 일이 없습니까?” 하고 물어요. 내가 “누가 산을 무너뜨려서 흙 버릴 데가 없다고 그래서 여기를 좀 메꿨더니 사전 공사를 했다고 빨간 딱지가 나왔습니다. 그게 제일 급합니다.”라고 답했어요.
도지사가 비서를 부르더니, “이거 가져가서 잘 처리하라.”고 그러대요. 그리고 그분께 차를 한 잔 드렸더니 마시고 가셨어요. 그러다 며칠 있다가 돈 200만 원이 나왔어요. 당시로는 많은 돈입니다. 법당 짓는 데 보태쓰라고 그러더군요. 전달하러 오신 분한테 내가 “건축가에게 이미 돈은 다 치뤘습니다.” 하니까 어디에 쓰시든지 도비 100만 원과 시비 100만 원을 수령해 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단청도 하고 27평 짜리 대웅전을 지었습니다.
그 자리에 요사채 하나가 있었는데 다 헐어버리고 마침내 대웅전을 낙성했어요. 그런데 법당 지어주셨던 그분이 암으로 병원에 계셨어요. 내가 병원에 가니까 그분이 “내가 스님한테 500만 원 받고 절 지어준 게 후회막급”이라고 하고는 그 이튿날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차차 부산 왕자메리야스 보살 덕분에 건물을 짓게 되었고, 그 건축가가 건물을 지어주었고, 도지사님이 도와주셨지요. 본래 매립이 돼 있는 것처럼 서류처리를 해버렸어요. 본래 산사태가 나서 메꿔진 것처럼 처리를 했습니다. 그 후로 여기가 차차차 살기가 나아졌습니다.
내가 학인들을 많이 가르쳐도 신도들에 대해서는 설법하거나 이런 거를 뭐 안 해봤거든요. 그러는데 여기 있으니까 신도들이 모이면 관음재일날, 초하루, 보름 설법을 해야 되겠더라고요. 아무것도 안 듣고 밥만 먹고 가면 “아고~ 그 절에 김치 맛이 좋더라.” 하는 것만 남지요. 그래서 내가 초하루, 보름 법문하고 포살布薩도 우리 식구들끼리 모여서 하고 차차 절 모습을 가꾸다 보니까 이렇게 저절로 된 겁니다.
신도들의 도움으로 여유가 있는 분들은 좀 많이 해주고 적게도 해주고
그랬어요. 내가 참 “도와주시오.”라는 말을 잘 못했어요. 다른 절에는 사무
실에 서까래 한 개 얼마, 대들보 한 개 얼마 써 붙여 놓거든요. 그런 것을
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신도들이 “이 스님들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
면서 거들어 주고, 또 상좌가 생기고 모두 학교 졸업하고 와서 권속도 늘
고 그렇게 해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봉녕사 금강율원의 설립 배경
▶ 봉녕사에 율원을 세우시면서 설립 방향이나 운영 방침 등을 소개해 주십시오.
봉녕사에 강원을 설립한 것은 1974년인데, 내 딴에는 큰스님네한테 사상전수를 받았으니까 좀 그 사상이 많은 비구니 스님들에게 주입되도록 발원을 세웠어요. 그래서 스님네들이 ‘승려생활을 철저하게 하도록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있었고요. 또 그 뒤에 절을 다 해놓고는 ‘율원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율에 대해서 이것은 먹고 저것은 안 먹고 하는 것은 자기 일이고, 오신채를 먹고 육식을 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율장을 보면은 부처님께서도 고기가 아니면 낫지 않는 병이 들었을 때, 대중에게 통고하고 한 달이나 두 달 절 밖을 나가서 고기를 먹도록 합니다. 건강이 회복되어 육식한 체취가 나지 않도록 치료를 다 해 가지고 대중에게 돌아와 살게끔 그렇게 했거든요. 지금 우리 한국의 승려들은 생활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일반 사람들같이 가서 국수를 사 먹는다든지 이러면 고기를 안 넣고는 먹을 수가 없는데, 그거를 다들 먹거든요. 세속 사람들에게 주는 음식 그대로를 다 먹고 또 뷔페 같은 데 같이 가면은 종류별로 다 먹거든요. 그래서 내가 생각했습니다. 이게 “먹고 안 먹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율의 본뜻을 알도록 해야 되겠다.” 싶어서 율원 세울 생각을 했습니다. 계율 조항, 그거 다 책에 있으니까 자기네가 보고 잘 하겠지 생각합니다. 특별하게 ‘율을 한다’ 그러면 오히려 맨날 찍히는 대상이 되거든요. 뭐 ‘검은 까마귀 흰빛을 세운다’ 하듯이 그것이 생활이기 때문에 안 할라고 했습니다만 이 율원을 해 가지고 부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할 수 있게끔 해야 되겠다 싶어서 율원을 세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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